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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TALK
밀렸던 감상 싹 다 하기 프로젝트 pt.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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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4 17:55:14
  밀렸던 감상 싹 다 하기 프로젝트

리뷰라기보다는 일기장에 쓸만한 글을 옮겨왔다는 느낌으로 적어보는 앨범 소감문입니다.

날씨도 추워지고 미세먼지도 많아지고... 코로나 환자는 늘고... 외출이 어려운 요즘입니다.

덕분에 녹음실 가다가 끊겼네요 흑.


대상: 

적어도 세 곡 이상의 앨범.

내가 아는 / 어디서 들어본 아티스트 + 뭔가 지나가다가 추천 받거나 들어주세요! 했던 거라든지... 그런 앨범들


주의:

음알못. 특히 사운드알못.

붐뱁충.



(1) Dbo - Wonderful Disaster 2 (2020.10.31)


 저번 앨범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아주 조용하게 나온 Dbo의 새 EP입니다. 일단 엔지니어링이 다시 Jaydubb으로 돌아와서 다시 어딘가 고장난 (...) Dbo의 랩을 들을 수 있습니다 - 근데 이제 박자는 다 맞더라고요ㅋ 그리고 여담으로, "Wonderful Disaster 2"라고 되어있는데 1은 어디에 있는지 전 못 찾았습니다...


 대략 "3" 때부터려나, 언젠가부터 Dbo의 음악은 상당히 감성적이고 차분해서 "우주" "Peacock" 같은 시절이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앨범도 같은 무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두 트랙에서 나오는 자못 심오하고 철학적인 분위기는 예전 Dbo와 완전 다른 사람이라는 걸 확인시켜주는 듯합니다. 자연스럽게 랩보다는 싱잉의 비중이 커졌는데, Dbo답게 불협화음이 상당히 많습니다 - "Myself" 같은 건 아예 이상한 이펙트를 걸어서 더더욱 효과가 배가됩니다. 이런 심각한 가사와 괴상한 멜로디의 부조화가 예전에는 웃겼는데, 점차 Dbo의 음악에 익숙해지다보니 그냥 몽환적인 요소 중 하나로 인지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거 같습니다. 


 이 무드는 꽤 여러 앨범에서 보여준 모습이라 일탈이 아닌 변화라 봐도 무방할듯한데, 사실 Dbo 특유의 불협화음과 빈약한 발성이 미리 존재하는 상태에서 이 감성에 몰입하기는 쉬운 일은 아닐 거 같습니다. 스타일이 변하면서 비트도 여백이 있고 어쿠스틱한 것을 선호하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랩을 즐기는 것처럼 즐기긴 어려울 겁니다. 이런 그의 방향 전환이 흥미로우면서도 오래 지속 가능할지 다소 우려되긴 합니다. 뭐... 그래도 Dbo 특유의 감성이 예전에 비해선 훨씬 짙게 드러나니까 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죠?



(2) J'Kyun - Things Get Ugly (2020.11.2)


 마치 오랜만에 J'Kyun의 이름으로 나온 앨범 같지만, 실은 5월에 "Re:Birthday" 10주년 앨범을 포함, 이후로 나온 것들은 전부 J'Kyun의 이름으로 발매되었습니다 (물론 쇼미더머니엔 Cox Billy가 나갔지만;). 두 캐릭터는 확실히 구분된 스타일을 보여주며, 온갖 논란과 꼬리표를 차치한다면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이는 전략입니다.


 J'Kyun이 하는 음악은 과거 "Louie.V"나 Romantic Factory 소속 당시의 대중성을 띈 음악에서 이어오는 맥락이나, "Re:Mind"를 거치면서 한 단계 성숙해진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조곤조곤한 랩과 편안하고 감성적인 비트의 케미가 꽤 좋아 이런 쪽에 알러지 반응을 보는 편이 아니라면야 호감을 사기 쉬운 음악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일상적인 요소로 자기 속마음을 끌어내는 디테일한 가사는 많은 이들에게 과소평가 받는 그의 강점이라 생각합니다 - Cox Billy 때도 씨니컬함이 살아있는 가사를 전 남몰래 좋아했답니다.


 당연히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사실 "Re:Mind" 때도 그랬는데, 편안한 음악에 지나치게 풀어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 것의 증거가 이따금 왔다갔다 하는 박자라고 생각합니다. 또 "집사의 삶"에 이르러서는 거의 나레이션급으로 변하는 톤의 높낮이나, 매력적인 멜로디를 갖고 있지만 실제론 벌스-훅 구성에 대한 고려가 부족한 단순 루핑에 불과한 비트 등은 여러 옥의 티 중 하나입니다. 이런 것들이 음악을 대충 만들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 믿고 싶습니다.


 부족한 점은 있어도 어쨌든 J'Kyun / Cox Billy의 음악은 알게 모르게 그의 연륜과 타고난 보이스 칼라가 묻어나는 범상치 않은 작품들이었습니다. 현재 이 앨범이 멜론에서 평점 1점 대를 기록하는 것은 앨범 퀄리티 문제는 아닐거라 생각해요. 이를 본인이 자초한 화라고 볼 수 있겠지만, J'Kyun으로 돌아오는 것마저 조롱으로 맞이한다면 그건 너무 슬플 거 같군요.



(3) 킹치메인 & 반고흐 - 붉은 포도밭 (2020.11.5)


 "Omega"를 발표했을 때부터 차기작으로 예고했던 "붉은 포도밭"이 발표되었습니다. 반고흐는 과거 Life of Van Gogh라는 이름으로 소소한 활동을 펼쳐왔던 래퍼 겸 프로듀서로, 본작에서 이름을 줄이고 래퍼 포지션으로 킹치메인과 콜라보하였습니다. 그의 이름 자체가 영감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앨범 제목과 곡명은 전부 고흐의 작품명 (단 "브르타뉴 여인들"은 고갱 작품)으로 되어있습니다. 때문에 뭔가 예술의 가치에 대해 논할 거라는 추측을 하기 쉬우나, "붉은 포도밭"은 짧게 줄여 '향락적인' 앨범입니다. 당장 "개양귀비밭"을 들어보세요 - 후렴부터 코카인 파티라고 신나게 외치고 있습니다. 단순히 미국 갱스터 힙합 가사를 따라간 것도 아니고 오직 여자와 마약이라는 요소만 취하여 신나게 놀아댑니다. 아마 저를 포함 대부분의 리스너가 이 부분에서 당황을 할 거 같습니다.


 킹치메인은 지난 앨범 "Omega"를 통해 새로운 스타일의 싱잉 랩을 선보였으며, 그 스타일이 이번에도 이어집니다 - 가사를 보고 있어도 딜리버리가 뚜렷하지 않은, 글자 하나하나가 압축된 듯한 오토튠 랩이죠. 한편 반고흐 역시도 상당히 오토튠을 두껍게 덧붙인 싱잉 랩을 선보입니다 - 기억 속의 Life of Van Gogh 스타일은 아닌데 하긴 시간이 많이 지나기도 했고, 킹치메인 스타일과 잘 어울리게 조절한 거 같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킹치메인이 "Omega" 이후로 원래 스타일 (혹은 적어도 "시대정신" 스타일)로 돌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이 느낌으로 이어가기로 했나보군요.


 누군가에게는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겠지만, 생각보다 뻔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기본적으로 싱잉 랩은 글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느낌 있는 멜로디 짜는데 방해이기 때문에 킹치메인의 스타일은 상당히 불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Omega"의 경우 Hanabi가 워낙 래퍼에게 그리고 얘기하고자 하는 바에 맞는 비트를 써주었기 때문에 극복이 되었지만, 이번에는 타입 비트들이 사용되면서 그런 멜로디 메이킹도 같이 단순해진 면이 있습니다. 여기에 반고흐의 경우 워낙 뭉친 듯한 로우톤을 갖고 있는데 오토튠이 더 두껍게 발라지면서 청량감이 많이 줄어서 답답하게 들리는 부분들이 생겼습니다. 가사 표현 면에서도 파티 방향으로 가다보니 하는 얘기들이 좀 클리셰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해골" "라자로의 부활"을 제외하면 대개는 그런 환락적인 파티를 노래하고 있죠 (무슨 얘기를 할 수 없는 "자화상"도 제외를 하자면...).


 그렇게 "붉은 포도밭"은 제겐 아쉬움이 많이 남는 앨범이 되었습니다. 아티스트가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 함부로 추측한 후 설레발 치다 실망하는 건 아티스트 잘못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의 이유 중 일정 부분은 무엇이 반 고흐 요소와 연관지어지는지 알 수 없는 (뭐 그냥 아티스트 이름 때문이었다면 어쩔 수 없지만;) 컨셉 때문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두 아티스트의 신선한 스타일이 신선하지 못하게 쓰여서 느껴지는 괴리감 때문이었을 거 같군요. 뭐... 그저 아직 적응이 되지 못한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 노선이 유지될 거라면, 그저 충분히 미래의 작품들을 접하지 못한 탓일까요?



(4) BEOPARD - 개와 인간 (2020.11.5)


 꽤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군요. 작년 EP "반석"으로 처음 접했는데, 그 사이 싱글 하나를 제외하곤 잠잠하다가 믹스테입의 형태로 신작이 나왔습니다. 이번에도 늘 비트를 제공하던 그의 동료 Bonzo가 전곡을 프로듀싱하였고요. 사실 전 뮤직비디오 썸네일에 보더콜리와 행복해하는 사진이 나와서 말 그대로 강아지를 주제로 한 해피 바이브의 앨범인가 했는데, 우선 그건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왜 "개와 인간"인지는 1번 트랙을 제외하면 좀 헷갈립니다).


 단도직입으로, "개와 인간"은 BEOPARD에게서 기대하던 부분들이 많이 줄어있어 아쉬움이 큰 앨범이었습니다. 이는 그의 스타일 변화가 한몫하는데, 전작까지는 하드코어 붐뱁 스타일을 보여줬다면 이번 랩은 트랩의 요소가 많이 차용되었습니다. 멈블 랩이라고 해도 될 거 같은 느슨한 발음과 반복적인 가사 및 추임새에, 완전히 이모 힙합 스타일로 만들어진 "산" 등의 곡도 좋은 예가 되겠군요. 새로운 시도 자체는 좋은데... 문제는 이 변화가 상당히 어정쩡하게 느껴진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하드코어한 요소가 깔려있는데 트랩의 요소들이 가공 없이 섞인 느낌입니다. 예를 들어 발음을 또박또박 때려박는게 나을 부분에서 흘려버리니까 이상하게 들리는데가 많이 있습니다 (좀 다른 얘기일 수 있는데 "CCTV"에서 '안 바라봐'는 왜 '안 발라봐'로 발음되는 것인지). 또, 동일어구/형식을 반복할거면 차라리 곡을 짧게 해서 임팩트를 주는게 나을텐데 여기에 벌스 3개 꽉 채워서 쓰고 훅은 트랩 방식으로 하니까 곡이 상당히 지루해집니다 ("CCTV" "스티브찰리게네스" 등). 특히 가사 내용. 전에도 좀 의식의 흐름 같은 면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무 단어나 이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것도 가사보다 사운드를 중시하는 트랩 스타일을 차용한 결과일까요? 가사를 읽으면서 듣다보면 대체 내가 왜 가사를 보고 있는가 궁금해지기도 하더군요.


 어떤 의도에서 이런 음악들이 만들어졌는지 궁금증을 많이 자아내는 앨범이었습니다. 혹은 믹스테입이기 때문에 그냥 본능에 맡겨 제작을 했던 걸까요? 그가 생각했던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하나되지 못하고 서로 겉돌면서 떠있는 것만 같습니다. 저는 기존의 BEOPARD 스타일이 더 마음에 들었지만 반드시 이 스타일로 회귀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새로운 방향으로 갈 거면 그만큼 자연스럽게 자신의 것처럼 익힌 후에 보여줬으면 좋겠네요.



(5) Greego - Street Level Vol.2 (2020.11.2)


 Greego는 DJ Qesta란 이름으로 3년 전 첫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비트메이커로써, 당시 "UnQualified"란 믹스테입을 낸 바 있죠. 이처럼 그는 비트도 찍지만, 그의 사운드클라우드를 보면 실제로는 비트를 찍은 것도 랩을 한 것도 아닌데 그의 이름으로 올라와있는 곡들이 있습니다. 이는 (지금은 비트메이커보다 더 메인에 나와있는) 그의 포지션 "Executive Producer"를 설명해주는 활동입니다. 올해 3월에 나온 믹스테입 "The Light"도 그랬으며, 이번 앨범 "Street Level Vol.2"도 그가 앨범을 총괄 제작했을 뿐, 실제 랩과 비트메이킹은 다른 사람들이 맡았습니다. 말하자면 DJ Khaled 같은 거려나요. 혹은 Greego가 컴필레이션의 브랜드 같은 거라 생각해도 될 거 같네요.


 그의 모든 작품은 철저히 고전적인 90년대 붐뱁 스타일을 띄고 있습니다. 이번에 나온 7곡도 마찬가지입니다. 앨범 제목은 2006년에 나온 한국 힙합 앨범 Keslo의 "Street Level Vol.1"을 오마쥬한 거라는데, 이것만 봐도 고전 붐뱁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죠. 참가한 비트메이커들 중엔 타입 비트를 안 파는 분들도 있던데 실제로 섭외를 하여 비트를 만든건지 궁금합니다. 뭐가 됐든 곡들은 샘플링 기반으로 비교적 단촐한 구성과 무난한 템포의 비트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붐뱁 팬들이라면 반길테고, 특히 섭외 MC들이 뻔하지 않은, 주목할만한 루키지만 아직 작업물이 많지 않던 이들인 점은 좋습니다 (이는 "The Light"도 그랬습니다). 헌데 대개의 곡들이 거의 루핑 기반의 단순한 구성을 가지고 있어서 상당히 심심한 느낌이 드는 게 많고, 래퍼의 랩을 잘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치명적입니다. 이를테면 Auvers나 Loxx Punkman은 합이 잘 안 맞았던 거 같습니다. 반면 옥가향과 Untell의 경우는 괜찮았던 거 같아요. 특히 Untell은 쇼미에서도 영어를 군데군데 섞은 스킬풀한 랩을 하는데, 저번 믹스테입도 그렇고 이렇게 진중한 한글 위주의 랩을 할 때 보면 단순히 퍼포먼스용 래퍼가 아님을 느낍니다.


 한국에서는 아직 낯선 'Executive Producer'로써 이름을 남긴 앨범이라 Greego가 한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앨범도 마냥 환영만 하기엔 살짝 부족한 느낌이 들고요. 하지만 확실한 제작 컨셉과 씬에 충분히 관심이 있지 않으면 구성할 수 없는 참여진 등은 반갑습니다. 붐뱁충으로써 간간히나마 이런 프로젝트를 계속 볼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6) 이도 더 나블라 - 바이올렛 호라이즌 (2020.11.9)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도 더 나블라는 작년부터 제가 관심 깊게 지켜보고 있는 앱스트랙트 힙합 아티스트입니다. "중독"을 계기로 처음 접한 이 아티스트는, 이후로 프로젝트 팀 "흠"과 올해 2월에 나온 첫 EP를 통해 음악을 계속 하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커리어 초반이라 그런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의 갈피를 못 잡는 느낌이 계속 있어왔습니다.


 "중독"은 몹시 전위적인 앨범이었고, 그 후 나온 두 앨범은 좀 더 랩적인 것을 추구했다면, "바이올렛 호라이즌"은 다시 전위적으로 방향을 틀되 비교적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합니다. 스토리는 '기계'로 표현되는 무기력한 화자가 자살을 시도하고, 실패 후 구조 받으면서 역설적으로 삶의 의지를 되찾게 되는 줄거리로, 이를 또 하나의 상징으로 사용하여 세상과 예술에 적용한 "Plastic Arts"와 "본그림자 선언"을 제외하면 트랙 순으로 줄거리가 충실하게 전개됩니다. "기계가 물에 닿으면 불을 품은 인간이 된다"는 앨범 소개글은 이를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음악적 방향에 따라 랩의 비중은 많이 줄었고, 대부분의 무드를 비트의 변주와 편곡, 이펙트가 창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도 더 나블라의 앨범이지만, 같은 크루의 프로듀서이자 이번 앨범 전곡을 쓴 Idolo의 공도 못지 않게 컸다고 할 것입니다. 사실 전작에 비해 이러한 소리의 효과가 매우 크기 때문에, 저는 가사를 보며 듣기보다는 가사를 미리 읽고 음악으로만 듣는 감상이 더 어울릴 거 같습니다.


 이는 역으로 말해, 이도 더 나블라가 앨범의 주인공임에도 그가 의도한 효과를 끌어냄에 있어 역할이 적었단 뜻이기도 합니다. 말했다시피 이 앨범은 랩의 비중이 적고, 의도적으로 플로우를 단순화시켰으며, 말투 역시 평서문으로 적힌 게 많아 랩보다 나레이션이란 느낌이 많이 듭니다. 여기에 화법이 직설적이다보니, 전위 예술이 으레 주는 '미지의 공백'이 크게 줄면서 투박하고 어색한 느낌이 생겨버린 것 같습니다. 비유하자면 상당히 심오한 분위기를 잡아놓고 동화 구연을 하는 것 같달까요. 개인적인 취향으로 문학에서의 '낯설게 하기'를 꽤 좋아하는 편입니다. 이번 앨범은 낯설게 하기가 절반만 되어있는 거 같아요. 사운드 면에서도 지나치게 노이즈와 이지 리스닝 두 가지를 오가는 것만으로 단순하게 표현한 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이전보다는 가는 길이 명확해져가는 것도 같습니다. 저번 앨범이 단순 어그로라는 비난을 받으며 필요 이상으로 비하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는데, 음악적 스타일 자체는 그렇게 틀리진 않았던 거 같아서 좀 더 가지고 있는 걸 이리저리 조합해보는 것도 좋을 거 같습니다. 물론 처음 "중독"으로 접한 그가 보여줬던 과감함은 항상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



(7) Authentic - CLICHE (2020.11.9)


 전작 "'s house"에 이어 8개월 만에 나온 그의 두 번째 정규 앨범입니다. 몰랐는데 전작과 본작이 "일상" 시리즈라는군요. 형식은 전작과 비슷합니다. Owell Mood가 게스트 멤버로 감미로운 노래를 들려줬다면, 이번 "CLICHE"는 slchld가 참여했습니다. 여기에 다른 피쳐링진이 조금 더 추가된게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겠네요.


 전작을 통해 Authentic이 보여줬던 포근하고 편안한 분위기의 어쿠스틱 기타와 slchld의 목소리가 합을 잘 이루고 있으며, 그런 분위기는 가사나 믹싱 등 음악 면면히 일관되게 드러납니다. slchld의 목소리가 Owell Mood보다 더 몽롱한 느낌이 들어서도 그런 거 같아요. 그저 사소한 얘기로, 래퍼 피쳐링은 전부 너무 뻔한 방식으로 소비되고 끝난 느낌이 있었습니다. 워낙 이런 MR에서의 랩이 다양하게 나올 순 없긴 하지만... 그리고 마지막 트랙 "Homebody"는 slchld가 참여 안 했단 점이나 "Thanks to" 후에 나온다는 점이나, 살짝 더 튀는 분위기인게 아마 보너스 트랙으로 의도한 거 같네요.


  분위기가 전작과 거의 같기 때문에, 전작을 기분 좋게 들었던 사람이라면 "CLICHE"를 좀 더 행복하게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Legit Goons 소속 프로듀서가 낸 힙합 앨범'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버리고 듣는게 좀 더 자연스러운 감상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소파에 축 늘어져서 듣는 얼터너티브 R&B를 찾는 분께 추천드립니다.



(8) Mild Beats - 화면조정 (2020.11.11)


 한국 힙합 씬에서 비트메이커가 네 번째 정규 앨범을 발표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그 사실만으로 Mild Beats의 씬 내의 위치와 존재감을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더욱이 여전히 정체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야말로 OG라는 말에 부족하지 않은 인물이라 할 수 있겠죠.


 앨범 소개글에서부터 "화면조정"은 지금까지의 그의 앨범과는 결이 다를 것이라 예고합니다. 간단하게 살펴봐도 피쳐링진의 비중이 차이가 납니다. 이때까지 여러 래퍼들을 초빙하여 컴필레이션 형태로 만들었던 앨범과 달리 이번 앨범의 래퍼 피쳐링진은 세 명 뿐이며, 인스트루멘탈의 비중이 훨씬 많죠. "연우"나 Unspoken 앨범이 있긴 했지만, 인스트루멘탈 위주로 활동하던 Mild Beats는 아니었던만큼 낯선 모습입니다.


 낯선 모습은 직접 음악을 틀어보면 다시 나타납니다. Big Deal Records 시절부터 유서 깊게 이어오던 하드코어 붐뱁 스타일에 반해, 이번 트랙들에 사용된 복고풍의 신디사이저는 마치 소울 펑크 계열 음악을 듣는듯한 느낌이 듭니다. 완전하게 방향을 바꾸진 않았고, 묵직한 베이스와 보컬 샘플 컷이 은근하게 그의 옛 스타일의 냄새를 풍기면서, 과거와 현재의 적절한 조화를 이뤄냅니다. 뭐가 됐든 예전의 포스 가득한 둔탁한 음악과는 꽤나 거리가 있죠.


 제목인 "화면조정"이 이런 새로운 스타일에 자신을 조정하는 과정을 비유하는 것이라면, 왠지 후반부로 갈 수록 자신의 원래 스타일의 영향이 더 크게 드러난다고 느꼈습니다. 오랜 파트너 Deepflow와 함께 한 곡 제목이 "Habit"인 것도 꽤 의미심장한 듯합니다. 실제로 이 곡은 앨범에서 제일 하드코어한 트랙 중 하나입니다. 여담으로, Easymind의 원래 스타일을 생각하면 Mild Beats랑 합이 잘 안 맞을 거 같은데 여기서의 랩이 Easymind 앨범보다 좋게 들렸던 거 같아요 - 생각해보니 제가 Easymind에 처음 관심을 가진 것도 Mild Beats 3집이군요.


 늘 써먹는 핑계이지만 제가 막귀인 관계로 이런 감상이 어디까지 말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고 힘에 부치는군요. Mild Beats의 새 앨범은 과거 앨범을 생각했던 사람들에겐 실망스러울지 모르겠습니다. 여튼 기대하던 맛과는 거리가 좀 있거든요. 하지만 한편으로 Mild Beats의 기존 앨범은 지나치게 고전적인 공식을 따르면서 단조로운 루핑으로 일관하는 느낌도 있었던 바, 변화 방향이 결코 부정적이진 않다 생각합니다. 처음에 말했듯, OG로써 정체되지 않으려는 노력의 흔적이란 면에선 아낌 없는 리스펙을 보내고 싶고요. 본인의 커리어에 나타난 새로운 이정표에서부터 어떤 모습으로 나아갈지 지켜보는 것이 꽤 재밌을 듯합니다.



(9) TOMSSON - NON-FICTION (2020.11.12)


 "NON-FICTION"은 TOMSSON의 새 정규 앨범이자 2017년부터 이어진 'FICTION' 3부작의 마지막을 찍는 앨범입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15곡이라는 요즘 한국 힙합씬에선 흔치 않은 규모를 가지고 있죠. 이때까지의 작업물들을 들어본 보통 리스너들은 TOMSSON을 일반적인 '붐뱁 래퍼' 중 하나로 분류하곤 할 것입니다. 


 그런데 "NON-FICTION"은 뭔가 많이 다릅니다. 일단 전자음의 비중이 상당히 큽니다. 트랩 느낌, 더 나아가 EDM이나 덥스텝 같은 곡들도 적지 않습니다. "TAKE OFF"나 "MORSE CODE", "UNMASK"는 아예 곡의 형식부터가 새로운 시도로 볼 수 있을 거고요. 피쳐링진도 같이 할 거라고 생각 못 했던 viceversa, Queen WASABII, $atsuki 등이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장르를 받아들이면서도 TOMSSON의 기본 뿌리가 되는 건조하면서 타이트한 랩은 그대로 유지되며, 거꾸로 피쳐링진들의 벌스를 이 색깔에 어울리게 조율하였습니다 (특히 Queen WASABII 이런 랩할 수 있는 줄 몰랐네요).


 가사적으로도 차이가 있습니다. 주로 자신의 인생에 집중했던 전작들과 달리 이 앨범은 자신이 처한 환경, 힙합씬에 시선이 돌아가있고, 좀 더 공격적인 어조로 이뤄져있습니다. 이는 날카롭게 때려대는 전자음과 꽤 어울리는 조합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특히 공격적인 전반부), 그래도 어느 정도 앨범 진행이 되면서 분위기를 전환시켜 변화를 주긴 합니다.


 만약 그런 반복성이 느껴진다면 이때까지와 마찬가지로 앨범의 큰 규모를 충분히 몰입도 있게 가져갈 수 있는가의 문제를 생각해봐야 할텐데요. "PULP FICTION" "META FICTION"은 비슷한 느낌 안에서 돌면서 단조로웠다면 "NON-FICTION"은 너무 번쩍번쩍쩍하여 피로감을 유발하는게 문제입니다. 그래도 뒤로 가면서 분위기가 전환되고, 여러 신선한 피쳐링진들로 다양한 벌스를 듣는 재미가 있으며, "TAKE OFF" 같은 숨고르기용 트랙도 배치되어있어서 문제가 엄청 크진 않다 생각합니다.


 자신의 커리어에 중심축을 이루는 트릴로지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하는 과감성은 인정해야할 부분입니다. 말마따나 앞선 두 작품과는 반대편에 있는 앨범이죠 - 뭐 전작은 픽션이고 본작은 논픽션이니 원래가 반대이긴 하네요ㅎ 그렇게 바뀐 색깔은, 비록 TOMSSON 딴에는 노력하긴 했어도, 너무 날카로워서 누구나 좋아할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그래도 이때까지 TOMSSON의 작품에 언제나 따라오던 '무난함'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타파했다는 데에 개인적으로 점수를 주고 싶군요... 이걸 이성적으로는 아는데 사실 본능적으로는 15곡의 볼륨으로 듣기엔 아직 좀 부담이 있네요ㅎ



(10) Bryn - SILKMOTH (2020.11.13)


 'MOTH'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SILKMOTH"가 발표되었습니다. 최근 인스타 라이브 방송에서 Bryn은 "SILKMOTH"을 "가오가 온 몸을 지배한 상태에서 만든 앨범"이라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그 말대로 "SILKMOTH"는 다양한 모습으로 Bryn의 스웩을 경험할 수 있는 앨범입니다. 말랑한 노래로 초점이 맞춰졌던 "VELVETMOTH"와는 스펙트럼의 넓이부터 다른 느낌입니다.


 들으면서 Bryn이 참 천 가지 얼굴을 가진 아티스트구나 싶었습니다. 유튜브에서 보는 말빨 좋은 소녀의 모습과 "VELVETMOTH"의 모습은 어느 정도 연결이 되었다면, "SILKMOTH"는 훨씬 멀리까지 갔습니다. 일찍이 Bryn은 이 앨범에서 과거 랩을 그리워하는 이들을 위해 랩도 좀 시도해보았다고 했는데, "Killah B"처럼 직선적인 랩과는 여러 가지 장식이 덧붙여져있습니다. 같은 랩이라도 트랙마다 느낌이 다르며, 같은 스웩이라도 다양한 색깔입니다. 비슷한 얘기를 하지만, 웅장한 단체곡 "Veteran"부터 감미로운 곡 "cop"까지 어떤 옷을 입혀도 Bryn화시키고 메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미 전작에서 확인된 멜로디 메이킹 능력과 중독적인 훅 메이킹은 덤입니다.


 일등 공신 중 하나로 LnB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트랙의 주제마다 심플하게, 또는 풍부하게 레이어의 두께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매력적이면서도 독특한 비트를 뽑아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양하게 섭외된 피쳐링진들도 저마다의 색을 잘 더해주었고요.


 "SILKMOTH"는 본인이 생각한 컨셉을 EP라는 형태와 크기에 맞게 최적의 밀도와 내용물을 담아낸 앨범이며, Bryn이 과거에 비해 얼마나 성숙하고 발전하였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한 가지 맘에 안 드는게 있다면, '사운드에 집중하길 바라서' 벌스 가사를 등재 안 한 일부 곡들. 아예 내용 없이 가사 쓰는 MC가 아닌 이상 이런 건 개인적으로 안 좋아합니다; 때론 가사 들으려고 사운드에 더 집중 안 하게 될 때가 있... 그래도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앨범이었습니다. 다음 "MOTH"가 어떤 식일지 예상이 안 되면서 기대가 무척 되는군요.

  밀렸던 감상 싹 다 하기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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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0-11-24 21:00:37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WR
2020-11-24 21:18:41

(즐거운 이모티콘)

2020-11-25 21:5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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