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렸던 감상 싹 다 하기 프로젝트 pt.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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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2 21:52:40

리뷰라기보다는 일기장에 쓸만한 글을 옮겨왔다는 느낌으로 적어보는 앨범 소감문입니다.


대상: 

적어도 세 곡 이상의 앨범.

내가 아는 / 어디서 들어본 아티스트 + 뭔가 지나가다가 추천 받거나 들어주세요! 했던 거라든지... 그런 앨범들


주의:

음알못. 특히 사운드알못.

붐뱁충.



(1) Muddy Red - Who is Muddy Red (2020.11.11)


 개인적으로 Muddy Red라는 이름을 처음 본 것은 Hunger Noma의 "Weird Tales"에 피쳐링으로 참여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하드코어 힙합하는 신인 래퍼인가 싶었는데, 이번 기회에 찾아보니 첫 싱글을 2014년에 발표했고, 그보다 5년 전에는 Loptimist 랩 컴피티션에 우승한 경력이 있던 분이더군요. 2014-2015년 동안 여러 싱글과 앨범을 발표하다가 공백기를 가진 뒤, 올해 들어 믹스테입 "Objet"와 본인에게는 두 번째 앨범인 "Who is Muddy Red"를 발표했습니다. 보니까 소속이 Snacky Chan의 레이블인 "Dynasty Musik"으로 되어있군요.


 Muddy Red의 스타일은 올드 스쿨 붐뱁을 지향하는 래퍼입니다. 고전적인 느낌의 비트 위 고집스럽게 지키는 정박과 정확히 짝을 맞춘 라임만 해도 그렇지만, 발성에 대한 정석적인 접근과 어려운 비유 없이 직설적인 가사 내용까지 면면히 올드 스쿨의 느낌을 따르고 있습니다 - 심지어 오랜만에 보는 세 번째 벌스까지 채워 곡을 만드는 래퍼입니다. 하드코어 래퍼인가 싶었던게 무색하게 이런 특징 때문에 Muddy Red의 음악들은 꽤 편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가사가 쉽고 딜리버리도 깔끔한 덕분입니다.


 하지만 단점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올드 스쿨이란 말은 누군가에게는 촌스러움이란 단어로 작용하며, 그건 본작도 피할 수는 없는 부분입니다. 촌스러움을 야기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아마도 발성에 있는 것 같습니다. 내지르는 듯한 발성은 워낙 고정되어있어서 곡따라, 혹은 곡의 전개따라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경직되어있습니다. 여기서 톤의 운용은 단순히 "개츠비"처럼 힘을 뺀다고 적절히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또 은근히 스타일에 맞지 않게 박자나 발음이 부정확해지는 데가 있어 ("Where You At 형 Remix" 같은 속사포가 대표적) 몰입을 방해하기도 했고, 참신하지 못하고 전형적인 플로우 디자인과 라임 배치도 아쉽습니다.


 나름 타이틀 곡인 "Where You At 형" 같은 곡은 Muddy Red의 랩과 비트의 분위기가 잘 맞물려서 의도한 바에 제일 가깝게 나온 곡일 거 같습니다. 나머지는 랩과 비트 간의 괴리도 있었고, 피쳐링진에 스포트라이트를 뺏기는 경향이 있네요. 생각보다 오랜 커리어를 가진 래퍼임을 이번에야 알았는데, 그 커리어의 길이가 뭔가 틀을 굳혀놓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차후에 이 틀을 깬다면 더 듣는 재미가 있는 곡으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2) Q the Trumpet - YELLOW FLOWER (2020.12.2)


 Q the Trumpet은 이름에서 보다시피 트럼펫 세션맨으로 활동한 이력이 있습니다. Simon Dominic, Drunken Tiger의 작품 참여부터 Tom Misch 내한 공연 무대에까지 올랐다고 하며, 2018년 발표한 첫 앨범 "Duvet"도 본인의 트럼펫과 다른 비트메이커의 비트가 만난 재즈/힙합 인스트루멘탈 앨범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다음 해부터 가사를 쓰고 랩을 하게 되면서 래퍼로써의 커리어도 생기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두 번째 정규인 "YELLOW FLOWER"가 탄생하였습니다.


 우선 미리 말하자면 트럼펫은 앨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진 않습니다. 믹싱에서도 그렇게 크게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인스트루멘탈 곡에서도 그렇습니다). 다만 전곡 프로듀싱 역시 본인이 담당하였으며, 때문에 재지한 느낌이 전체적으로 묻어있습니다. 그럼에도 곡들은 정직하게 90대 BPM의 4/4 리듬을 짚어가는 비트로, 재즈는 향기만 나는 정도라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첫 두 트랙에서 노골적으로(?) 크리스마스를 언급하듯, 동시에 수록곡들은 겨울에 어울리는 따스함을 품고자 하였습니다. Q the Trumpet의 랩은 어렵지 않게 담겨있어서 듣기 편안한 분위기에 한몫합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YELLOW FLOWER"는 대중적이랄 수 있는 앨범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드코어한 힙합이나 심오한 음악을 원한다면 이 앨범은 오글대는 음악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음악의 구조나 의도가 상당히 직설적인 데다, Q the Trumpet의 랩 자체가 딱히 깊이 있지 않은 탓입니다. 중간중간 등장하여 따스한 분위기를 돋구는 부드러운 싱잉은 좋으나, 전체적으로 공기 비중 높은, 속삭임 같은 랩은 분위기와 어울리는 것과는 별개로 김샐 때가 있습니다. "I wanna live in dream" 같은 발성을 다른 곡에서도 조금 활용했다면 좋았을 거 같은데 말이죠 (사실 "I wanna live in dream"은 또 앨범에서 혼자 소리 지르는 곡이라 너무 괴리가 있습니다. 적당한 중간을 찾았으면 좋았을 거 같습니다).


 저의 취향에서는 좀 무미건조한 앨범이었습니다. 사실 피쳐링진들이 꽤 화려하긴 하면서도 피쳐링진들도 마찬가지로 심플한 랩을 담았기에 앨범 방향성 자체가 이랬다 라고 해석하는게 좋을 거 같습니다. 따스한 느낌의 랩에도 관심이 있다면 연말에 차분하게 앉아 감상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근데 왜 이거 슬픈 그림만 그려지지...).



(3) LT - 2 Many Problems (2020.12.8)


 LT는 과거 Tee Time이란 듀오로 처음 이름을 알린 래퍼입니다. 이 시리즈에서는 2018년 나온 "EXIT"란 EP에 대한 글을 쓴 적도 있고, 이후로 Syler의 크루 "New Area"의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었군요. 저는 사실 들었던 마지막 소식이 "EXIT"였는데, 그 사이에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 후 나온 앨범이 "2 Many Problems"입니다.


 "EXIT" 때를 떠올려보면 LT는 로우파이한 비트 위 우울한 분위기로 랩을 하는 래퍼였고, "2 Many Problems"의 기본 얼개는 그 분위기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앨범은 '문제'에 대해 계속 언급하지만 정확히는 그 문제가 뭐라고 지적하지 않고, 단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애매모호하게 고민하고 고뇌하고 불안해합니다. 후반부에 "247" 같은 조금 기운을 북돋는 곡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이런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진행됩니다.


 우울한 분위기를 즐기는 분이라면 괜찮게 들을 수 있는 앨범입니다. 설명만 보면 쳐지고 지루한 앨범일 거 같지만, 트랙들이 전부 3분 전후로 너무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게 잡혀있어 완전히 지루함에 빠지기 전에 앨범은 마무리 됩니다. 또 LT의 랩톤이 다운되어있으면서도 너무 다운되지 않게 컨트롤을 하면서, 동시에 툭툭 끊기지 않는 유연함이 있어 물 흐르듯 따라가며 감상 가능합니다. 비트들만 비교하면 같은 분위기를 잡고 모은 타입 비트라서 서로서로 많이 유사한 점은 있지만 감상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닙니다. 더 까다롭게 군다면 LT의 플로우가 참신한 느낌은 좀 떨어진다는 점 정도를 지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테마를 정하고 여기에 통일성 있게 전체 트랙을 꾸려 앨범다운 구성으로 만든 점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으레 이런 무드의 앨범이 갖게 되는 단점, 즉 강한 한 방의 부재 등은 피할 수 없긴 합니다만 (위에서 말했듯 "247" 같은 대안이 있긴 합니다) 이정도면 아마도 거의 LT의 의도대로 잘 뽑힌 작품일 거라 생각합니다. 마지막 앨범인 각오로 만들었다는 말을 보았는데, 정말로 마지막은 아니기를 바라며 다음 작품을 기다리겠습니다.



(4) lobonabeat! - lobonatune i (2020.12.9)


 lobonabeat의 새 EP "lobonatune i"는 그 제목처럼 오토튠 싱잉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믹스테입 시절부터도 거의 랩으로 음악을 해왔던 걸 고려하면 아예 앨범을 만든 것은 새로운 시도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i"라고 되어있으니 lobonabeat가 요즘 빠진 장르일지도 모르겠어요.


 왠지 예상했지만 수록곡들은 전부 짧고 가벼운 구성입니다. 벌스가 둘 이상 들어가있는 경우가 거의 없고 길이는 짧죠. 원체 간단한 구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음악을 잘 만들어왔던만큼, 중독적인 멜로디와 리듬을 짜는 부분에서는 여지 없이 실력을 발휘하긴 합니다만, 저는 이번 스타일이 그냥 랩을 할 때보다 많이 단조로웠습니다. 예를 들어 수록곡 중 "LSD"는 기존 lobonabeat의 스타일을 고려해도 훨씬 단순하게 만들어져있습니다. 


 TNF 크루이니만큼 마리화나 얘기는 당연히 들어갈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은근히 마리화나 피우는 얘기가 한국 랩에서 흔해진 반면 본작에선 (사실이건 아니건) 아예 마약을 판매하는 얘기를 풀고 있어 신선했습니다. EP로 나왔다고 알고 있는데 마지막 트랙이 보너스 트랙 표기를 안 한 건가 싶을 정도로 뜬금 없고 전체적으로 가벼워서 믹스테입 느낌이 나는군요. 조금 기대하던 것에 못 미친 감이 있지만, 들은 사람들의 여론이 괜찮은 걸 보면 그저 제 취향이 작용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5) DDungbo - About 27 (2020.12.9)


 DDungbo란 이름이 어색한 분들도 아마 Friemilli나 FLOCC 쪽의 앨범을 듣다보면 들리는 'DDungbo eat that shit'이란 시그니처 사운드는 익숙할 것입니다. DDungbo는 FLOCC의 멤버는 아니지만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활동해온 비트메이커로, 작년 Zene the Zilla의 "야망꾼"을 시작으로 멤버들의 앨범에 활발하게 참여하여왔으며, 자체적으로는 Siren of Seoul이라는 크루에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올해 8월에 나온 싱글은 이 앨범의 선공개였으니 "About 27"은 적어도 음원 발매로썬 DDungbo의 첫 작품인 셈입니다.


 FLOCC 크루와 그 측근들은 다양한 스타일을 갖고 있지만 가만 보면 타이트하게 짠 랩을 터뜨리듯이 뱉는 방식은 공유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이들이 모였기 때문에 "About 27"은 재밌게도 랩으로 트랙 간 통일성을 획득하였습니다. 곡으로 보면 차분한 "About 27" "FGU"와 공격적인 "상승" "EAT IT UP" 등 어느 정도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지만, 랩 스타일도 그렇고, 곡들이 짧은 곡이 많아 마치 짧은 시간 다량으로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는 듯한 느낌으로 곡들이 지나갑니다.


 워낙 비트 듣는 귀가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비트 자체가 엄청난 독특함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워낙 합을 많이 맞춘 래퍼들이라 그런지 케미는 상당히 좋은 편이며, 후반부에서 좀 희한한 리듬을 타는 "상승"이 인상적이다보니 피쳐링진 중에서 greenbeige가 기억에 남는군요. FLOCC 특유의 색깔을 좋아하신다면 후회 없는 앨범일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후다닥 지나는 느낌이 끝내 아쉬움으로 남네요.



(6) Kweeel - TRAP TADDY RILEY EP (2020.12.10)


 Kweeel은 본래 QLLE이란 이름으로, 이 시리즈에서 truz와 함께 소개한 적 있는 크루 mndst8에서 활동하는 비트메이커였습니다. 이후 이 크루에서 나와 독자적으로 활동하다가 본인의 이름으로 된 첫 작품인 "TRAP DADDY RILEY EP" (오타 아닙니다)를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여담으로, 어릴 적부터 영국에서 오래 살다가 귀국했다는 배경이 있네요.


 살짝 훑어볼 때 음악은 제목대로 트랩 쪽입니다. 그런데 단순한 트랩을 예상하고 듣다보면 상당히 오묘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트랩이긴 하지만 Teddy Riley 및 90년대 소울 R&B를 오마주한 제목과 커버처럼, 당시의 느낌이 담긴 악기와 샘플을 활용하였거든요 - 잘 들어보면 노이즈나 음정이 휘는 느낌도 이런 LP판 시대의 바이브를 담은 거 같군요. 그런데 드럼 루프와 오토튠 싱잉은 트랩 느낌인데다, 목소리에 각종 이펙트를 먹여 왜곡시키고 겹쳐쌓아 만든 사운드가 여기에 섞이니 상당히 기묘한 불협화음을 일으키면서 예측 불허한 음악으로 탄생하였습니다.


 유통사와의 문제도 있었고 내러티브도 따로 없어 가사를 싣지 않았다고 하는데, 확실히 앨범의 포커스는 사운드에 치우쳐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Kweeel의 목소리가 살짝 뒤로 빠져있어 독특하게 혼합된 소스에 한데 뒤엉키는 양상입니다. 첫 인상에서 단순한 트랩 비트 같던 트랙은 이런 여러 소리들이 복잡하게 어울리며 전개되면서 듣는 사람의 긴장감을 유도합니다. 22세기 트랩이 표현이 적절할까 싶네요. 앨범 곳곳에 배치된 "randominterlude" "3AMINMYBEDTRIPPINONEX" 같은 인스트루멘탈 트랙은 그의 사운드 조율 능력을 제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예입니다.


 어찌 보면 mndst8 크루와는 색깔이 확연히 구분되면서도, 거꾸로 곳곳에 들리는 90년대 음악에 뻗친 뿌리가 공통 관심사였겠구나 생각이 듭니다. 다만 소리가 뭉개져있고 왜곡된 채 뒤섞는 방향으로 엔지니어링이 되어있다보니 듣는 이들에 따라선 혼란스럽기만 할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이는 의도한 부분이었을 거 같긴 하고 저는 재밌었지만, 인상적이긴 한데 무슨 인상인지 한 마디로 요약이 안 되는상황도 유발할 순 있겠군요. 아무튼 의외의 발견이었습니다. 이번에 확인한 사운드를 다루는 솜씨가 추후엔 좀 더 깨끗하게 정리된 트랙으로도 만나봤으면 좋겠습니다.



(7) ONiLL - Cabin (2020.12.11)


 2019년에만 세 장의 앨범을 발표할 정도로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여줬던 ONiLL이, 마지막 앨범 "The Ilian" 이후 비교적 잠잠한 기간을 갖다가 새 앨범 "Cabin"으로 돌아왔습니다. 평소보다 길었던 공백기만큼 이번 앨범은 첫 정규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며, 프로듀싱, 믹싱/마스터링은 물론 아트워크까지 본인이 전부 도맡은 앨범입니다.


 ONiLL을 기억하는 분은 전형적인 붐뱁 비트와 탁하고 건조한 목소리의 나긋나긋한 랩으로 그를 기억할 것입니다. "Cabin"은 그러한 ONiLL을 그대로 유지하되, 이전 앨범보다 더 넓은 감정의 폭을 가져가고 있습니다. 우선 "Cabin"은 "Snooze (Intro)"의 모닝 알람으로 시작하여 새로운 하루에 대한 설렘과 낙관으로 이어지는 낮, 대략 "Holy"를 기점으로 진지해지고 때론 애상에 젖기도 하는 저녁,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OU"부터의 세 트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재밌는 건 마지막 두 곡인 "Couching"과 "Pack Up"은 오히려 짐을 싸서 나가는 과정이란 점으로, 단순 반복적인 하루가 아니라 오늘과 다른 내일로 나아가면서 앨범이 마무리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전작 중 "Tie Your Shoes"로 대표되는 부드러운 감정과 "The Ilian"으로 대표되는 어두운 감정이 그에게 있다면, "Cabin"은 낮을 대표하는 전반부와 밤을 대표하는 후반부에서 각각 이 두 가지를 느껴볼 수 있습니다. 사색적인 그의 태도와 음악에 대한 진지함은 가사를 감상함에 있어 집중할 포인트입니다. 톤 운용이 많이 되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목소리가 특색이 있어서 그다지 아쉬운 점은 없고,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성에 잘 어울린다 느꼈습니다.


 다만 전 앨범들에서도 언제나 느꼈던 부분이지만, 건조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간단하게 루핑되는 비트 (이는 그가 아는 붐뱁을 재현하는 방식 중 하나일 겁니다)가 지루하게 느껴질 사람들은 분명 있을 것입니다. 특히 전반부 트랙들은 가벼운 느낌을 주기 위해 소스가 단촐한데, 붐뱁에서 댐핑을 중요시하는 저로써는 곡들이 너무 힘이 빠져있다 느껴서 좋은 인상을 받지 못 했습니다. 그런 제게 중요한 건 곡의 두께로, 그나마 "Holy"나, oceanfromtheblue의 코러스가 신비로움을 한층 더해준 "Blue" 같은 트랙은 인상적이었지만 중반을 제외한 전반과 후반에서 모두 같은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사실 이런 아쉬움은 ONiLL의 지난 앨범에서 동일하게 느꼈던 부분이라 일종의 아이덴티티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고쳐야된다고 주장하기보단 이와 맞는 사람이 들으면 될 테죠. 감상이 끝나고 앨범 자켓을 보니 수채화처럼 그려진 그림이 꽤 어울리는군요. 이런 부분을 단점으로만 치부하지 않고 ONiLL이 털어놓는 감정의 디테일한 묘사와 변화, 서정적인 표현에 주목한다면 그에게 공감하고 몰입하면서 앨범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8) Jerry,K - Home (2020.12.11)


 언젠가 말한 적 있는 거 같기도 하지만, '사상의 충돌'을 우려하여 Jerry,K 앨범을 듣지 않는 것은 은근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입니다. 최근 앨범까지 훑어보아도 Jerry,K가 '그 사상'을 피력한 노래는 별로 없으며, 이미 우리는 일반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있는 사람이라도 음악이 좋으면 들어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결국 Jerry,K의 문제는 언제나 음악이었습니다.


 새 정규 앨범인 "Home"은 어쩌면 그것을 제일 극명하게 드러내는 앨범일지 모르겠습니다. 첫 트랙 "Back Home"에서 천명하듯 그는 이 앨범에서 '머리맡에서 할만한 얘기'를 늘어놓습니다. 이는 앨범 제목이 암시하듯 일상 생활에서 따온 소재만으로 곡을 만들었단 것으로, 아직 스탠스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살짝 암시하는 첫 트랙 가사를 제외하면 이번 앨범 노래는 지극히 개인적인 그와 그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역시 취향 탓을 할 수 있겠지만, 즐길 거리를 찾기 어려운 앨범이었습니다. 일상적인 소재는 뻔하게도 편안한 무드로 처리되어, 예쁜 표현들과 부담스럽지 않은 플로우로 마감됩니다. 첫번째 문제는 이 일상적인 소재의 빈곤입니다 - 앨범 중반부는 전부 자신의 아내와 강아지 얘기로 채워져있습니다. 일상적인 일에서 얘기할 것이 막 넘쳐날리 만무하기에 결국 같은 얘기에서 맴도는 느낌을 받고 맙니다. 표현들은 예쁘장하긴 하지만, 결국 플롯이 진행되지 않다보니 너무 많은 미사여구를 얹은 것 같기도 합니다.


 또 여태 계속 느껴왔던 Jerry,K와 트렌디한 작법 사이의 괴리가 있습니다. 군데군데 들어가있는 오토튠과 ooh ya 같은 추임새들은 젊은 감성을 내려했던 것 같지만 영 어색하기만 합니다 - 이런 감상은 꽤나 오래 전부터 느껴왔던 부분이기도 하고 아직도 해결이 안 된게 아쉽습니다. 애초에 Jerry,K는 무게감이 장점인 래퍼인데, 이것을 흐느적대는 플로우로 담아내려하니 핀트가 안 맞고, "쎄쎄쎄2" "갈색 푸들" 같은 통통 튀는 비트를 타려하니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답답하기만 합니다. 이런 단점이 곡 분위기 때문에 그나마 적은 "Back Home"이나 "안고 있어" 정도는 들을만 했지만, 나머지는 '아... 아저씨...'란 반응이 나와버렸습니다.


 일상을 소재로 삼아서 문제가 된게 아니라, 그로 인해 일어날 문제 - 소재의 반복성, 쳐지는 무드 - 에 대해 안일하게 대처한게 문제였습니다. 그 외엔 사실 기존에도 다 보여줬던 문제들이고요. 전작 "Red Queen Theory"가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런 이상한 바이브 없이 딱 본인에게 어울리는 옷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마왕" 때를 언급하는 건 이제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 이미 10년이 더 지나버린 돌아오지 않는 과거의 모습은 엥간한 래퍼는 다 갖고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현재를, 오직 음악만 가지고 감상하려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Jerry,K의 "Home"은 답답함만 남아버렸습니다.



(9) 재규어중사 & Monocat - CATWALK (2020.12.11)


 8BallTown 소속의 R&B 싱어 재규어중사와 비트메이커 Monocat의 합작 앨범입니다. 고백을 하자면 기린 때처럼 재규어중사 역시 들어보지도 않고 술탄 오브 더 디스코 같은 느낌의 가수인 줄 알았습니다 - 작년 앨범을 듣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지만, 꽤 늦은 뒷북이었죠.


 "CATWALK"의 프로듀싱을 담당한 Monocat의 전자음 비트는 무척이나 절제되고 가라앉아있습니다. 음 하나하나가 마치 조심스러운 한 발짝을 떼는 것처럼 천천히 진행되죠. 이에 맞춰 재규어중사도 감미로우면서도 절제된 노래를 선보입니다. 보너스 트랙 "FFLS"를 제외하면 전곡이 이런 느낌이라 소리 면에서는 터지는 것을 기대할 순 없습니다. 거의 숨고르기 트레이닝을 하는 것 같단 생각도 들었어요. 다만 여기에 하나 재미 요소가 있으니 가사입니다. 절제된 창법에 어울리지 않는, 가끔은 만화적일 정도로 과장된 표현들은 묘한 불협화음을 일으키면서 듣는 재미 요소가 됩니다 - 비록 사소하긴 하지만요.


 개인적으로는 재규어중사의앨범을 제대로 들어본게 이번이 처음인데, Raphouse on Air에 출연했을 당시 한국에 좀 더 공격적인 (표현이 정확한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R&B가 있어야한다고 코멘트한 적 있습니다. 이번 앨범은 결코 그런 성향은 아니니 이런 특징은 콜라보 앨범이라 보여준 색깔이겠죠. 그래도 이번 감상으로 그의 음악 세계에 대한 관심은 더 커진 바, 추후 재규어중사의 앨범에서 호기심을 충족해보겠습니다.



(10) 바끼리 - Drill Mixtape: DRILLIN' MYSELF (2020.12.12)


 스타일 변화 이후 두 장의 믹스테입을 연이어 내고 다시 스타일 연구에 들어간 바끼리가 이번에는 드릴 앨범이라면서 새 믹스테입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드릴하면 쏟아내는 랩 속에 살아있는 리듬감과 타격감 등을 연상케 되는데, 바끼리는 이것을 한국식으로 좀 더 멜로디컬하게 변형해보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선 바끼리의 직전 믹스테입과 비교하면 확실히 땜핑은 더 살아있는 느낌이 나는데요. 그간 믹스테입에서 보여줬던 싱잉이 단조롭고 지루하게 들리는 구석이 있었던 걸 생각하면 그 단점을 보완하기엔 좋은 변화입니다. 하지만 이는 바끼리의 곡들을 자세하게 비교했을 때 나오는 결론이고, 크게 보았을 때 드릴을 해서 뭐가 그렇게 많이 변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앨범 내 곡마다 편차는 조금 있어서 조금 더 타이트하게 죄는 곡도 있지만 싱잉 랩 스타일로 풀어놓은 곡도 있는데, 후자의 경우는 비트는 드릴이긴 한데 접근법 자체는 기존에 하던 것과 같게 들리기도 합니다.


 세 번째 믹스테입까지 들으면서도 계속 비슷한 음역대와 코드, 비슷한 플로우 디자인에 동일한 2훅-1벌스-2훅 구조의 짧은 곡들만 이어지면서, 솔직히 다 듣고 나선 좀 진이 빠졌습니다. 이쯤되면 과감한 포인트를 줄만도 한데, 본인이 바끼리가 되어 새로 갖춘 스타일이 아직 익숙치 않아서인지 너무 작은 틀에 갇혀있는 것 같네요. 드릴을 시도한 것 자체가 어색한 변화는 아니어서 추후에도 그대로 반영을 했으면 좋겠는데, 다음 앨범은 주무기인 멜로디컬한 곡으로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오케이, 이것도 그 자체론 나쁜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이왕 할 거 정말 제대로 해줬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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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0-12-23 01:30:13

진짜 많네요! 다 듣는 것만으로도 힘드시겠습니다 ㅋㅋ

숨겨진 릴리즈들까지 고려하면 과잉공급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ㅠㅠ

WR
2020-12-23 03:01:45

진짜 요즘은 좀 많긴 해요

게다가 KMC라는 곳에서 두 번째 프로젝트까지 출격시켰다고 하니 또 안 들어볼 수가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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