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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나티 (BIG Naughty) - Bucket 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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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4-09 14:26:20

무작정 젊은 문화하고 하기에는 꽤 오래 됐지만 힙합의 원동력은 여전히 젊은 세대입니다. 이는 90년대부터 하나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고 그 어느 때보다 규모가 커진 지금 더욱 자명합니다. 지금의 10대는 20대 중반인 필자의 학창시절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다양한 취향을 향유하고 힙합은 당당하게 한 자리를 꿰차고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많은 고등래퍼들이 배출되고 그들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는 늘었지만 이를 음악적인 역량으로 치환시킨 경우는 적습니다. 실력자들의 절대적인 수는 이전 세대와 비슷하지만 훨씬 커진 집단의 규모를 생각하면 그 비율은 현저히 낮습니다. 다들 아직 어린 나이라 경험이 부족해서 일수도 있지만, 냉정히 말하자면 변명에 불과합니다. 힙합의 역사에는 래퍼들이 청소년기에 발표한 수많은 명반들이 이미 존재합니다. 온 길도 험난했지만 갈 길도 많이 남은 존재가 고등래퍼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놀라운 재능으로 벌써부터 두각을 드러내는 신세대 래퍼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또래에 비해 훨씬 빨리 음악적으로 성숙했고 이런 역량이 10대만이 가능한 나름의 순수한 정서와 만나 고등래퍼로서의 치기를 장점으로 승화시킨 경우입니다. 그 최전선에 있는 리더들 중 하나가 서동현 (이하 BIG Naughty)입니다.

 

물론 단도직입적으로 Bucket List는 명반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깨에 힘을 주고 만든 출사표라기보다는 순간의 창작 욕구를 분출시키는 곡 모음집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창작자에게는 이런 앨범은 마구잡이로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실험을 해도 소위 말하는 까방권이 있으며 앞으로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무게감도 없습니다. Bucket List에서 제가 기대한 것은 견고하게 설계된 곡들과 BIG Naughty가 이전까지 보여준 탄탄한 보컬과 랩 하드웨어입니다.

 

그리고 보컬리스트 JAMIE와 함께한 첫 곡 Joker부터 Bucket List는 제 기대감을 충족시켜줬습니다. 이 사람 정말이지 노래 너무 잘합니다. 잔잔한 라틴 풍의 기타와 스네어 드럼으로 만들어진 단순한 비트 위에 BIG Naughty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합니다. 이성과의 순간적인 끌림을 매혹적으로 풀어내는 곡인데, 간드러진 저음과 열정적인 고음역대를 가성과 진성을 너무 쉽게 오가며 능수능란하게 소화합니다. 단순히 노래를 잘하는 것을 넘어 감정선과 스타일의 경계를 자지러질 정도로 잘 탑니다. 중반에 배치된 짧은 재즈 피아노 솔로와 캐치한 멜로디보다는 화음과 분위기에 더 신경을 쓴 JAMIE의 피쳐링도 스포트라이트를 뺏지 않고 잘 어울립니다. 곡의 큰 뼈대부터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전부 맘에 들었습니다.

 

 

이는 다음 트랙 Frank Ocean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Cosmic Boy의 서정적이면서도 훵크적인 리듬 위에서 잔잔한 보컬 퍼포먼스가 잘 어울립니다. 지나간 과거의 애인을 그리워하는 노래인데 약간의 향수를 자극하는 유효한 접근법이었습니다. 전 애인에게 아내가 되어달라는 가사는 얼핏 귀엽게까지 느껴지지만 일종의 절제된 절절함이 보이기도 합니다. 훅에서 화음이 쌓이면서 현악기까지 깔리는데 정말로 Frank Ocean이 연상됐습니다. 브릿지에서는 대놓고 Frank Ocean의 전설적인 2016년 앨범 Blonde의 수록 곡들인 NikeSolo를 오마주합니다. 자신의 주변 이성관계를 과거와 비교하며 후회하는 맥락에서 보면 적절한 가사 인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마주는 표절과의 경계가 흐릿해서 기분이 나빠지기 쉬운 음악적 장치인데 개연성을 챙기려는 세심한 디테일에서 정성이 느껴져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오마주는 Bucket List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송창식의 담배가게 아가씨멜로디를 참고한 커피가게 아가씨도 그 중 하나인데, 이 곡에서도 BIG Naughty의 재치가 엿보입니다. 미성년자가 매점 알바에게 이성적인 접근을 하는 가사라 수줍은 풋풋함이 핵심인데, 담배 가게라는 가사를 그대로 오마주 했다면 거부감이 드는 괴악한 곡이 나왔을 겁니다. 본인의 대외적 이미지를 음악과 일치시키는 영악한 곡입니다. 전자 건반과 관능적인 베이스가 두드러지는 PEEJAY의 비트 역시 두말할 것 없이 훌륭했습니다. 전성기 Beenzino2000년대 초반 D’Angelo의 음악이 연상됐습니다.

 

BIG Naughty의 랩도 인상적인데, 아주 약간의 음가를 첨가하지만 기본적으로 박자를 흐름대로 유연하게 탑니다. 인위적인 느낌이 전혀 없는데 이런 자연스러움이 뛰어난 박자 감각의 반증인 동시에 곡의 편안함을 잘 받쳐줍니다. Anderson .Paak 같은 R&B의 끈적함과 한국 포크의 서정성이 합쳐진 독특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어지는 원슈타인의 벌스는 코러스처럼 처리된 더블링과 비교적 정석적인 붐뱁 래퍼의 면이 보여 흥미로운 대조를 보여줍니다. Bucket List에서 가장 균형이 잘 잡힌 곡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오마주가 담긴 Rohann과 함께한 멋진 신세계는 가장 의외라 느꼈던 폭발적인 곡이었습니다. PEEJAY가 제공해준 찌그러지는 기타와 강력한 베이스로 이루어진 뉴메탈이 연상되는 비트도 놀라웠지만, 얇은 톤으로도 이런 강렬함에 눌리지 않는 BIG Naughty도 대단했습니다. 메탈은 고사하고 펑크와도 안 어울릴 것 같은 목소리를 오히려 얄밉고 건방진 톤으로 구사해 개성 넘치게 밀어붙입니다. G-Dragon이 연상되는 능글맞은 플로우도 이런 선택의 일환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여기에 훅에서 응원가 같은 화음까지 추가되면서 반항적인 고무감이 한껏 강화됩니다. 정직하고 묵직하게 경험담과 반항심을 버무린 Rohann의 피쳐링과 후반부에 Rage Against The Machine 노래들이 생각나는 디스토션 걸린 보컬까지 흥미로운 요소들이 너무 많습니다. 세태의 모순으로 대중에게 체제 저항 자체가 수치스럽게 비춰지는 작금에 가감 없이 이런 곡을 만든 BIG Naughty가 고맙기까지 합니다. 훅의 기타 사운드가 좀 더 크게 믹싱이 되었다면 하는 아주 작은 아쉬움은 있지만 근본 자체는 너무 훌륭합니다. 동명의 Aldous Huxley의 소설에서 따온 제목 값을 합니다.

 

 

하지만 치밀한 완성도를 보여준 앞선 네 곡에 비해 앨범 후반부에 위치한 트랙들은 비교적 완성도가 떨어집니다. 5번 트랙 ‘10년 후에서 minit 특유의 통통 튀는 비트와 BIG Naughty의 조합이 썩 나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향수를 표현하는 가사도 아름답습니다. 그렇지만 함께한 Paloalto의 정석적인 라이밍은 빠른 템포의 비트에 실리면서 단어를 마구 우겨 넣는 듯한 인상을 줬습니다. 속도감의 핵심은 유연함과 여유라고 생각하는데 비트에 쫓기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가사는 좋았는데 아쉽습니다.

 

부라보도 좋은 노래지만 역시 피쳐링 기용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BIG Naughty의 멜로디가 빛나는 트랙인데, 건반만 들어오는 구간에서는 황홀하다는 느낌까지 받을 정도였습니다. 훅도 심플하지만 잘 묻어나고 캐치했습니다. 하지만 Coogie의 달달한 벌스는 눈에 띌 하자는 없었지만 굳이 필요 있었나 싶을 정도로 지루했고 길지도 않은 곡을 늘어지게 합니다. GRAY의 디테일이 살아있는 치밀한 비트, GSoul의 탄탄했던 보컬 퍼포먼스와 BIG Naughty만으로도 충분했을 곡입니다. 단 것도 연달아서 먹으면 느끼합니다.

 

다행히도 마지막에 배치된 타이틀 곡은 다시 한번 텐션을 올려줍니다. DPR CREAM이 제공한 신나는 신스 비트 위에 속도감 있게 랩을 소화하는 BIG Naughty는 다시 한번 건실한 기본기를 뽐냅니다. Bucket List 통틀어 가장 화려한 랩 퍼포먼스를 보여줍니다. 훅이 살짝 작위적이고 너무 단순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듣다 보면 크게 거슬리지 않습니다. 아쉽지만 어떤 면에서는 더 기억에 각인되기도 하는 중요한 요소였다는 생각도 듭니다. 무엇보다 두 번째 벌스에서 서울의 밤 풍경이 시각화되는 선명한 묘사들은 Bucket List에서 최고의 순간 중 하나입니다. 뇌리에 각인되는 강렬한 마무리입니다.

 

Bucket List는 죽기 전까지 체험해 볼 소원이자 성취들을 적어놓은 리스트입니다. 노년에 쓸만한 리스트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유년에 써놓는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주체적이고 이상적인 태도입니다. 목적 의식의 부재가 한국 젊은 세대의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지금 앨범 명을 이리 지은 청소년의 모습은 퍽 기특합니다. 물론 컨셉 앨범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지만 다해보고 죽고 싶다라는 전반적인 정서는 확실히 전해집니다. 20대라는 이른 시기에도 찌드는 곳에서 탐구하는 10대의 모습은 각별하게 다가옵니다. 어려서부터 수많은 책임에 매몰되는 한국에서 모험심을 간직한 BIG Naughty의 음악은 미소를 띠게 합니다.

 

Best Track: Joker, Frank Ocean, 커피가게 아가씨, 멋진 신세계

Worst Track: 10년 후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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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21-04-13 02:37:01
올해 들은 엘범들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좋게 들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초반부가 지루하고 후반부가 재미있더라구요. 커피가게 아가씨, 멋진 신세계, Bucket List 세 곡이 가장 마음에 들었네요. 같은 학생이다보니 공감되는 가사도 많아서 감명깊게 들었습니다. 엘범 전체적으로는 약간 질리는 느낌이 있어서 멋진 신세계같은 느낌의 곡도 많이 해주면 좋을 것 같네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WR
1
2021-04-14 00:40:53

확실히 학생의 입장에서는 더 흥미롭게 다가왔을 것 같네요! 저도 10대들의 반응이 제일 궁금한데 주변에 없으니...ㅋㅋㅋ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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