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렸던 감상 싹 다 하기 프로젝트 pt.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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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2 21:23:41

리뷰라기보다는 일기장에 쓸만한 글을 옮겨왔다는 느낌으로 적어보는 앨범 소감문입니다.

좀 까야되는데 좋은 글만 적은건가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음... 그래도 그게 행복한 거겠죠?ㄷㄷ


대상: 

적어도 세 곡 이상의 앨범.

내가 아는 / 어디서 들어본 아티스트 + 뭔가 지나가다가 추천 받거나 들어주세요! 했던 거라든지... 그런 앨범들


주의:

음알못. 특히 사운드알못.

붐뱁충.



(1) VINXEN - FLYING HIGH WITH U (2021.3.7)


 빈첸은 지난 앨범 "유사인간"에서 이제 그만 힘들어하겠다고 얘기했던 바 있습니다. 이번에 나온 트리플 싱글은 그 약속을 지키듯 비교적 편안하고 가벼운 노래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의 과거 곡인 "SINKING DOWN WITH U"의 의미를 뒤집은 "FLYING HIGH WITH U"와 "필요가"가 그런 노래들인데, 밝은 분위기와 오토튠을 빼고 담백해진 목소리가 일단 귀에 들어옵니다. 사실 "필요가" 같은 가사는 아직은 미묘한 느낌이 있고, "소나기"의 어두침침한 바이브도 있어서 마냥 밝아졌다고만 할 순 없겠지만, 애초에 그게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지면 빈첸이 아니었겠죠.


 "유사인간" 때 오토튠 비중이 큰 것에 대한 말이 좀 있었는데, 사실 특유의 발음으로 의도적으로 뭉개버리는 딜리버리가 주는 느낌을 더 강화시키는 장치로 생각했기 때문에 오토튠이 그리 싫진 않았습니다. 어쨌건 오토튠을 뺀 그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감미롭지만, 이런 딜리버리의 특징도 고스란히 있긴 합니다. 이 분위기에서 재발견하게 되는 건 그의 멜로디 메이킹 능력입니다 - 장르 팬이 아닌 자신만의 팬을 적잖이 보유하고 있는 그로써는 기다려준 팬들을 사로잡으면서 음악성도 유지시키는 좋은 전략 같습니다.


 아직까지는 원래 본인이 갖고 있던 느낌과 대중적인 느낌을 잘 조율했다 생각되는데, 그럼에도 앞으로도 이러한 균형을 유지해나갈지는 확신이 들지 않는군요. 요근래의 곡들로 봐서는 "병풍"의 곡들 같은 건 다시 나오기 힘들거란 생각이 듭니다. 뭐 이런 스타일도 나름의 매력을 지니고 있기에 응원하지만, 제가 아는 빈첸에서 너무 멀어지진 않았으면 합니다 - 이건 지나치게 꼰대 멘트인가...

 


(2) 888Unpublic - HUBBLE (2021.3.8)


 888Unpublic은 익숙한 이름의 프로듀서는 아니지만 활동 경력을 뒤져보면 2013년부터 곡이 나오는, 짧지 않은 창작 기간을 보내온 비트메이커입니다. 저는 KOREANGROOVE 앨범에서 이 이름을 처음 확인했었는데, 이 인연은 과거 A.D.#.D. 크루에 속하면서 시작되었고, 실제로 KOREANGROOVE가 "GROOVY"란 이름을 쓸 때 콜라보 믹스테입도 낸 바 있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현재 어느 크루에 속해있는 것 같진 않지만 FLOCC 크루의 멤버들과 친분을 이어가고 있고, 또 KINGdumbs 크루와의 친분도 있어 D-Hack 앨범에도 참여를 몇 번 한 듯합니다.


 "HUBBLE"은 그의 첫 앨범으로 이러한 친분을 바탕으로 여러 래퍼 및 보컬이 참여하였습니다. 첫눈에 들어오는 것은 우주를 테마로 한 앨범 컨셉으로, 허블 망원경을 앨범 제목과 자켓으로 쓴 것부터 곡 제목이 각종 성운, 은하, 우주선의 이름이라든지, 앨범 곳곳에 쓰인 우주선 송수신 내용의 샘플까지 컨셉에 부합하는 여러 장치들이 보입니다. 앨범은 전체적으로 슬로우 R&B 풍을 띄고 있는데, 리버브와 패닝으로 공간감이 극대화된 신스들이 어우러져 마찬가지로 우주의 광활한 공간을 표현하려 한 듯합니다. 


 이렇듯 컨셉에 충실하게 앨범을 디자인한 것과 더불어 마음에 들었던 것은 다양한 피쳐링진입니다. "HUBBLE"은 인트로 (특이하게 2번 트랙이죠)를 제외하면 4곡 밖에 안 되는 작은 앨범이지만 피쳐링진이 10명이 넘는데, 이 피쳐링진들 이 돌아가면서 노래를 하면서 조금씩 스타일의 차이를 확인시킬 때의 느낌이 무척 좋았습니다 - 단체곡이라 하기엔 규모가 작지만 단체곡의 묘미를 느꼈달까요. 서로서로 가장 대조되어 벌스가 바뀔 때마다 바이브를 갱신하는 "HR 2491"이 그런 의미에서 제일 좋았던 것 같습니다.


 냉정하게 따진다면, 우주적인 컨셉을 차용하였지만 수록곡들의 내용은 평범할 수 있는 사랑 노래여서 마감을 하지 못한듯한 찜찜함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런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라 분위기로써의 통일성과 컨셉과의 일치가 좋은 편이라, 단순한 프로듀싱 앨범으로 넘기기에는 아쉽습니다. 많은 것이 밀도 있게 담겨있기 때문에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무게감을 갖고 있는 앨범이며, 888Unpublic이란 이름을 쉽게 잊히지 않게할 인상적인 EP였습니다.



(3) Untell - WILL (2021.3.9)


 "WILL"은 Untell의 새 EP입니다 - 첫 솔로 정식 앨범이 될 수도 있었지만, 아티스트 표기에 없을 뿐 실제로는 프로듀서 Will Not Fear와의 합작 앨범으로 소개하고 있어 애매하군요. 말 그대로 Will Not Fear가 총 프로듀서를 맡았지만, 프로덕션 면에서는 Untell이 찍은 비트도 하나 있고 Will Not Fear와 함께 "Deadbois"인 H4RDY의 비트도 마지막에 있습니다 - 곡 수가 많지 않다보니 이 정도 구성으로도 다양한 프로듀서진을 갖춘 셈이 됐습니다.


 소개글에 따르면 앨범은 한글이 공용어가 된 2111년을 떠올리며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설명이 없으면 그런 배경이 있으리라곤 추정하기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WON" 같은 트랙이 어느 정도 한글 얘기를 하긴 했지만, 원래 한영혼용 가사를 즐기는 Untell 치고도 이번 앨범에는 영어 가사의 비중이 상당히 큽니다 - 아예 벌스 하나씩 통째로 영어로 채웠으니까요. 개인적으론 이 의도가 상당히 궁금하더군요 - 한글이 공용어화된 세계에서의 영어 랩이란 상상은 재밌긴 하지만요.


 Will Not Fear는 본래 일렉 쪽 음악을 하는 프로듀서로 분류하는게 더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앨범의 템포나 전체적인 드럼 루프는 EDM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Untell이 과거 shinyujinssi와 냈던 "Do You Still Wanna Lie?" 역시 전자 음악의 느낌이 많이 났었던 걸 보면, Untell의 취향이 꽤나 확고하다 보는게 맞을 것 같군요. 그의 쇳소리 살짝 섞인 톤과, 얇고 가볍게 내달리는 랩 스타일을 생각하면 이런 바이브의 비트는 상당히 잘 어울립니다. 이것만으로 기본적인 '청각적 쾌감'은 획득하게 됩니다.


 "WILL"에서의 Untell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 단계 더 나아가, 훨씬 능숙해진 톤 운용을 보이고 있습니다. 군데군데 Kendrick Lamar가 들린다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할 분도 있겠지만, 독특한 그의 목소리가 마치 선과 악을 넘나들듯 유연하게 바뀌는 모습은 거의 묘기에 가깝습니다. 여기에 "SPHONE"나 "ANA" 같은 긴 벌스를 한 번에 끊임없이 소화하면서 펼쳐지는 그의 랩은 한 편의 역동적인 그래픽 아트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는 긴장감을 놓을 새 없이 계속 변화하는 비트도 크게 한몫합니다). 피쳐링으로 참여한 O'Domar와 Deepflow가 결코 밀릴 래퍼가 아닌데도 이 앨범에서는 Untell의 랩만이 강렬하게 살아남습니다.


 위에서 말했듯 이 앨범은 영어의 비중이 매우 높고, 저는 영어가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 무리하게 시도하는 영어 랩을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만, 앨범이 워낙 청각적인 효과에 치우쳐있어 가사를 보지 않고 들을 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영어 랩엔 알파벳 하나씩 끊어가는 부분이 상당히 많은데 이런 부분은 랩으로 소화하기에 꽤 어려웠을 텐데도 빈번히 등장하는 건 청각적 '묘기'를 위한 장치였지 않을까 합니다. 다만 그나마 조금 가사에 힘을 준 듯한 마지막 트랙 "ANA"까지 포함하여 앨범에서 메세지가 너무 버려져있는듯 했습니다. 사운드를 위한 희생이었을지 몰라도, "나의" 앨범에서 보여준 스토리텔링 능력과 앞서 얘기한 흥미로운 세계관을 고려하면 완전히 개운하진 않습니다.


 어쨌든 "WILL"은 Untell의 래퍼로써의 능력을 재확인시켜준 앨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Do You Still Wanna Lie?"와 연계해 생각해보면 Untell은 자기가 어떤 곡에서 어떻게 할 때 제일 멋지게 보이는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위에서 말한 단점보다 더 아쉬운 거라면, 전작 ("Do You Still Wanna Lie?")과 마찬가지로 너무 짧았다는 거겠네요. 물론 "나의"는 엄청 길긴 했지만, 이런 짜릿함을 담은 적당한 규모의 앨범을 기다리게 되는군요.



(4) Kid K - Satisfaction & Thirst (2021.3.11)


 Kid K는 Kapital G 크루 소속의 래퍼로, 이 시리즈에서는 이미 Yizumin 프로젝트와 Kapital G x Frogman 앨범으로 몇 번씩 언급한 바 있습니다. Kapital G 크루의 래퍼들, 특히 King Bart와 몇 개의 싱글과 앨범을 낸 바 있지만, 솔로 앨범은 이번이 처음인 듯합니다.


 Yizumin 프로젝트의 인상이 강했기 때문에 타이트하고 그루비한 랩을 생각했는데 정작 돌려본 앨범은 상당히 반대되는 성향을 띄고 있었습니다. "Satisfaction & Thirst"는 무척 복고풍의 신스와 샘플, 이펙트를 사용하여 뽀샤시 효과가 더해진 8-90년대의 뮤직비디오가 연상되는 음악을 표방하고 있으며, 비트를 타는 Kid K의 랩은 무척 느긋하면서 정박적으로 마찬가지로 과거의 한국 랩을 오마주한 듯한 플로우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스타일은 "꼬락서니"를 제외하고는 전곡에서 나타나며, 일례로 "Thirsty" 같은 곡은 곡 길이가 그렇게 긴 건 아니지만 한마디에 두세 글자씩만 랩하는 터라 가사 창을 열었을 때 짧은 길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Kapital G는 친 마리화나 성향의 크루로 여러 곡에서 마리화나 얘기를 스스럼 없이 늘어놓았는데, 이번 곡도 곳곳에서 마리화나 레퍼런스를 확인할 수 있어서, 느릿한 스타일이 마리화나 흡연 후 릴랙스된 기분을 표현하고자 하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 이런 전략은 앨범의 컨셉을 바로 잡아주고 일견 재밌기도 하지만, 기대하던 Kid K의 모습과 정반대인, 나쁘게 말해 촌스럽기 때문에 이를 이해할 수 있냐 없냐에 따라 앨범에 대한 호감도가 결정될 듯합니다. 단단한 저음의 톤이나 라이밍 센스는 확인할 수 있지만, 매력 한 가지를 배제하고 만들어진 앨범이라 Kid K를 설명할 때 쉽게 포함시키거나 추천하기 어렵다는게 가장 큰 단점일 수 있겠군요.



(5) Don Mills - F.O.B. (2021.3.11)


 짧지 않은, 거기에 약간의 잡음도 있던 군복무로 인한 공백이 무색하게 Don Mills는 빠르게 다방면으로 자기 자리를 재확보, 대체가 어려운 캐릭터임을 증명하는 중입니다. 특히 음악적으로 Don Mills는 전보다 더 활발한 피쳐링 참여로 본인의 랩을 다져왔으며, 이는 본인의 새 앨범 작업의 기틀을 마련, 새 정규 앨범 "F.O.B."를 내놓게 되었습니다.


 Don Mills를 '멍청 트랩'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어차피 정식 용어가 아니니 정해진 정의도 없어 무의미한 반박이지만, 제가 생각하는 멍청 트랩은 듣는 사람 뿐만 아니라 만드는 사람도 생각이 없어지는(?) 바이브의 음악이었고, 적어도 이번 앨범에서의 Don Mills는 얼핏 가볍게 느껴지는 음악에 많은 생각이 담은 듯합니다. '서양에 이주한지 얼마 되지 않는 동양계 사람'을 다소 비하적으로 부르는 단어인 앨범 제목에 부합하게, "F.O.B."은 Don Mills가 본격적으로 VMC에 입단하여 이름을 알리기 전, 캐나다에 유학을 갔다가 오면서 보낸 무명 생활 (황마K 시절이죠)을 바탕으로 서사를 진행시킵니다. 고단했던 시절이니 다운된 바이브를 띌 수도 있겠지만 Don Mills 특유의 유쾌함은 어디 가지 않습니다. 본인의 up & down을 전부 긍정적으로 풀어낸 랩은 듣는 사람도 전염시킬 정도로 강한 에너지를 갖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매우 단단해진 랩을 듣는 재미가 있습니다. 확실히 "미래"가 나왔던 시절 저는 트랩을 이해하지 못하던 시기라 객관적인 비교는 안 되지만, "F.O.B."의 Don Mills는 여유로울 때와 빡세질 때를 적절히 배분하여 더욱 찰진 랩을 선보입니다 - "영 노래방"의 벌스 같은 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미래" 때보다 오토튠의 비중을 줄이고 랩으로만 돌직구 승부를 본 것도 마음에 드네요. Don Mills의 전매특허랄 수 있는 추임새도 과하지 않게 들어가 곡 맛을 잘 살리고 있고요. 단순히 트래퍼라고 보기엔 타는 비트의 스펙트럼이 꽤 넓은 것도 눈여겨볼 부분입니다. 군 전역 이후 한창 피쳐링으로 여기저기 참여할 때 예상치 못한 앨범에 그가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런 폭 넓은 활동이 그의 랩 스타일을 어디에나 적용 가능하게 유연화시키는 작용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요즘 트렌드에는 조금 많은 트랙 수지만 지루하지 않게 들을 수 있는 수작입니다. 솔직히, Don Mills에게 기대하던 것 이상이었습니다. 대중들에게 비춰지고 있는 모습이 어떻건 간에, "F.O.B."를 통해 그는 본인이 래퍼임을 충분하게 증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6) Mind Combined - CIRCLE (2021.3.11)


 Mind Combined는 Jinbo와 Peejay의 프로젝트 그룹으로, 2010년 앨범을 발매 후 별다른 활동이 없다가 11년이 지난 지금 갑자기 두 번째 앨범을 발매하며 컴백하였습니다. 첫 앨범 냈을 당시는 제가 한창 음악 듣는 폭이 좁아지던 시기라 제대로 접해보진 못 하여 이번 앨범으로 둘의 프로젝트를 확인해보게 되었죠.


 이번 앨범에 대한 소감은 '체험'이란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CIRCLE"은 보컬보다 사운드에 훨씬 힘을 준 앨범입니다 - 풍부한 소리와 역동적인 전개, 그리고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그리는 사운드 스케이프는 듣는 것만으로 어딘가를 탐험하는 듯한 공감각적인 느낌을 줍니다.


 특히 앨범 안에 다양한 장르가 한데 버무려져있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지식의 한계로 구체적으로 집어내긴 어렵지만, 예를 들어 "Waterfalls"는 Jamiroquai의 음악을 듣는듯 했고, "Can You Understand"는 브릿 락이 연상됩니다. 뒤를 잇는 "Interlude"는 샘플 원곡 디깅할 때나 들어볼 수 있는 소울풀한 사운드가 나오더니, "Show Me"는 몹시 현대적인 R&B로 탈바꿈하고요. 이런 다양한 스타일의 전시에서 저는 퍼레이드 같이 화려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마지막 트랙 "Purple Sky"가 한 번 더 삼바 스타일로 변주된 후 확실한 끝을 맺지 않고 들떠있는 드러밍 속에 페이드아웃되는 건 앨범이 끝나도 그 소리의 세계 속에 청자를 잡아두는 듯한 인상을 자아냈습니다. Jinbo와 Peejay의 합과 음악적 창의력을 맛보기엔 그지 없는 경험입니다.


 물론 이런 변화무쌍한 사운드를 날렵하게 타고 다니는 Jinbo의 보컬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다채로운 장르적 시험만큼이나 비트에 유연하게 맞춰 변하는 그의 보컬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자못 심각한 주제를 들고 나오면서도 군데군데 엿보이는 유쾌함도 좋았고요. 다만 솔직하게 말해서, 이번 앨범을 들으면서 제가 생각보다는 Jinbo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습니다. 당연히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좋아하는 곡도 꽤 있지만, 이따금 디테일한 처리에서 살짝 김 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 말을 하는게 되게 어처구니 없는건 알지만... 사운드의 카리스마가 너무 셌던 탓일까요?


 어쨌든 "CIRCLE"은 대단한 작품입니다. 워낙 체험적인 앨범이었기에 이 앨범만큼은 나의 몸을 소리로 둘러쌀 수 있는 빵빵한 환경에서 듣고 싶단 생각이 들더군요 - 여전히 저에게는 이어폰과 자동차 스피커 뿐이지만... 일회성으로 끝날 줄 알았던 프로젝트가 오랜만에 다시 뭉친만큼 향후 어떤 식으로 활동을 이어갈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둘이 보여준 거대한 역량만큼은 언제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7) Poem - Visitor (2021.3.11)


 Poem은 evelihood 크루의 멤버이자 idolo와 P_A1COHOL이란 팀을 꾸리고 있는 래퍼로, 전작 "5500/2"에 대해 이 시리즈에서 다룬 적도 있습니다. 전작과 본작의 9개월 텀 동안 Poem은 비트를 찍기 시작하였으며, 이번 "Visitor"는 전곡이 Poem 프로듀싱으로 되어있습니다. 그의 스타일은 evelihood에서 보여왔던 것과 중심을 공유하는 노이즈 가득한 음악입니다. 청자의 불편을 유도하는 깨진 소리가 여기저기 널부러져있으며, 이런 소란은 소리의 전방위를 다 채워 다가오기에 평소 듣던 볼륨 세팅보다는 낮춰 듣는 것이 권장됩니다.


 Poem의 랩은 이번 앨범의 경우 전달되는 것을 초점에 두지 않은 듯하지만, 역시 본인 크루에서 하던 것과 비슷한 난해하면서 씨니컬한 어조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는 evelihood 세 멤버 (idolo, 이도 더 나블라까지) 중 제일 랩을 앞으로 내세웠지만 전작 "5500/2"읩 랩은 이렇다할 감흥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이번 앨범에서 랩을 뒤로 하고 사운드의 위압감과 메세지를 주 무기로 삼은 것은 나쁘지 않은 결정 같기도 합니다. 'MISSINGNO Tape" 같은 인스트루멘털으로 보아도 (이러한 스타일 내에서) 비트 찍는 감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생각합니다.


 다만 걸리는 것은, 이렇게 소음 가득한 사운드를 만든 취지가 쉽게 와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같은 크루 멤버를 예로 들자면, idolo는 본인의 우울함을, 이도 더 나블라는 무언가를 비판하기 위해서 이런 사운드를 차용했습니다. Poem의 "Visitor"는 그게 쉽게 와닿지 않습니다. 난해한 앨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와닿지 않는게 뭐 별 일인가 싶을 수도 있습니다만, 뚜렷한 목적 없이 그저 두서 없이 늘어놓은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좀 들었습니다. 실제와 다르다면 약간은 실례인 말인 셈인데, 사실 결국 말하고자 하는 건 evelihood 내에서 노이즈를 다루는 방식이 너무 같은 스타일로 수렴된다는 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velihood는 아직 소박한 인지도를 가진 크루이지만 몇 차례 저를 놀래킨 적 있는 크루로써 기대를 갖고 있으며, 그중 아직 제일 적은 작품을 들었던 Poem이 나머지 둘과 겹치지 않는 영역에서 뭔가를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특히나 이런 실험적인 음악은 그런 고유한 표현과 줏대가 중요하니까요.



(8) kwai - WEAK:END (2021.3.12)


 "Flowering4"를 통해 조금 더 이름을 알린 래퍼 kwai의 신작입니다. 처음으로 "Flowering" 넘버링이 아닌 앨범이기도 하네요. 5곡인 데다 곡들이 길지 않아서 가벼운 앨범입니다.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던 전작과 비교해 "WEAK:END"는 조금 더 트랩 스타일의 속도감 있고 타이트한 비트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kwai의 랩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발음을 흘리면서도 지나치게 느슨하지 않게 리듬감과 운율감을 살리면서 전개됩니다. 비트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듯한 발음이 그루브 이어가는데는 상당히 좋습니다. 특히 전작보다 비트가 공격적이라 쳐지는 느낌을 더욱 덜어낼 수 있습니다.


 다만, 전작에 비해 랩이 색다른 면은 없고 안정 노선을 탔으며, 앨범 길이가 가벼운만큼 '그냥 kwai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금방 감상은 끝나버립니다. 저번에 이 랩 스타일이 생각보다 빨리 질릴 수 있다는 걱정을 했었는데, 아직 그 리스크는 유효해보입니다. 그래도 아직은 마음 편히 kwai의 실력을 즐길만한 앨범입니다. "Flowering"이 아닌 첫 앨범이란 점에서 본인에게도 어떤 새로운 시작이 될지 생각해보게 되는군요.



(9) DPR IAN - Moodswings In This Order (2021.3.12)


 DPR 크루를 가까이서 지켜봐온 사람들은 더욱 전부터 알았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게는 DPR IAN은 작년 "Zombie Pop"부터 눈에 들기 시작했으며 (뭐 어쩌다보니 C.CLOWN이 "Solo"로 활동할 때 보긴 했지만...;), 두 장의 선공개 싱글을 거쳐 첫 정규 앨범을 발매, DPR 크루의 2번 타자로 씬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고전적인 분류를 적용한다면 "Moodswings In This Order"는 흑인 음악 앨범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하나로 규정하긴 어렵지만,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모던 락으로 보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DPR LIVE와 분야가 다르다는 점에서 역시 이번에도 전곡 프로듀싱에 참여한 DPR CREAM의 능력은 놀랍습니다. DPR CREAM의 비트는 늘 풍성하고 디테일하여, 어느 쪽으로 귀를 기울여도 맞이해주는 악기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주얼에 신경을 쓰는 팀이라 그런지, 이런 디테일들은 저절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이펙트와 미장센을 연상시킵니다.


 DPR IAN은 멜로디 메이킹 능력도 좋지만 무엇보다 목소리가 보물 같습니다. 살짝 중후하지만 가성일 때는 또 다른 매력을 품은 그의 목소리와, 시적이고 간결한 수수께끼 같은 (역시 모던 락에서 많이 보는 종류) 가사는 'Moodswings'라는 주제와 맞물려 음침하고 퇴폐적이고 우울한 색깔을 그려냅니다. 개인적으로는 DPR LIVE에게서 불만이던 '지나친 악세사리'가 없이 이런 메인 보컬 라인만 갖고 곡의 분위기를 결정 지은 것이 좋았습니다. 앨범 전개가 뚜렷한 서사를 의도한 건 아닌 듯하지만, 워낙 목소리가 내뿜는 아우라가 강렬해 앨범을 하나로 단단히 묶어줍니다. 여기서 굳이 하나를 트집 잡자면, 가끔씩 DPR IAN의 욕심이 과하게 느껴질 때가 있긴 합니다 - 곡이 마무리 지어질 줄 알았는데 제2의 클라이막스를 향해 올라가는 것 같은? "Nerves"나 "Scaredy Cat" 같은 트랙이 그랬습니다 (허나 "Nerves"는 제 베스트 트랙이기도 합니다).


 힙합보다 아는게 없어서 그렇지 이런 락 앨범은 흑인 음악 듣는 사이사이 즐기는 특제 디저트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여기엔 이모 힙합을 하는 이들이 단순히 락 비트를 탈 때 갖지 못하는 깊이가 있습니다. DPR IAN의 앨범은 이번에 그런 경험을 안겨주었네요. DPR 크루가 가진 잠재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10) Skinny Brown - Berry Loves My Mood (2021.3.13)


 Skinny Brown이 Daytona의 네 번째 멤버로 합류함을 알리는 동시에 발표한 EP "Berry Loves My Mood". 김효은과의 합작 앨범으로 일차적으로 이름을 알린 후 줄기차게 활동해왔지만 솔로 앨범으로는 처음입니다 - 문득 그가 Lil Pump 카피캣 아니냐고 욕 먹던 시절이 떠오르면서 많은 시간이 지났음을 체감합니다...


 온전히 본인이 주인공이 된 앨범이란 점에 걸맞게 "Berry Loves My Mood"에는 그동안 Skinny Brown이 해왔던 노래와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 공황장애로 인한 괴로움을 중심으로 본인의 이야기가 솔직하게 담겨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그는 곡이나 Raphouse on Air 등에서 공황장애를 언급해오긴 했지만, "xannies"로 대표되는 가사 속 표현은 현재 씬에서는 기믹과 혼재되어 일종의 클리셰처럼 되버린 터라 크게 사람들의 기억에 남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런 솔직한 서사는 어느때보다 Skinny Brown의 가사에 집중하게 해주고 다른 이들과 차별화시켜주는 힘이 있습니다.


 한편, Leellamarz와 진행했던 '하이브로 라디오'에서 Skinny Brown이 특이한 것에 욕심을 내서 앨범이 늦어진다는 TOIL의 언급이 있었습니다. 만약 변화의 흔적을 찾는다면 대표적인 예는 "Angel"일 것입니다 - 두 개의 다른 비트를 섞은 점도 재밌지만 초반에 보여주는 리듬 타기와 살짝 더 낮게 깔린 음역대 같은 게 Skinny Brown에게선 새로웠습니다. 디테일한 부분으로 파고들 때 이런 노력의 흔적은 다른 곡에서도 군데군데 발견됩니다.


  다만 그럼에도 "Berry Loves My Mood"가 남다른 한국 싱잉 랩 음반으로 거듭났다고 말하기는 망설여집니다. 확실히 Skinny Brown이 만든 멜로디는 듣기 편하고 깔끔하지만, 정해진 패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용하는 코드가 제한적인 것과 더불어 리듬 패턴이 반복적이라, 음정만 따지면 처음 듣는 멜로디인데도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 느낌이 계속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호소하는 듯한 개성적인 톤이 이런걸 더 도드라지게 하는 것도 같네요. 또 밑바닥에서 올라와 성공했다는 걸 얘기할 때 끌어쓰는 미국 힙합스러운 표현의 진부함은, 위에서 말한 그의 진솔한 태도를 퇴색시키는 데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실은 Wayside Town의 음악에서 자주 보이는 부분입니다.


 Skinny Brown은 이번 앨범으로 변화를 추구했지만, 그 결과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릴 듯 합니다. 적어도 Skinny Brown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돌려세울만큼의 반전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사에 좀 더 자신을 담아낸 것은 좋았지만 그 이상으로 본인만의 것을 보고 싶습니다. Daytona의 지원이 그의 음악에 더 큰 발전을 불러오는 자양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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