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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마이크

Grack Thany (그랙 다니) - WAFER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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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6 15:47:46

 

작년에 나온 얼터너티브 힙합 크루 Grack Thany의 컴필레이션 앨범 WAFER는 아직 신선한 충격으로 남아있습니다. 프로듀서 Sylarbomb, Nopitchonair, Curd, Black AC, Syunman과 래퍼 Nubset, Moldy로 이루어진 이 집단은 지난 몇 년간 꾸준히 양질의 앨범을 발매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존재하는 흐름과는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자음악의 영향을 크게 받아 기존의 트랩이나 붐뱁으로 나뉘는 방향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음악적 실험을 해온 그룹입니다.

 

WAFER는 이런 Grack Thany의 음악을 집대성한 좋은 결과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참여진과 여러 명의 프로듀서들이 비슷한 요소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시키며 언뜻 무질서하면서도 방향성이 뚜렷한 작품을 완성시켰었습니다. 씬에서 크게 참고할 만한 현역 사례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훌륭한 성취였습니다.

 

인터넷과 기계적인 소재를 컨셉으로 가사에 반영하는 Grack Thany는 이번 앨범 WAFER 1.91을 저번 앨범의 업데이트로 표현합니다. 물론 제목은 이렇게 지어졌지만 WAFER 1.91은 신곡으로 채워져 전작과는 완전히 분리된 독자적인 앨범입니다.

 

여러모로 WAFER 1.91은 전작과 과감히 다른 점이 많습니다. 전작은 전자음이 주력이었지만 이번에는 기존에 존재하던 서던 힙합의 다양한 흐름도 영향 받은 듯합니다. NONONO! 3019 Cyperphonk는 멤피스의 사악한 느낌을 주는 공간감, Head Banging 80년대 마이애미 베이스의 통통 튀는 바운스를 좀 더 어둡게 해석한 인상입니다. ‘야오밍 10년대 초반에 크게 유행했던 클라우드 랩을 참고한 것을 보입니다.

 

물론 전자음은 여전히 많이 사용됩니다. Syunman의 솔로 인스트루멘탈 트랙 Flow의 휘몰아치는 전자 건반과 신시사이저, ‘태평양의 끊어치는 전자 프레이즈, Hangover의 묵직한 베이스와 트랜스 음악이 연상되는 신스 루프는 Grack Thany가 기존에 추구하던 음악과 크게 결이 다르지 않습니다. 청각적인 면에서 이번 앨범은 전작의 팬인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반가워할 만한 구석이 많습니다.

 

Grack Thany는 다양한 소리들과 특유의 추상적인 가사들을 조합시킵니다. 첫 번째 트랙 Timeline부터 알 수 있습니다. Nubset의 구겨넣는듯한 플로우와 차분한 비트의 대조가 두드러지는데, 이 위에서 자신의 창작을 방해하는 여러 외적 요소들을 의식합니다. 직설적인 문장들도 꽤 있지만 불분명한 대상과 관념적인 표현들까지 특이한 문장들이 주를 이룹니다. 국내 힙합에서는 자주 다뤄지는 소재이지만 이를 풀어내는 방식이 독특합니다.

 

다음 트랙 Hangover애서는 이런 점이 더 부각됩니다. 정신 없고 퇴폐적인 파티에 관한 곡이지만 Moldy는 반 고흐, 신의 가호, 에덴 동산 등등 비교적 무거운 단어를 사용합니다. 훅과 비트가 모두 캐치한 만큼 2 16초라는 짧은 타이밍을 알뜰하게 잘 사용한 트랙입니다.

 

청자가 WAFER 1.91에 대해 가질 인상은 이런 면에서 나뉠 겁니다. 청각적 재미가 난해할 수 있는 가사들을 다시 생각해 보고 싶을 만큼 호기심을 불러일으킬지, 아니면 가사를 곱씹어 보기 전에 취향에 맞지 않아 꺼버릴 지가 관건입니다. 꼬아 쓰는 가사를 구사하는 아티스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고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WAFER 1.91은 대체적으로 성공합니다. 앞서 언급한 다양한 소리들이 이 앨범은 뻔하지 않다는 인상을 확실하게 주고 지루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태평양은 제목 그대로 정보의 바다에 대한 곡입니다. Moldy가 특유의 정신 나간듯한 톤으로 빠른 플로우를 구사하면서 재미있는 감상을 선사합니다. 가사도 컨셉에 충실하게 쓰여져 있어서 무슨 소리를 하는지 무리 없이 받아들여집니다. 인터넷의 야만성을 지적하는 1절부터 그런 곳을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활보하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2절까지 잘 설계된 곡입니다.

 

그에 비해서 다음 트랙 NONONO!는 조금 아쉽습니다. 자살을 묘사하는 트랙인 듯한데 가사가 잘 쓰여져 있지만 약물 사용을 반대하는 훅이 정확히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추상적인 곡 인만큼 듣기 좋았다면 크게 문제될 점은 아니지만, 랩에 비해서 오토튠을 사용한 훅이 아무래도 좋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멜로디컬하게 처리되지 않은 만큼 타격감을 살렸다면 달랐을 거라 생각하는데 발음을 지나치게 흘려서 감상에 방해됐습니다. 랩과 비트 모두 좋았지만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이어지는 Head Banging은 모호하다는 점에서 NONONO!와 비슷하지만 훨씬 좋게 들은 트랙이었습니다. 머리를 흔든다는 간단한 훅과 Nubset의 각운을 놓치지 않고 전부 퉁기는 듯한 플로우, 건조하게 그루브를 강조한 트랙이 제목에 충실한 곡을 만들어냅니다. 정확히 무슨 내용의 가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러니한 표현이 기억에 남습니다. 좁아터진 구역 안에서도 텃세를 부린다던가 썩은 과일을 토해낼 각오로 먹으면서 이를 위장 소독으로 표현하는 등 흥미로운 구석이 많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co6NAzkT1c&list=OLAK5uy_nfDSCsRqipvW9X9ja9kjjkJEW7T_r0pLU&index=5

 

다음 트랙 Shanghai Chicken Snack Wrap 스킷이 3019 Cyberphonk로 이어지는데 이 곡도 좋았습니다. 빠르게 처리되어있는 훅을 변조시키고 급박한 플로우로 구사한 1절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속도가 느려지면서 들어오는 2절의 저음으로 구사한 속사포는 청각적 쾌감이 대단했습니다. Moldy의 뛰어난 랩 피지컬이 빛을 보이는 순간입니다. 프라다 갱한테서 구찌 백을 훔치는 연출이나 영생의 비결은 양아치의 마인드라는 등 뭔가 부조리함이 느껴지는 표현들이 멤피스의 기괴한 분위기와 어우러지면서 가사적으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mH6vA0NW7o&list=OLAK5uy_nfDSCsRqipvW9X9ja9kjjkJEW7T_r0pLU&index=7

 

2AM ShowerWAFER 1.91에서 멜로디가 주를 이루는 트랙 중 하나입니다. Nubset이 공간감 있는 여유로운 비트에 사람들의 시선에 느끼는 강박을 풀어냅니다. 훅의 멜로디도 캐치하고 비트랑 잘 묻어나지만 벌스에 사용하는 가성은 너무 날이 서 있어서 듣기 힘들었습니다. 특히 2절의 랩 벌스는 나른한 톤과 비트가 잘 어울려서 더 아쉽습니다. 많은 래퍼들이 이런 가성을 스타일로 구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도저히 제 취향에는 맞지 않습니다. 이런 부분은 차라리 보컬에 숙련된 아티스트에게 맞기거나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곡의 일부분이 좋게 들은 전체를 망치는 건 언제나 아쉽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야오밍은 아예 전반적으로 실망스러웠습니다. 느린 박자와 우주적인 신스에 방울 소리를 조합한 비트는 나름 매력적인 분위기를 형성시키지만 단순하다 못해 거의 게으르다는 인상을 준 훅은 끝까지 듣기 힘들었습니다. 뚜렷한 멜로디 없이 오토튠을 사용한 것도 좋은 선택 같지 않았습니다. 만약 랩이 강단 있게 박자적인 쾌감을 챙겼다면 오토튠이 곡을 한 층 더 날카롭게 만들어줘 쾌감이 있었겠지만 발음이 너무 흘러서 이도 저도 아닌 곡이 완성됩니다.

 

그렇지만 다음 트랙 악어가 텐션을 다시 올려줍니다. 특히 2절의 Moldy 벌스는 야오밍에서 하고자 했던 바를 제대로 실현한 인상입니다. 강력한 베이스와 중독적인 신스가 합쳐저 웅장한 비트가 완성이 되는데 훅에서 비트가 더 매서워지는 구간은 타격감이 엄청납니다. 뜬금 없는 비유이지만 Method Man의 곡 Sub Crazy를 사이버펑크 버전로 듣는 것 같았습니다. 기괴하면서도 에너지 넘치는 그로테스크한 괴물이 설렁거리는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딱 악어 같은 트랙입니다.

 

Hira가 피쳐링한 1000/0 Remix는 괜찮게 들은 트랙입니다. 가장 인상적인 건 심하게 찌그러진듯한 베이스인데, 이 위에 hira의 얇고 비음 섞인 톤이 잘 어울립니다. 숫자를 세어가는 훅도 캐치하고 기억에 남았지만 Nubset의 벌스가 살짝 아쉬웠습니다. Hira의 변칙적인 플로우가 혼돈스러운 트랙의 분위기를 가중시켰다면 Nubset이 구사한 플로우는 조금 식상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쁘다고 하는 건 무리수지만 좀 더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앨범의 마지막 두 트랙인 PsycheDry Ice 2AM Shower와 비슷한 구성을 가졌습니다. 랩에 약간의 음을 부여하며 전개되는데 두 곡 모두 훌륭했습니다.

 

잔잔한 기타 루프에 트랩 드럼을 입힌 Psyche Moldy의 음정을 아슬아슬하게 타는 듯하지만 견고한 싱잉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악마와 천사의 대조를 그려낸 가사는 내면의 고민을 그리는 듯한데, 주변 파악을 제대로 못하는 듯한 Moldy의 모습이 곡 제목처럼 심리적인 소재를 잘 활용한 케이스로 봅니다. 비트 중간에 들어오는 플룻이나 마지막의 체명악기 아웃트로는 묘하게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기까지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Nv1CDVzjrQ&list=OLAK5uy_nfDSCsRqipvW9X9ja9kjjkJEW7T_r0pLU&index=13

 

Dry Ice는 전혀 예상치 못한 독특한 곡인데, 반복적인 전자 신스와 휘몰아치는 심벌이 인상적입니다. 재즈 비트일거라 생각했던 것이 전혀 다른 소리로 바뀌는 초반 전개가 허를 찌릅니다. 행복에 대해 다룬 가사들 같은데 현주소를 온도 차로 풀이하는 접근이 비유를 자주 사용하는 Moldy다웠습니다. 오토튠이 입혀 펼쳐지는 첫 벌스가 비트가 드럼만 남고 빠지면서 전형적인 랩으로 전환되는 구간이나, 마지막에 전자 악기 신스가 연주하며 페이드 아웃되는 연출까지 다이나믹한 경험이었습니다.

 

WAFER 1.19Grack Thany답게 모험적인 시도가 탄탄한 역량과 공존하는 뛰어난 앨범입니다. 비록 몇몇 곡은 다른 곡들에 비해 뒤쳐지지만 앨범의 색채 자체가 이런 단점을 잘 상쇄시킵니다. 확실한 건 단점과 장점 모두 색다른 시도를 해보고자 한 노력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음악을 통해 들립니다. 안주하는 아티스트는 몰락하고 돌아오기 어렵지만 언제나 앞을 보는 아티스트들은 한번 올라가면 쉽게 추락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WAFER 1.91은 기대되는 모험의 거침없는 다음 장입니다. Grack Thany는 이번 앨범을 통해 앞으로도 충분히 지켜볼 만한 팀임을 한 번 더 증명합니다.

 


Best Tracks: Timeline, Hangover, 태평양, Head Banging, 3019 Cyberphonk, 악어, Flow, Psyche, Dry Ice

Worst Track: 야오밍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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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9 00:30:00

그랙따니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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