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따 - 살아숨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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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5 21:42:32

근래 힙합 씬에서 염따만큼 성공을 맛본 사람은 없습니다. 중견 래퍼가 적극적인 인스타 활동으로 팬층을 확대시키는 것도 신기하지만, 동료의 벤틀리를 박은 사진이 박힌 티셔츠를 팔아서 거금을 축적한 과정은 시적이라는 느낌마저 듭니다.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개츠비를 소재로 희극을 썼으면 나올법한 시나리오입니다.

 

하지만 염따의 재평가는 한참 전부터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무한도전에도 나왔었고 MTV에서 MC로 활동하기도 했었던 염따는 이미 성공의 문턱을 밟아봤습니다. 많은 래퍼들이 예능으로 진출하면서 작품 활동에 제대로 매진하지 못하지만 염따는 달랐습니다. 살아숨셔 시리즈와 MINA 같은 앨범들은 탄탄한 가사적 서사와 기발한 프로덕션, 안정적이고 독특한 멜로디의 싱잉 랩을 결합한 뛰어난 수작들입니다.

 

특히 살아숨셔라는 염따만의 유행어는 활동 초기부터 함께해온 상징적인 어구입니다. 지금은 빠끄라는 유행어에 밀려 많이 사용되지 않지만, 그의 음악에서는 항상 등장했습니다. 정확한 의미는 염따만이 알겠지만, 동료 현역들에 비해 늦게 조명을 받은 성공 가도를 돌아보면 여러모로 죽지 않고 살아 숨쉰다는 표현은 그의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살아숨셔라는 표현을 위시한 정규 앨범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살아숨셔 3가 발매되었습니다.

 

살아숨셔 3는 기존의 살아숨셔 시리즈와는 사뭇 다른 방향성을 보여줍니다. 기존의 살아숨셔 시리즈는 전자 신스의 비중이 컸습니다. 공간감 있는 비트 위에 염따의 멜로디를 풀어가는 식으로 설계된 곡들이 주를 이뤘습니다. 하지만 이번 살아숨셔 3는 신스의 비중이 많이 줄어들고 그 자리를 유형의 악기들이나 힙합의 더 기본적인 문법에 가까운 편곡들이 채웁니다.

 

앨범의 시작인 Role Model부터 알 수 있습니다. 고무적인 소울 샘플과 트럼펫 루프가 자축하는 분위기를 제대로 연출합니다. 돈에 쪼들리던 염따에게 월급날이 왔고, 귀감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소주 광고 모델로서의 삶으로 정의되기를 바랍니다. 끊어치는 플로우로 신나게 뱉어대는 곡을 듣고 있자면 저절로 입 꼬리가 올라갑니다. 특유의 긍정적인 분위기를 너무 잘 담아내는 인트로입니다.

 

이어지는 Zion. T와의 하나두도 좋은 곡입니다. 약간의 라틴 리듬이 느껴지는 기타 루프와 뉴 에이지의 향기가 묻어나는 희망찬 피아노가 인상적입니다. 염따의 흥얼거리는 듯한 창법이 훅에서 약간의 울음이 섞이는데 별 전개 없이도 사람을 울컥하게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특히 가사가 힘들어하는 청자를 위로하는 내용인지라 감동이 극대화됩니다.

 

염따가 상당히 공감될 만한 일상적인 가사들을 풀었다면 피쳐링한 Zion. T는 좀 더 개인적인 시각의 서사를 제공합니다. 보컬보다는 랩에 가깝게 곡을 소화하는데, 20대를 자신의 곡으로 치환하고 그 곡의 값어치와 연결 지으며 전개하는 방식이 괜히 마음을 아리게 합니다. 가벼운 트랩 드럼까지 상당히 가요적인 곡인데 그런 대중적인 공식의 모범적 실행입니다.

 

 

다음 곡 K.vsh와 함께한 지난밤은 기존 살아숨셔 시리즈의 곡들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곡입니다. 하우스 음악이 생각나는 부유하는 드럼과 플룻을 변주한듯한 브릿지가 인상적인 비트입니다. 사랑에 급격히 빠지고 바로 잠자리를 함께하는 남녀의 관계를 그리는데, 노골적이면서도 가사가 상당히 예쁩니다. 소리적인 측면에서 귀를 제대로 자극하는 곡인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곡일 겁니다. 그래도 저는 염따나 K.vsh가 곡과 그저 어울리는 정도에서 그친 면이 아쉽습니다. 더 뚜렷한 훅의 부재도 아쉬웠고 보컬은 너무 분위기만을 위해 제대로 짜여진 멜로디를 희생한 감이 있습니다.

 

비슷한 맥락을 다룬 이어지는 곡 PEEP PEEP PEEP이 훨씬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잔잔한 기타와 가벼운 트랩 리듬으로 만들어진 곡인데, 알람 소리를 모티프로 가져가는 곡입니다. 그래서 인지 비트에 시계 태엽과 바늘 소리를 넣어놨는데 이게 청각적으로도 더 긴밀한 분위기를 형성시킵니다. 실험적인 선택이 말초적인 감각을 심화시키는 교과서적인 사례입니다. 곡에서도 특정 부분을 속삭이며 처리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센스가 돋보입니다.

 

아침의 알람 소리가 울릴 때까지 사랑을 나눈다는 이야기의 곡인데 지난밤보다도 더 가사가 노골적입니다. 특정 체위를 연상시키는 무릎에 화장품을 바르는 묘사나 분수 등의 비유는 적나라함과 일종의 신비감을 아슬아슬하게 탑니다. 편안한 분위기지만 묘한 긴장감이 공존한다는 데 있어서 곡의 취지를 제대로 실현합니다. 피쳐링한 기린의 비중이 워낙 적긴 하지만 방해되거나 하는 면이 없어서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달달한 분위기가 다음 곡 아야에서 슬픈 톤으로 바뀝니다. 미안하면서도 결국 자신의 여자에게 더 이상 사랑을 느끼지 못해 이별을 통보합니다. 구슬픈 피아노 멜로디와 목을 긁는 염따의 멜로디,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가며 나오는 추임새도 이런 분위기를 심화시킵니다. 특히 가사가 정말 비극적인데, 사랑과 성공을 저울 위에 올리고 자신이 완전히 나쁜 사람이었던 것을 시사하는 가사들은 염따의 솔직함이 절실하게 묻어나는 구간입니다.

 

심연을 마주하는 것 같은 어두움은 그녀와 나의 느와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퇴폐미가 있는 트랙인데 앨범 초반부의 사랑 노래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건반을 역재생 시킨듯한 트랩 비트인데, 학창 시절 소득 수준 차이가 나는 상대와의 연애를 그립니다. 가사가 은근히 모호하게 적혀 있어 정확히 구도가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생생한 디테일의 탈선 경험과 빨간 벽돌집 안의 여자를 꿈꾸는 모습은 캐서린을 바라보는 히스클리프가 생각납니다. 영혼을 쥐어짜는듯한 멜로디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톤이 비극성을 특히 더 부각시킵니다. 직전에 배치된 아야가 성공과 사랑 사이에서 고민한 트랙인 것을 생각하면, 망가진 관계 이후 자신의 문제점을 과거에서 찾으려는 것을 상징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녀와 나의 느와르이후 이어지는 트루먼쇼에서는 염따가 다시 한 번 승리를 자축하며 꿀꿀한 분위기가 환기됩니다. 호쾌한 내래이션 인트로, 사촌의 유니클로를 졸업시켰다는 가사, 잔잔하면서도 펑키한 기타와 통통 튀는 비트는 좋았지만 실망스러웠습니다. 내래이션을 제외하고는 트루먼쇼라는 제목에는 맞지 않은 곡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시선에 정의되는 것이 트루먼 쇼의 핵심인데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주제를 너무 일차원적으로 낭비했습니다. 특히 앨범의 첫 트랙에서 이미 자축을 했기 때문에 겹치는 감도 있었습니다.

 

살아숨셔 3는 기존의 시리즈와는 다른 사운드를 추구하는 것은 맞지만 대체적으로 상업성의 코드를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부드러운 사운드와 대중적인 멜로디를 섞어서 편안하고 긍정적인 색깔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이런 팔레트를 크게 벗어나서 과감하게 아예 다른 시도를 하는 곡들도 몇몇 있습니다.

 

Northfacegawd, JUSTHIS 그리고 래원과 함께한 존 시나가 대표적입니다. DJ co.kr가 제공한 빵빵한 브라스로 구성된 그라임 비트는 염따 커리어 통틀어서 한번도 못 들어본 선곡이었습니다. 염따의 촘촘한 라임과 동일 단어 반복으로 이루어진 훅부터 랩적인 쾌감이 극대화 된 트랙입니다. 입 냄새 나는 헤이터를 저격하는 염따, 그리고 사랑 제일 교회를 디스하는 Northfacegawd 모두 말하는듯한 플로우를 구사하는데 유머를 자극하는 구간입니다. 래원도 상당히 추상적으로 한참을 랩하는데 마지막에 페이드 아웃하면서 염따가 욕하듯이 중얼거리는 게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JUSTHIS도 평소대로 변칙적인 속사포로 재밌는 플로우를 구사했습니다.

 

최근에 The Quiett과 함께 설립한 Daytona Entertainment를 언급하는듯한 트랙 Daytona도 흥미로웠습니다. 지저분한 90년대 그런지 록이 생각나는 기타 리프, 얼터너티브 록 밴드 Queens of the Stone Age가 생각나는 가성 추임새, 그리고 퍼지는 드럼이 뭉쳐서 염따에게서 평생 기대하지 않은 분위기의 곡이 완성됩니다. 단순히 자랑을 넘어 부와 명예에 제대로 취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성 대신에 다이아몬드를 보고 자위하는 모습에서는 광인의 강박까지 느껴집니다. 우습게 본 친구에게서 되려 배우고 같이 사업을 시작하는 기승전결이 곡이 짧은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임팩트 있습니다. 특히 후반부에 프로듀서 Mike Dean이 생각나는 지저분한 신스 사운드는 여운 있는 마무리를 선사합니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사운드를 선택했다고 해서 염따가 근본적으로 아예 스타일을 바꿨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여전히 랩과 싱잉의 경계를 흐리는 보컬을 구사하고 사랑, , 그리고 때때로는 어둡기까지 한 과거사를 풀어놓습니다. 굳이 하나의 차이점이라 하면 살아숨셔 3는 성공을 염원하는 염현수가 아니라 명백히 성공을 이룬 염따의 시작이라는 점입니다.

 

발매에 앞서 선공개된 BENTLEY 1.5가 이런 면을 잘 보여줍니다. 둔탁한 드럼과 끈적한 베이스 위에 밝은 건반은 라이브로 연주를 할 때도 별 무리가 없을 겁니다. 거기에 마구 쏟아지는듯한 드럼 프레이즈도 중간중간에 등장하는데 지금까지 염따의 노래들과는 상당히 다른 감성입니다. 자신을 단순한 졸부로 치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답가인 가사도 이미 성공한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습니다. 밑에 글에서도 쭉 쓰겠지만, 염따의 성공 이면의 모습을 간과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이런 긍정적인 분위기로 승화시키는 면이 멋있었습니다.

 

 

살아숨셔 3는 염따의 영광 뒤에 자리잡은 염현수의 고민과 사념을 보여줍니다. 염따는 여전히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들을 움직이는 호소력과 센스를 갖추고 있습니다. 호쾌하고, 솔직하고, 재미있고, 무엇보다 감동이 있습니다. 전작들의 풍성한 사운드가 더 좋았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최근에 염따를 알게 된 팬들에게는 가장 좋은 앨범으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더 대중적이고 단순해졌지만 그 안에 자리잡은 이야기와 염따의 내공은 여전합니다.

 

Best Tracks: Role Model, 하나두, PEEP PEEP PEEP, 아야, 그녀와 나의 느와르, 존시나, Daytona, BENTLEY 1.5

Worst Tracks: 트루먼쇼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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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20-12-05 22:53:40

Daytona.... 잘 이끌어주세요 ㅋㅋㅋㅋ

 

글 잘 읽고 갑니다!

WR
1
2020-12-06 21:13:57

ㅋㅋㅋㅋㅋㅋㅋㅋㅋ정말 부심 넘치는 이름이 됐습니다ㅎ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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