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H1GHR MUSIC (하이어 뮤직) - RED TAPE / BLUE T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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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1 16:39:09

 

 

본토에 비해 국내 힙합 레이블들은 개성이 뚜렷합니다. 단순히 음반 제작사를 넘어 하나의 집단이자 단체라는 이미지가 큽니다. 완전히 다른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그저 회사만 같은 것이 아닌, 나름의 공통 분모를 가진 사람들이 뭉치서 시너지를 발휘하는 것이 국내 레이블 생태계의 흐름입니다.

 

이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평가가 갈립니다만 확실한 건 이런 문화 속에서 컴필레이션 앨범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해졌습니다. 한국 힙합의 역사에서 컴필레이션 앨범은 레이블의 색채를 보여주는 일종의 명함입니다. 일리네어 레코즈의 11:11, 저스트 뮤직의 파급효과, 하이라이트 레코즈의 HI-LIFE 등등 한국힙합 역사에서 컴필레이션은 마케팅에 있어 팬들에게 출사표이자 소개를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H1GHR MUSIC의 컴필레이션은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상당히 상업적인 노선을 택했던 레이블이지만 이번에는 소위 말하는 장르적인 특성에 충실한 RED TAPE, 그리고 기존의 노선을 담아낸 BLUE TAPE으로 나눠서 발매했습니다. BLUE TAPE로 기존의 팬층을 만족시킴과 동시에 RED TAPE로 회의감을 품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증명이자 팬층 확대를 노린 것으로 보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전략은 유효했습니다. 더블 앨범이 아닌 더블 앨범이지만 둘 중 하나라도 완성도가 떨어지면 오히려 반감이 되었을 전략을 뛰어난 음악성으로 성공시키기 때문입니다. 두 앨범 모두 추구하는 방향성을 각각의 방식으로 잘 수행합니다.

 

먼저 발매된 RED TAPE부터 살펴보면 기존의 H1GHR MUSIC 산하에 나온 작업물에 비해 공격적인 곡들의 다수 수록되어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올해 발매된 pH-1 The Worst 믹스테잎이나 박재범의 WORLDWIDE와 결이 비슷한데 RED TAPE는 그보다도 더 강력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첫 트랙인 H1GHR부터 묵시록적인 장엄함을 뽐내는 비트와 멤버를 각각 소개하는 박재범의 벌스와 어우러지면서 거대한 대서사시를 시작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Golden의 고무적인 보컬도 한껏 멋들어집니다.

 

RED TAPE의 나머지 트랙은 인트로의 장엄함보다는 날이 서있는 거친 질감의 비트들을 주로 활용합니다. 하지만 질감이 거칠다는 면만 같지 상당히 다양한 사운드를 구사합니다. Sik-k의 솔로 트랙인 Melanin Handsome의 인더스트리얼한 트랩과 Closed Case의 서부 힙합을 대표하는 갱스터 사운드 등등 RED TAPE은 뻔한 음악과는 거리가 멉니다.

 

특히 The Purge의 강렬한 록 사운드, Check My Bio의 독특한 보컬 샘플과 UK 그라임 영향이 짙은 비트, ‘똑딱 Freestyle’에서 소울 샘플과 트랩비트가 번갈아 치고 들어오는 곡 구성은 감탄이 나왔습니다. 트랜스 음악의 영향을 받은듯한 No Rush도 강렬한 베이스와 신스가 어우러져 저절로 목이 끄덕여지는 곡이었습니다.

 

 

RED TAPE은 참여한 래퍼들이 이렇게 화려한 소리와 수시로 변주가 들어오는 비트들에 에너지를 맞출 수 있는지가 관건인 앨범이었습니다.

 

전반적으로 래퍼들이 작정하고 달려들었다는 인상이 큽니다. 멤버 전원 비트들에 압도되기보다는 촘촘한 플로우를 칼 같이 예리한 박자감각으로 소화하면서 곡의 분위기를 배가시킵니다. 기존에 멜로디컬한 면을 강조한 참여진도 이번만큼은 누구보다 랩을 잘해버리겠다는 마음으로 임한 것 같습니다. pH-1은 차분하면서도 유연한 플로우를 구사하고 Sik-k는 여유 있는 평소와 다르게 박자를 쪼개면서 벌스를 접근하는데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Woodie Gochild는 다양한 톤과 박자 설계로 평범한 오토튠 양산형 래퍼의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합니다.

 

또 나이가 어린 멤버들의 역량이 기대 이상으로 탄탄했습니다. The Purge에서 톤을 바꿔가며 랩하는 빅나티나 앨범 전반적으로 시종일관 라임 빼곡하게 배치된 김하온의 벌스들은 RED TAPE 최고의 감상 포인트 중 하나입니다. 최근에 기용된 TRADE L이라는 분 역시 위 두 명만큼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크게 방해되지 않고 속도감 있으면서도 휘청거리지 않는 안정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줬습니다.

 

RED TAPE의 문제는 상투적인 곡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4evaTeam의 공간감 있는 비트나 World Domination Telefono Remix의 건반 진행은 나름 멋있었지만 훅이나 벌스들이 비교적 평범했습니다. 물론 World Domination의 김하온의 벌스와 같이 몇몇 건질 벌스는 있었지만 곡 전체로는 매력이 없었습니다. 래퍼들의 역량은 나름 출중하게 들어나지만 더 과감한 다른 곡들과 비교되어 상대적으로 초라해보였습니다.

 

반면에 How We Rock도착은 워낙 비트가 독특해서 일반적인 접근법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How We Rock의 박재범의 훅과 화음도 멋있었고 때창하는 아웃트로나 중간에 나오는 환호소리 등 재밌는 장치도 많았습니다. ‘도착은 멤버 전원이 뛰어난 벌스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트립합의 싸이키델릭함이 느껴지는 기괴한 비트가 워낙 기억에 남습니다.

 

 

피쳐링한 아티스트들도 본분을 다했습니다. 다소 평범했던 Dance Like Jay Park Remix에서 Ted Park은 특별할 것은 없지만 충분히 여유 있게 들렸고, Check My Bio에서 Ourealgoat는 가히 RED TAPE의 씬스틸러라 할 수 있는 퍼포먼스를 보여줍니다. 어두운 그라임 비트, Ourealgoat의 심연에서 기어 나온듯한 톤과 토해내는듯한 플로우는 환상적인 조합이었습니다.

 

RED TAPE이 정면 돌파하는 화려한 퍼포먼스로 승부를 본다면 BLUE TAPE은 익숙함과 편안함으로 청자를 끌어드립니다.

 

BLUE TAPE RED TAPE과 비교했을 때 과감한 실험보다는 비슷한 색깔의 곡들로 더 일관성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려고 합니다. 곡마다 조금씩 차별점을 두지만 대부분 적당한 템포의 펑크와 따뜻한 재즈 요소를 이용하는 프로덕션을 구사하고 RED TAPE보다 보컬의 비중이 훨씬 큽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BLUE TAPE의 프로덕션이 뻔하지는 않습니다. Selfish는 드림팝이 연상되는 공간감 있는 기타리프와 Golden의 환상적인 알앤비 창법의 이색적인 조합을 보여주고, 빅나티의 솔로 트랙 잠깐만은 뼈대만 있는 어쿠스틱 멜로디로 시작한 곡이 악기가 점점 쌓이는 쾌감을 담아냅니다. Afternoon의 마이애미 베이스를 탑재한 복고풍의 비트, The Neptunes의 비트가 생각나는 Gotta Go의 펑키함, 그리고 End of the Night의 라틴 리듬의 건반까지 재밌는 요소가 많습니다.

 

 

소재도 RED TAPE과 완전히 다릅니다. 모든 곡이 그렇지만 않지만 주로 사랑과 관련된 여러 감정과 상황을 그려내려고 합니다. 전 애인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는 Last Song,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아닌 척 연기해야 하는 상황을 그리는 Oscar, 두 명을 동시에 연모하면서도 상대방에게 알아서 감당하라는 꽤 도발적인 이야기를 하는 Selfish 등등 소재 면에서 사랑이라는 개념을 꽤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합니다. 이런 다양한 내러티브가 BLUE TAPE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 중 하나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 이외에도 앨범의 포문을 열며 성공의 기쁨을 담은 Champagne Diet, 지친 이들에 대한 위로를 담은 수고했어와 앨범을 마무리하는 고무적이고 아름다운 건반을 주축으로 걸어온 길을 자축하는 Toast 등등 모두 뛰어난 퍼포먼스와 설계를 보여줍니다.

 

참여한 래퍼들도 이런 곡들이 더 편한 인상입니다. RED TAPE은 분명 화려했지만 플로우 설계 등을 위해 일관적인 서사를 지닌 가사를 희생시킨 듯했습니다. 반면에 BLUE TAPE은 앞서 언급한 테마 있는 곡들에서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게 주제를 모두 지켜냅니다. 오히려 박자적인 고민보다는 가사의 완성도와 어떤 음으로 싱잉과 랩을 혼합해야 할지 고민한 흔적이 많습니다. 워낙 TRADE L을 제외한 멤버 모두 이 분야에서는 기본기가 탄탄한 모습을 지금까지 보여줬고 BLUE TAPE도 예외가 아닙니다.

 

덕에 지루하고 성의 없고 기억에는 안 남고 듣기에만 편한 슬로우 잼이 없습니다. 상당히 디테일이 뛰어난 웰 메이드 팝 랩 트랙들이 완성됩니다. 상업적 공식을 따르지만 결코 신파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물론 BLUE TAPE도 감상에 방해되는 곡들이 꽤 존재합니다. 역설적이게도 RED TAPE에서 빛났던 Sik-K는 특기를 더 살릴법한 BLUE TAPE에서 살짝 휘청거립니다. ‘Me&Bae’는 나름 준수한 여름 노래였지만 ㄱ에서부터 0에서부터의 훅은 박자를 살짝 저는 느낌이 날 정도로 어색했습니다. RSVP Remix도 원곡의 훅을 그대로 가져오지만 원곡 자체의 훅이 그닥 특출나지 않아 환기의 역할을 못합니다. Gotta Go의 매끄러운 플로우와 훅이 유일하게 좋게 들렸습니다.

 

Phe REDSCha Cha MaloneSwing My Way도 실망스러웠습니다. 나름 괜찮은 비트지만 클리셰의 전형을 보여준 트랙입니다. 피아노 변주가 있어도 멜로디는 안 바뀌고 가사도 지극히 초보적이었습니다. 다른 트랙들과 좀 민망하다 싶을 정도로 비교됐습니다.

 

이번 H1GHR MUSIC의 컴필레이션에서 얻어간 점은 각 멤버의 뛰어난 역량입니다. 멤버 전원 완전히 상반되는 두 가지의 음악을 모두 소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 앨범입니다. 랩이면 랩, 노래면 노래, 퍼포먼스에 있어서 모두 흔히 말하는 능력자임을 증명합니다. RED TAPE은 기술자로서의 면모가 보였고 BLUE TAPE에서는 송 라이터로서의 역량이 돋보이는 결과물입니다.

 

거대한 서사는 없지만 애당초 컴필레이션에서는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곡들, 약간의 일관성, 그리고 지루하지 않는 퍼포먼스를 바랐습니다. 완벽하지 않지만 하나의 이벤트로써 H1GHR MUSIC의 컴필레이션은 충분히 만족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Best Tracks:

RED TAPE: H1GHR, How We Rock, 뚝딱 Freestyle, The Purge, No Rush, Check My Bio, 도착

BLUE TAPE: 잠깐만, 수고했어, Oscar, Afternoon, End of the Night, Gotta Go, Toast

 

Worst Track:

RED TAPE: 4eva

BLUE TAPE: Swing My Way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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