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리뷰] 에픽하이 LOST MAP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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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8-08-03 20:01:15


 에픽하이의 콘서트는 말 그대로 다채롭습니다. 매 공연마다 색다른 컨셉으로 관객들을 즐겁게 하고 이제는 하다하다 (한 달 동안이지만) 멤버의 이름마저 강제개명시켜버립니다. 에픽하이는 나아가 콘서트장을 찾아오는 팬들을 위해 조금 더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야광봉을 만들려 했지만 도저히 못 만들 것 같아 선택한 대안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콘서트장을 방문하는 팬들을 위해 특별 제작한 앨범 
[Lost map #002]과 매거진 [OK GOOD]입니다.

 시리즈의 이전작이라고 할 수 있는 
[Lost map #001](2009)은 이전에 발표한 싱글들의 데모곡으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콘서트장에서 특정 굿즈를 사면 끼워주거나 무료로 배포하는 음반이었기에 정말로 '보너스'의 성격이 강해서 앨범 자체의 완성도에 얽매일 필요 없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001의 정식적 후속작인 [Lost map #002] 역시 이러한 점으로 말미암아 구성이나 형식미에 힘을 크게 쏟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두 작품은 전혀 다른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Lost map #002]는 엄연히 '정식으로 판매'되는 굿즈의 일환이고 제작 목적 자체가 '팬들을 위한 앨범'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수준은 담보해야 했습니다.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Lost map 
#002]은 완전한 신곡들로만 이뤄져 있으며 전작과 비교했을 때 구성적 측면에서 처음-시작-끝의 형태가 어느 정도 잡힌 작품입니다. 매거진 타이틀과도 같은 여는 노래 'OK GOOD'으로 시작해 멤버들의 솔로곡을 하나씩 선보이고, 뒤이어 윤하의 피아노 선율이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시작하는 트랙으로 앨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제시한 후 각 멤버들의 곡으로 감정선을 세세하게 나누고 마지막 트랙의 인스트루멘털로 풀어헤친 이야기들을 마무리하는 형식, 전형적인 구성이지만 작품을 듣는 청자가 짧은 한 편의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을 내는 데는 충분합니다. 이렇게 전형적인 구성으로 이뤄진 만큼 작품의 수록곡들은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새로울 것이 없을 수 있습니다. 모든 곡들이 우리가 에픽하이의 작품에서 접할 수 있던 무드입니다. 하지만 [Lost map #002]가 근래의 작품들과 명확히 차이가 나는 지점은 바로 '감정선의 응축'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에픽하이가 선보인 근래의 정규작들은 비장미 넘치는 서막으로 시작해 범대중적으로 호응을 끌 법한 리드 싱글, 메인스트림 급의 아티스트들과 협업한 스웨그 가득한 단체곡을 선보이며  동시에 그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멜랑꼴리한 감정을 담아내려 합니다. 말 그대로 한 장의 앨범으로 에픽하이가 어떤 그룹인지, 혹은 얼마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소화할 수 있는 그룹인지를 보여주려 애쓰는 것 같습니다. [Lost map 
#002]는 이러한 모습에서 벗어난 듯, 그들이 표현할 수 있는 몇몇의 감정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갑니다.

 주변의 소란을 등지고 멀리 떠나는 모습을 표현한 오프닝 'OK GOOD'은 세 명의 멤버가 모두 전면에 나선 유일한 트랙입니다. 무엇보다 타블로와 미쓰라가 벌스를 주고받는 중간중간과 후반부에는 투컷의 스크래칭이 전면적으로 곡의 선두에 나서서 세 명의 뮤지션들이 역할의 치우침 없이 제 역할을 해낸 듯 보입니다.

 뒤이어 재생되는 타블로의 'wonderland'는 2018년 나온 한국힙합 싱글 중에서 손꼽힐 정도로 빼어납니다. 자연이 파괴되고 개인의 자유가 속박된 현대사회의 기묘한 면모를 원더랜드에 빗대어 표현한 이 곡은 정규 9집 [WE'VE DONE SOMETHING WONDERFUL]의 skit인 "Tape 2002年 7月 28日"의 초반부에서 약간이나마 맛볼 수 있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초반의 무드가 유지되었더라면 평범한 퀄리티의 곡으로 남았겠지만, 약 20초 구간부터 변주가 가해지며 급변하는 분위기 속에 타블로는 성토하듯 랩을 뱉어내며 분위기를 한 층 고조시켜나갑니다. 이윽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점차 냉소적으로 변해가는 듯하다 신에게 구원을 바라는 결말은 어딘가 씁쓸한 맛을 자아냅니다. 타블로만이 온전히 소화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컨셔스 랩이 탄생한 순간입니다.

 미쓰라의 솔로곡 'HIGHRISE'는  잃을 것이 없을 정도로 팍팍했지만 마냥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현재 손에 쥔 것들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을 자조합니다. 벌스 자체가 짧기도 하지만 그의 랩핑은 금세 곡을 향한 집중력을 흩트려놓습니다. 분명 더 빼어난 랩을 보여줄 수 있음에도 곡의 프로듀싱과 주제에 발맞추기 위해 힘을 뺀 건지 어느 때보다 단조로운 퍼포먼스가 못내 아쉽습니다. 투컷은 'ARBORETUM'에서 MYK의 목소리를 빌려 변화 속에 담긴 복잡한 감정들을 다양한 은유를 통해 전달합니다. 투컷의 솔로곡이기에 피아노 리프를 위시한 프로듀싱이 더 돋보일 법 하지만 오히려 곡의 포커싱은 MYK의 미려한 랩핑과 보컬에 집중되는 전도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이윽고 연주되는, 9집의 리드 싱글 '연애소설'을 피아노로 어레인지한 윤하의 'Love story'까지 다 듣고 나면 기분 좋은 여운이 남음과 동시에 앞선 눈에 밟혔던 부분들이 점차 떠오릅니다.

 이렇듯 좋은 면모와 아쉬운 면모가 번갈아 나타나지만 결과적으로 [Lost map 
#002]는 꽤 잘빠진 콘셉트 앨범이 되었습니다. 마치 사람들이 막연히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에픽하이의 음악적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 듯 합니다. 서정적인 분위기 아래 모든 것에 체념한 듯 보이지만 그 안에 숨겨진 변화에 대한 갈망을 곳곳에서 풀어내며 복잡다양한 테이스트를 선사하는 모습. 우리가 에픽하이에게서 느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감정 중 하나가 아닐까요.

 항상 진중하거나 차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끔은 [99]처럼 뜨악할 정도로 분위기를 급반전시키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Lost map #002]는 정말 오랜만에 에픽하이, 그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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