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E SENS - The Anecd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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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8-27 22:39:40

 

5년이 채 되지 않은 앨범을 보고 고전이라 하는 것은 섣부를 수도 있습니다. 대중 음악사에 있어 추앙 받는 앨범들은 대부분 15, 적어도 10년이 되어야 가치를 인정받고 다시 발매됩니다. 이 앨범을 벌써부터 고전이라 칭하게 된다면 일종의 위험을 감수하는 겁니다. 리뷰어를 비호감으로 만드는데 설레발만한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The Anecdote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는 앨범입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위대한 앨범입니다.

 

힙합이라는 장르와 문화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반드시 질문자를 실망시킬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그나마 있는 대답마저 모두 다릅니다. 답변이 불가능한 질문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우리가 힙합이라고 생각하는 음악은 나름대로 공통 분모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본토라고 칭하는 미국의 경우 더 확고합니다.

 

그 공통 분모는 음악에서 다뤄지는 소재에 있습니다. 가장 컨셔스한 랩부터 가장 대중적인 음악까지 힙합에서는 반드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가 바로 총기와 약물입니다.

 

마약이 좋다고 하는 사람부터 마약을 하지 말자는 사람, 총기로 적을 죽이겠다는 이야기부터 총기로 인한 비극을 줄이자는 메시지까지 어떤 식으로든 이 두 소재를 벗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중점이 아니라면 부가적인 장치로라도 다뤄집니다. 굳이 말하자면 저 두 가지만큼 다뤄지는 게 성과 돈에 대한 랩 정도가 있을 텐데, 그마저 약물과 총기로 획득했다는 서사가 즐비합니다.

 

, 힙합은 국가별로 특수한 상황과 문화에 따라 크게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마약과 총기가 일상인 미국, 특히 흑인 빈민가에서 발생한 문화가 총기와 약물을 중점적 소재로 다뤘다는 점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강력한 정체성이자 문화의 중심이 잡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글의 서두에 있는 질문에 명확하게 답할 수 없고, 많은 오해를 발생시키기도 하지만 힙합이라 하면 어렴풋이 그려지는 공통적인 인상은 이 두 소재의 산물입니다.

 

이런 정체성이 NasIllmatic, Dr. DreThe Chronic, OutKastSouthernplayalisticadillacmuzik과 같이 지역의 특수성을 기반으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끈 명반들이 만들어진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삶과 자신의 출신 지역을 연동시켜 함께 담아낸 기록으로서의 역할을 한 앨범들입니다.

 

그렇다면 한국힙합에서 본토의 마약과 총기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만한데, 전 모르겠습니다. 마약과 총기는 일상이 아니고, 성에 대한 인식은 본토만큼 개방적이지 않고, 돈에 대한 이야기를 대놓고 다루기 시작한 것도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특수성을 담아낸 앨범이 무엇이 있으며 그 특수성이 과연 무엇이고, 한국인으로서 공감이 가는 내용인지를 따져보면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The Anecdote는 이 원론적인 질문에 대해 한국힙합이 지금까지 제시해온 답변 중 가장 정답에 근접한 앨범입니다.

 

이 앨범의 주인공은 씬을 먹어버리겠다는 래퍼가 아닙니다. 어른들의 위선에 지친 문제아, 세상에 치여 분노하는 염세적인 청년, 그리고 아버지를 잃고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는 아들의 앨범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담기는 과정에서 한국의 다양한 모습들이 그려지고 그 맥락 안에서 힙합이 스토리의 소재로서 구실을 합니다.

 

앨범의 시작인 주사위부터 알 수 있습니다. 어렸을 적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던 시절을 회상하는데, 자전적인 앨범에 이보다 걸맞은 시작은 없었을 겁니다. 주위에 있는 친구들에 비해 뭐 하나 잘하는 것 없다고 느끼며 정체성에 혼란을 겪던 E SENS는 어른들이 제시한 전형적인 성공의 기준도 맘에 들지 않습니다. 돈 봉투를 건네 받는 선생에 대한 냉소가 담긴 가사로 대표됩니다. 멜로디보다는 루프에 신경 쓴 비트가 회상에 적합한 건조한 분위기를 연출해 가사가 잘 묻어납니다.

 

 

이런 염세적인 태도는 이어지는 트랙 ‘A-G-E’에서 심화됩니다. 인간 관계와 친분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하고 사회 체계의 부조리에 굴복하거나 일조한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냅니다. 학벌주의와 타락한 종교를 다루는 허를 찌르는 라인들이 무거운 드럼과 흥분된 톤임에도 능수능란한 플로우와 합쳐져 훌륭한 곡을 완성시킵니다. E SENS의 매력을 가장 잘 담아내는 트랙 중 하나 아닐까 생각합니다.

 

짧은 기타 프레이즈로 시작하는 전자 재즈 영향이 짙은 비트의 ‘Writer’s Block’은 조금 텐션을 낮추는 트랙입니다. 제목 그대로 작가의 벽에 관한 노래인데, 가사가 안 나온다는 주제로 가사를 써낸다는 것은 E SENS의 뛰어난 작사 실력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Writer’s Block은 앨범의 잘 정돈된 트랙 배치를 볼 수 있는 면인데, The Anecdote는 완급조절이 노련한 앨범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정 분위기를 몰아서 배치하지 않아 지루하거나 피곤해지지 않습니다. 많은 작가주의적 앨범들이 실패하는 부분인데 The Anecdote는 그런 느슨함이 자리 잡는 틈이 없습니다. 담긴 내용은 많지만 음악 본연의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냅니다.

 

E SENS의 자연스러운 문장력과 능숙한 박자감을 과시하는 랩은 당연하고 간단하면서도 주제 의식을 벗어나지 않는 훅들도 앨범 전체적으로 예외인 트랙 하나 없이 전부 탑재되어 있습니다.

 

차분한 Writer’s Block 이후 이어지는 Next Level은 아마 The Anecdote를 통틀어 가장 재미있는 트랙 중 하나 아닐까 싶습니다. 독특하고 불규칙하게 정제된 보컬 샘플 루프 위에 주목 받기 전까지의 E SENS를 담아내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며 조금씩 쌓이는 성과가 생생한 디테일 덕에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특히 한국힙합 역사에 족적을 남긴 다양한 래퍼들과 유명한 지명들이 언급되는 묘사는 한국힙합의 팬이면 흥미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면에서 앨범의 타이틀 트랙인 ‘The Anecdote’E SENS의 빼어난 스토리텔링이 담겨있습니다. 다만 Next Level은 성공에 가까워지는 서사였다면 ‘The Anecdote’는 아버지를 잃어버린 아이의 상실감을 담아냅니다. 벌스가 바뀔 때마다 점점 커가는 자신과 아버지의 죽음을 돌아보는 모습을 그려내는데 가장 본능적인 면을 자극시키는 슬픔이 전해지지만 치밀한 묘사 덕에 신파적이지 않습니다. 좋은 의미로 듣기 힘든 트랙이지만 완성도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서사적 완성도만큼 The Anecdote는 프로덕션도 조명 받아야 하는 앨범입니다. 붐뱁의 박자를 기반으로 설계된 앨범은 맞지만 단순히 복고적인 음악을 담아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전형적이라 하기엔 드럼이 전반적으로 훨씬 더 무거운데다가 그 배경에 깔리는 소스들은 전위적이라는 인상을 줄 정도로 독특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A-G-ENext Level의 보컬 샘플을 운용한 방식과 주사위에서의 함성소리가 나오는 듯한 변주만 봐도 자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면에서 가장 들어맞는 트랙은 아마 삐끗일 겁니다. 느린 템포의 드럼 위에 휘몰아치는 듯한 발현악기 루프가 어우러져 싸이키델릭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이 위에 E SENS의 취한 듯한 플로우가 어우러져 최면에 가까운 감상을 선사합니다. 자신이 환멸하는 인간상과 세태를 나열하며 자신의 가치관과 어긋나는 면을 그리는 가사인데 촌철살인은 여전합니다. E SENS 커리어 최고의 곡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김심야와 함께한 Tick Tock도 비슷한 맥락의 곡입니다. 트립합의 요소가 물씬 나는 소스에 상당히 끈적하게 달라붙는 타격감을 주는 드럼으로 이루어진 비트도 일품이지만, 이 위에 겉멋에 취한 예술가상을 대차게 질타하는 E SENS의 토해내듯이 뱉어대는 랩과 김심야의 찍어 누르는 듯한 플로우는 힙합 팬이라면 감동하지 않기 힘듭니다.

 

하지만 이런 전위적인 면만큼 전통적인 작법도 사용합니다. 앞서 말한 Writer’s Block은 잘 만들어진 재즈 비트의 표본이고 6번 트랙 10.18.14도 베이스 운용이 Craig Mack94년작 Flava in Ya Ear 같은 클래식 곡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특정인을 향한 디스 트랙 같은데 재미있는 표현과 유연한 플로우를 구사하며 벌스 하나만으로도 보람찬 감상을 선사합니다.

 

Back in Time10.18.14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히 빈티지 느낌이 납니다. 건조한 샘플과 훅의 처리 방식이 90년대 뉴욕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연상시킵니다. 특히 D.I.T.C. 크루 소속 프로듀서 Lord Finesse의 차가운 분위기가 나도록 소스를 루프시키는 작법이 생각났습니다. 물론 보컬 샘플을 화음 처리로 추가해서 공간감을 많이 입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사운드를 보여줍니다.

 

어린 시절을 입던 신발과 살던 동네인 경산, 그리고 듣던 음악을 회상하는데 이 앨범의 가장 중점적 소재를 담은 것 같습니다. 결국 The AnecdoteE SENS가 누구인지를 담아내는 앨범인데 Back In Time은 명함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런 공간감은 마지막 트랙인 Unknown Verses에서도 보입니다. 이 곡에 실린 벌스 모두 E SENS의 예전 믹스테잎들에 실린 가사로 이루어졌습니다. 정확히 무슨 의미로 쓰여졌는지는 모르지만 일종의 팬 서비스인 동시에 워낙 훌륭한 벌스들이라 괴리감보다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굉장히 느린 드럼에 공간감이 두드러지는 비트에 곡이 진행되며 고무적인 변주가 추가되는 연출이 인상 깊었습니다. 앨범의 마무리를 톡톡히 해내는 여운 있는 마무리입니다.

 

The Anecdote는 가장 본연적인 힙합의 모습을 갖춘 앨범으로 평가 받습니다. 하지만 그것 치고는 힙합이라는 문화에 대한 고찰이나 평가에 대한 얘기가 중점적으로 다뤄지지 않습니다. 물론 분명 다뤄지지만, 힙합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그런 고민을 하게 되는 위치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추상적인 힙합의 모습을 그리려고 한다기보다는 그 힙합이 자라난 한국에서의 삶을 그리는데 더 초점을 맞춥니다. 한국만의 특수성을 완벽하게 정의하지는 못하지만 여기서 사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자전적 서사로 담아냅니다.

 

총기와 마약은 없어도 어른의 위선에 환멸을 느끼는 꼬마와 상경하고 각박한 현실을 이겨내야 하는 경산 촌놈은 있습니다.

 

The AnecdoteE SENS라는 강민호라는 인간이 살아온 삶을 전하지만 청자는 거기에서 한국 사회의 다양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래퍼들이 한국과 동떨어지려고 할 때 The Anecdote는 가감 없이 이 땅의 것을 전부 담아내려고 한 앨범입니다.

 

The Anecdote는 오로지 한국에서만 나올 수 있는 작품입니다. 시대를 초월해 영원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한국힙합을 대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앨범을 고르라고 하면 제 선택은 주저 없이 The Anecdote입니다.

 

 

Best Tracks: N/A

Worst Track: N/A


CLASSIC/10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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