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owthai (슬로우타이) - TY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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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3-05 17:56:51

 

영국하면 바로 떠오르는 래퍼들이 있습니다. 주로 Grime이라는 장르의 이름과 함께 Skepta, Stormzy, Wiley 정도가 국내에서는 잘 알려진 편입니다. 서로 간의 시끄러운 디스 전도 있었고 차트를 점령하는 음악들도 주로 이 래퍼들이 냈기 때문입니다. 물론 뛰어난 음악성이 받쳐주니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대중음악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보여주는 영국은 UK Grime 말고도 다양한 힙합을 보여주는 언더그라운드 씬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흐름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래퍼는 slowthai입니다. 아일랜드 혈통의 slowthai는 기존 영국에서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정서를 지닌 아티스트입니다. 소위 말하는 ‘귀족적’ 발음을 구사하지도 않을 뿐더러 70년대의 펑크 록에서 보여주는 반항스러운 발성법을 랩과 접목시켜 구사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음악적인 자양분을 토대로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뿌리 깊은 도심 문제가 자리 잡은 영국의 실태를 2018년작 데뷔 앨범 Nothing Great About Britain에 담아냈습니다. 


순식간에 영국 힙합씬의 총애를 받게되는 slowthai는 이후 Mura Masa와 함께한 Deal Wiv It 싱글로 미국 TV에도 진출합니다. 그리고 영국의 대중음악상 Mercury Prize 시상식에서 영국 총리 Boris Johnson의 절단된 머리 모형을 들어올리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며 승승장구합니다. 하지만 NME 시상식에서 동료를 상대로 논란이 되는 행동과 관객과의 실랑이를 벌이면서 안 좋은 의미로 주목받게 됩니다. 


이에 slowthai는 제대로 사과를 하는 처신을 보여줬지만 정작 해당 코미디언 동료인 Katherine Ryan은 애당초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고 반응했고 앞으로의 행보를 응원했습니다. 현재도 slowthai와는 친하게 잘 지내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대중은 멋대로 판단을 하며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습니다. 언제나 피해자를 중심으로 생각해 문제적인 유명인을 대중 문화에서 삭제시켜야하는 ‘캔슬 컬쳐’가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게 데뷔 이후 다사다난했던 slowthai는 Enemy, BB (Body Bag), 프로듀서 Kenny Beats와 함께한 Magic과 같은 뛰어난 싱글들을 발매하며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런 일련의 선공개곡들이 어둡고 공격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만큼 새로 나오는 신보도 그러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정규 앨범 TYRON의 발매를 예고하면서 내놓은 첫 번째 싱글인 Feel Away는 James Blake와 Mount Kimbie와 함께한 부드럽고 서정적인 트랙이었습니다. 그리고 쭉 발매되었던 싱글도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만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는 듯해 보였습니다. 


제 예상은 정확히 반만 들어맞았습니다. TYRON은 극단적으로 다른 성향의 음악이 Side A와 Side B로 나뉘어 담겨있는 양면성을 가진 독특한 작품입니다. 트랙리스트에서도 전반부 곡들의 제목은 전부 대문자로 표기되어 있지만, 후반부 곡들은 소문자로 적혀있습니다. 힙합의 전형적인 공격성을 띄는 Side A와 인디 싱어송라이터로서의 감성을 지는 Side B는 공간감 의외에는 그닥 나눠가지는 특성이 없습니다. 


앨범을 시작하는 45 SMOKE부터 Side A에서는 무슨 음악을 들려줄지 바로 톤을 잡습니다. 사악한 보컬 샘플과 공간감이 인상적인데, 변조된 건반 루프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멤피스 식 작법을 보여주는데 드럼과 베이스가 더 세련되어 10년대 초반에 유행했고 여전히 존재감이 확고한  클라우드 랩에 가깝습니다. Side A의 다른 곡들도 이런 멤피스 영향이 상당히 짙습니다. 45구경 총기가 뿜어대는 연기를 랩 훅으로 사용하는것도 이런 분위기의 연장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훅만큼 벌스의 내용도 위협적입니다. 자메이칸 방언인 파투아로 쌍욕을 박으면서 아침에 일어나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slowthai가 자란 배경이자 출신에 대해서 많은 부분이 정리됩니다. 바르바디안 어머니를 둔 캐리비안 혼혈이라는 점, 리버풀 응원가와 입었던 의류 브랜드를 이용한 언어유희, 그리고 아웃트로에서는 주변에 마약 상인들이 즐비했다는 사실까지 브릿지 형식으로 풀어내면서 유년기를 굉장히 회화적으로 그려냅니다. 자기과시와 자기소개가 자연스럽게 맞물리는 뛰어난 작사 실력이 돋보입니다. 


slowthai의 암울한 성장 배경은 VEX에서는 더 무섭게 묘사됩니다. 제목과 멤피스 특유의 떼창식 훅에서 볼 수 있듯이 화가 나있는 심리 상태를 담은 곡입니다. 45 SMOKE는 배경의 피해자로서 한  묘사에 가까웠다면 VEX는 능동적으로 폭력적인 환경에 기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대마초 말이에는 취향과 다르게 담뱃잎이 너무 많고 길거리에서 덤비는 적들이 너무 많습니다. 형제는 종신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서 썩고 있기까지 합니다. 자신을 시험하는 적들을 쏴죽일까 고민도 하지만 그래도 겨우겨우 참아냅니다.  


이런 어두운 가사가 튀는 스네어, 숨 넘어갈듯이 급박하면서도 칼같이 박자에 떨어지는 위태로운 플로우, 치밀하게 설계된 라이밍과 중간중간 알람소리 같은 효과음이 겹치면서 강박적인 경험을 선사합니다. 디스토션과 리버브가 과하다시피 깔려있는 훅도 같은 맥락에서 효과적입니다. 화려한 랩 퍼포먼스를 좋아하는 청자라면 전율할 뛰어난 트랙입니다. 또 UK Grime의 팬이라면 추임새나 라인 등에 숨겨져 있는 Skepta 오마주도 흥미로운 구간일겁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S_CHo4WAcA  


slowthai가 Skepta와 친분이 나름 깊은 것 같은데, 전작 Nothing Great About Britain은 물론 이번 앨범에도 콜라보 곡이 있습니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CANCELLED인데 서론에서 다룬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듯합니다. 현재 미국 힙합 씬을 주름잡고 있는 애틀란타 트랩에 가까운 프로덕션을 선보이는데, 중독적인 플룻 루프에 멤피스의 공간감까지 겹쳐 맥락을 끊을 정도로 튀지는 않습니다. 


Skepta는 훅에서 자신은 ‘캔슬’ 당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는 점을 과시하면서 그동안 쌓아올린 업적을 과시하는 동시에 시도하는 사람들은 피를 흘리게 될거라 말합니다. 벌스에서도 익명의 인터넷 악플러들을 공격하고 본인의 작사적 역량을 프랑스 계 작가 Alejandro Jodorowsky를 인용하면서 실력을 과시하는 흥미로운 퍼포먼스를 보여줍니다. slowthai 역시 패기 넘치는 벌스를 뱉지만 곡의 대부분을 Skepta가 차지하면서 정작 곡은 주객전도된 양상이 됩니다. Side A에 3분을 넘기는 트랙이 없는만큼 고의적인 판단으로 보이지만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좋은 곡이지만 더 다듬고 균형을 맞출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렇게 지나치게 짧은 곡 길이를 유지하려는 선택들이 대체적으로 유효하지만 명백히 문제가 되는 경우가 좀 있었습니다. WOT에서 가장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하는데, 상승하는 코드 진행을 루프시키면서 베이스까지 단단한 고무적인 트랙이지만, 58초라는 말도 안되게 짧은 길이라서 막 시동을 거는듯한 slowthai의 생동감 넘치는 벌스가 갑자기 끊깁니다. 충분히 영글어 감흥을 줄 수 있었을텐데도 불구하고 부실한 구조로 인해 답답함이 남습니다. 


slowthai는 충실한 기본기만이 매력인 래퍼가 아니라 좋은 곡을 만들 줄 아는 아티스트입니다. 그런 면에서 앞선 두 트랙은 아쉬움을 남기지만, 전체 트랙리스트에서 두 곡 정도의 예외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나머지 곡들은 날카롭고 영민한 아티스트로서의 면모가 온전히 담깁니다. 


당장 A$AP Rocky와 함께한 MAZZA 같은 트랙 같이 말입니다. 싸이키델릭하면서도 간단한 트랩 비트 위에 정갈한 훅과 두 명의 래퍼가 재치 있는 랩 퍼포먼스로 완성시킨 인상적인 곡입니다. 멍청한 짓, 미친 짓 정도로 해석될 수 있는 영국 슬랭 mazzalean의 약자인 제목에 걸맞게 장난기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캐치한 훅과 플로우의 이면에는 마약에 의존중인 slowthai의 모습이 가려져있습니다. 가사와 플로우가 정반대를 가리키고 있는 모순적인 카타르시스가 있는 트랙입니다. 특히 피쳐링하는 A$AP Rocky의 벌스는 정말로 별 근심 없이 재치 있는 라인들로만 차 있어 slowthai의 가사적 방향성이 더 두드럽니다. 신나면서도 묘하게 비극적인 트랙인데, 중독적인 요소들이 많아 뇌리에 새겨집니다. slowthai와 A$AP Rocky 모두 서로의 플로우를 참고하면서도 차별점을 적당히 둔 것과 특히 A$AP Rocky가 벌스 마지막에 다시 slowthai에게 바통을 넘기는 연출도 재밌었습니다. 단순히 벌스를 얹어 주는게 아니라 같이 고민하고 트랙을 만들어낸 것 같은 정성이 느껴집니다. 


초반부 다섯 트랙은 공격적이거나 신나는 쪽에 가까웠다면 6번 트랙 DEAD부터는 분위기 전환이 시작됩니다. DEAD 역시 영락없는 멤피스 트랙이지만 공격 대상을 선정하기보다는 본인의 유산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 트랙입니다. 트랙의 프로듀서인 Kwes Darko가 훅에서 육체를 빼앗기고도 정신은 남아있다는 가사를 뱉는데 멤피스 트랙의 전형답게 필터링을 강하게 걸어서 저승에서 들려오는 메시지 같이 섬뜩합니다. 건반 루프로 기존 골자를 설계한 트랙이지만 전반적으로 보컬 샘플이 아니라 내레이션에 가까운 무언가를 배경에 깔아놓아서 저주 받은 비디오 테잎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실로 오싹한 트랙인데, 여기에 slowthai도 조금 더 끈적하고 느릿한 플로우로 인생의 허무함과 속세로부터의 탈출 등등 암울한 소재를 다룹니다. 비트는 어두울지언정 나름 업 템포라 더 기괴하게 들립니다. 계속 듣다가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은 곡이면서도 너무 중독적이라 끊을 수가 없습니다. Side A에서 가장 좋게 들은 트랙 중 하나입니다. 


이런 서사의 전환은 PLAY WITH FIRE에서 제대로 보여집니다. 전자 음악가 Caretaker의 음반에서 들을 법한 신비로운 분위기의 기타 루프로 이루어진 비트가 비교적 밝은 느낌을 줍니다. 트랙이 진행되면서 배경에 총소리와 화음이 깔리고 악기가 추가되는데 트랙이 끝날 때 즈음에는 경건하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slowthai의 플로우도 한 층 차분해지고 더 절절해집니다. 자신의 자전거는 브레이크가 없다는 표현이 특히 폐부를 찌릅니다. slowthai는 계속 추락하는 자신의 모습을 인지함에도 불 멈출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합니다. 여기에 비트를 다운 피치시키고 마무리 즈음에는 독백을 하면서 트랙이 끝납니다. 


이렇게 역동적인 앨범의 전반부를 지나 차분해지고 더 예쁘다고 할 수 있는 앨범의 후반부인 Side B에 진입하게 됩니다. 


첫 트랙 i tried부터 자명합니다. 시카고 아티스트 Trey Gruber의 2019년작 i tried를 보컬 샘플로 활용했는데, 피치를 아이들이 부르는 것처럼 변조시켜 루프 시킨 비트가 초창기 Kanye West가 생각납니다. 여기에 잔잔한 블루스 기타 리프도 깔리면서 편안하고 애틋한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벌스도 차분한 플로우로 처리되어 튀는 부분 없이 둥글둥글한 곡입니다. 


여기에 세상이 온갖 역경을 던져도 항상 다시 사랑하려고 노력했다는 가사는 청자를 뭉클하게 만듭니다. 문학적으로 아름다운 문장이 너무 많은데 가끔씩 힙합 특유의 유치한 비유법도 들어가 유머도 챙깁니다. 울면서 웃게되는 매력이 있는 트랙입니다. 


이어지는 focus도 비슷한 형식의 트랙입니다. 앞서 언급한 Kwes Darko와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스타 프로듀서 Kenny Beats와의 합작으로 완성된 트랙인데, Drake가 떠오르는 알앤비 샘플로 만들어진 비트입니다. 조금 평범하다는 인상은 있지만 디테일이 뛰어납니다. 특히 클랩 드럼이 탁 치고 나오는 구성이 맘에 들었습니다. 물론 Kenny Beats답게 구간마다 피치를 바꾼다거나 샘플을 감속시키는 등등의 자잘한 장치들을 배치시키기도 합니다. i tried가 고무적이고 애틋한 감상이었다면 focus는 좀 더 서정적인 고독함이 느껴졌습니다. 


가사도 좀 더 가벼워집니다. 본인의 단점들을 포용하고 인생에서의 우선 순위를 재조정하겠다는 의지를 담아내는데, 마구 슬프다기보다는 앙칼진 다짐처럼 들렸습니다. 확실히 잔잔한 감동이 있는 곡입니다. 특히 남성 래퍼가 본인의 단점을 끌어안는 모습을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 설화와 연관 짓는 것은 독특한 접근법이었습니다. 


아예 힙합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봐도 무방한 트랙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럼으로써 Side B의 의도된 분위기를 제대로 관철시키는데, Deb Never와 함께한 push가 좋은 예시입니다. 인디 포크 감성에 가까운 잔잔한 어쿠스틱 루프에 Deb Never의 천상에서 내려온 듯한 멜로디와 화음이 바로 청자를 몰입시킵니다. 무슨 내용인지도 알아듣기 전에 눈물부터 돕니다. 아름다웠다는 말 밖에 안 나옵니다. 여기에 드럼도 없이 slowthai가 랩을 시작하는데, 목숨을 걸 것처럼 토하듯이 랩하는 플로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slowthai가 직접 흥얼거리는 훅도 들어오는데 나른한 멜로디와 배경에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어오면서 오는 잔잔한 감동이 또 대단했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매순간 감정을 고양시키는 훌륭한 트랙이었습니다. Side B는 물론 TYRON 전체에서도 손꼽히게 좋은 곡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UEetegqhSY 


push처럼 객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장르를 탈피한 감흥을 주는 트랙으로는 James Blake와 프로듀서 Mount Kimbie가 함께한 feel away도 있습니다. slowthai가 부드럽지만 통통 튀는 코드 진행의 기타 루프 위에 비슷한 플로우로 랩을 하는데 워낙 리듬감이 있어 드럼의 부재가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읊조리는듯한 훅이 들어오면서 그제서야 같이 등장하는데 휘파람 소리랑 맞물리면서 오히려 더 고독해집니다. 


사이가 멀어지는 연인과의 관계를 돌아보며 결국 자신의 책임이었다고 자책하는 트랙인데, slowthai는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느낌이라면, James Blake가 들어오면서부터는 감정을 더 드러내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청자를 감싸는 화음과 힘을 빼도 절절함이 묻어나는 James Blake 특유의 창법은 곡의 취지를 너무 잘 살려냅니다. Mount Kimbie의 비트와 slowthai의 자조적인 분위기에 무게감을 더해 균형을 잘 맞춰줬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에 Mariah Carey의 1993년작 Dreamlover의 코러스를 샘플로 사용하는데, 풋풋한 원곡을 이렇게까지 슬프게 들리게 하는것도 프로듀서의 재능을 잘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게스트 없이 slowthai 혼자서도 Side B의 부드러운 음악성을 훌륭하게 실현합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코로나 시대에 특별히 더 고생을 하는 영국 국민 보건 서비스 사람들에게 바치기 위해 만들었다는 곡 nhs가 그 반증입니다. 


피치 변조처리가 되어 있는 훅과 명랑하게 울려퍼지는 기타 도입부로 바로 청자를 몰입시킵니다. 훅이 끝나고는 차분한 드럼과 건반이 깔리는데 덕에 slowthai의 아름다운 가사가 바로 들립니다. 차근차근 진행되는 플로우에 건반과 현악 세션이 조금씩 쌓이는데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슬퍼서라기 보다는 어떤 초월적인 공감이 주는 희열이라는 표현이 옳을 것 같습니다. slowthai는 이 앨범에서 가장 행복한 트랙이라고 인터뷰에서 언급했는데, 왜인지 알 것 같습니다. 삶에 대한 거시적인 통찰력으로 감흥을 주는 트랙은 흔치 않습니다. 심연의 가장 깊은 곳에서 부르는 인생 찬가입니다. 가사적으로 nhs와 연관이 없지만, 시대의 풍파에 선봉으로서 맞서 싸우는 사람들을 위한 헌정가로는 손색이 없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BbxFeSTJ2Y 


하지만 Side B는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방향성 안에서 나름 롤러코스터처럼 스펙트럼을 오가는 역동성이 있습니다. 찻잔 속의 폭풍 같은 현상인데, focus의 다음 트랙 terms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싱어송라이터 Dominic Fike와 래퍼 Denzel Curry가 함께한 곡인데, 분위기가 Side B에서 눈에 띄게 어둡습니다. 굳이 비유해서 표현하자면 느와르 영화에서 주인공이 과거를 돌아보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바로 쾌감이 오는 Dominic Fike의 간결하면서도 알찬 훅이 도입부를 장식하는데 Denzel Curry의 추임새가 한껏 멋을 살려줍니다. 망령이 깃든 듯한 음울한 기타와 건반 진행, 그리고 섬뜩한 화음이 깔려 있는 비트와 너무 잘 어울립니다. 


여기서 slowthai는 자신의 유명세가 가져오는 수많은 단점들에 대해서 납득하기로 합니다. 오히려 고통이 없는 즐거움에 관해 회의를 품으면서 본인의 입지를 받아들입니다. 밟아온 길은 험난했고 지금의 위치가 아무래도 과거보다는 낫다는 사실에 위로 받는 듯합니다. 특히 2절에서 점점 감정이 격앙되는 플로우와는 상반되게 가사 내용은 모순을 수용하는 식이라 억지로 눌러 삼키는 듯한 비장미를 보여줍니다. Denzel Curry가 벌스보다는 멤피스 식으로 추임새와 브릿지만 더한 것이 기대와는 달라 안타깝지만 곡이 워낙 잘 나온만큼 큰 상관이 없습니다. 


이렇게 Side A의 공포감은 이따금 다시 등장하는데 TYRON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adhd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분한 플로우와 속삭이는듯한 훅, 그리고 기타가 메인 루프라는 점에서 Side B의 면이 있지만 트랩 드럼과 음산한 분위기는 전반부와 더 닮았습니다.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절망적인 트랙인데 초반부에는 깜짝 놀라게 되는 비명소리도 갑자기 튀어나옵니다. 자아를 잠식하는 정신병의 굴레에 갇혀 미쳐가는 slowthai는 곧 스스로 삶을 끊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중간에 본인이 아끼는 사람과 전화 통화를 하기 위해 랩을 멈춥니다. 덕에 마지막에는 일단 살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면서도 마구 소리를 지르는 플로우를 구사해서 여전히 위태로운 정신 상태를 다시 한번 청자에게 강렬하게 전달합니다. 벼랑 끝에서 투신 자살을 고뇌하는 주인공이 정말로 뛰어내리는지를 안 보여주고 갑자기 끝나는 영화를 본 기분입니다.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마무리입니다. 


TYRON은 slowthai의 본명입니다. 주로 앨범 명을 본명으로 짓는 경우 아티스트는 자신의 내면과 자전적인 이야기를 곡에 투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TYRON 역시 그런 공식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앨범에서 청자가 얻게 되는 소재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만큼, 실린 음악의 질적 완성도가 감흥을 결정 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그 무거운 서사와 소재를 음악이 충실히 담아내는지가 관건입니다. 


그리고 TYRON은 그런 면에서 완벽한 성공작입니다. Nothing Great About Britain은 slowthai의 광적인 페르소나가 살고 있는 배경에 의해 망가지는 모습을 담아낸다면, TYRON은 그런 망가지는 모습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생기는 내적 갈등을 담아냅니다. 겉으로는 총리의 잘려나간 머리 모형을 치켜올리는 반항적인 혁명가이지만, 안으로는 불행했던 유년기의 PTSD에 시달리는 거리의 생존자입니다. TYRON은 이런 양면성을 무기로 치밀하고 몰입도 높은 서사를 전개합니다. 


고개를 흔들다가도 눈가를 적시게 됩니다. 


Best Tracks: 45 SMOKE, MAZZA, VEX, DEAD, PLAY WITH FIRE, i tired, focus, terms, push, nhs, feel away, adhd

Worst Track: WOT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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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1-03-05 21:20:28

랩이 참 찰진 친구죠

WR
2021-03-05 21:57:14

정말 잘 듣고 있는 래퍼입니다ㅎㅎ 미래가 창창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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