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린 X) 이그니토를 제대로 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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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7-05-08 02:49:31


이그니토 2집 Gaia가 나온지 이제 한 닷새 쯤 됐나요. 정말 좋은 작품이 나왔다 싶었는데 게시판에서는 몇 번 언급되다가 곧 묻혀버리더군요. 뭐 이후에 블랙넛 사건이 터진 것도 있기는 했지만... 사실 이그니토라는 래퍼가 씬과 커뮤니티에서 받는 애매한 관심을 생각하면 별로 놀랍지는 않습니다만, 역시 아쉬운 건 어쩔 수가 없네요.


하지만 아쉬운 걸 떠나 개인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이 앨범이 어떤 작품인지 느껴보지도 않은 채 쉽게 혹평을 뱉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점입니다. '가사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겠다', '플로우가 없다', '랩이 단조롭다', '매번 똑같다' 등등...

 

 


이 반응, 실화입니까? 심지어 좋다는 평 중에서도 아직도 '악마'의 캐릭터로 밖에 바라보지 못하는 분들이 더러 있어서 솔직히 좀 충격이었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기존에 이그니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어떤 고정관념(이라 쓰고 편견이라 읽는)을 토대로 앨범은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은 채 최소한의 성찰도 없이 성의 없게 뱉는 평가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네요. 개인적으로는. 뭐 앨범 대충 듣는 것도 취존의 영역이라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먼저 가사를 한 번 볼까요? 간단한 예로 선공개곡 제네시스의 가사를 봅시다.



[Verse1]
얼어붙은 암흑 속 고요한 빛이 번지고
목적도 없이 우주를 떠도는 수많은 먼지로
내던져진 작고 가련한 생명의 씨는 
터를 찾아 길을 이루고 외로운 싹을 틔우지 
한 곳에 뒤섞인 물과 돌 바람과 불
습한 늪과 불탄 뭍 가득한 흙에 불어넣은 숨
맺혔던 이슬이 채 메마르기 전
첫 새벽이 빚어낸 필연 같은 기적
탄생의 나무는 그 뿌리를 깊숙이 뻗고
뿌리는 줄기를 줄기는 가지를 펼쳐
가지는 다시 잎사귀와 열매를 엮고
열매는 또 다른 탄생을 위한 씨앗을 떨궈 
그 반복의 뒤로 우거진 숲의 장관
나무 틈 사이 벌어지는 갈래를 따라
거듭된 의식과 종의 번식과 진화
예견하지 못할 악몽의 시작인가


→ 정말 전형적이고 친절한 선사시죠. 접때 국게에 올라왔던 '이그니토 식 가사쓰기'에 해당하는 문장이 있어보입니까? 세계의 탄생에 대해 적절한 단어들로 서술할 뿐 꼬아 쓴 문장 같은 건 없습니다.

[Hook]
벌어질 윤회
탄생과 소멸의 숨 가쁜 투쟁
원형의 굴레를 따라서 꿈틀대며 맴돌던 
증오가 눈뜰 때 그 빛도 찬란한 색을 감추네
각각의 원인은 내버려둔 채
이미 연출된 생성을 번복하는 붕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러야
다시 예전과 같은 처음이 되찾아 올까

→ 그나마 어려울 수도 있겠네요. 근데 사실 이것도 서정적인 표현이 들어갔다 뿐이지 앞뒤 벌스에서 '세상의 창조'와 '잔악한 생존의 역사'라는 코드를 노래한다는 것만 파악해도 별다른 해석이 필요하지 않은 가사거든요. 곡에서 말하려는 내용이 그대로 담겨있으니 말입니다.

[Verse2]
순환이 멈추고 시작되는 운동과 추동
개체들은 저마다 다른 생명의 춤을 추고 
점차 하나의 큰 율동이 전체를 주도하며
울려 퍼져나가는 파멸의 전주곡
생존을 위한 본능의 처절한 몸부림과
미지를 경계하는 두려움의 흔적들이
점차 구속뿐인 울타릴 무너뜨린 후 
발전을 넘어 승리를 쟁취할 목표를 겨누지 
불편한 서로의 목덜미를 겨냥했던 
성난 화살이 끝내 시위를 떠난 
그 순간이 바로 배척과 원한 
혹은 파괴의 역사로 대변되는 문명의 서막
시대가 축적됨에 따라 조금씩
기울어가져는 힘의 균형을 저울질
끝내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지배축
이와 동시에 흔들리는 운명의 시계추

[Verse3]
기나긴 전쟁 일시적인 소강 
희생으로 구성된 잠시의 눈을 가린 평화 
갈 곳을 잃어버린 이성과
뜨겁게 불탄 광기가 양 극단에 치달은 결과
거대하게 부풀린 몸집을 키운 괴물
모든 걸 태울 불씨가 가져다 준 행운
거친 분노를 잠재울 제물은
결국 스스로가 되어버리는 비극의 최후


→ 앞에서 말씀드린 그대로죠. 천지창조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생존의 비극성(설마 이 표현도 어렵다고 하시려나요?)을 정말 친절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떤 현학적 표현도 없죠. 솔직히 무슨 주석을 덧붙여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딱 잘라 말해서 이그니토는 어려운 가사를 쓰는 래퍼가 아닙니다. 다만 일상적인 소재와 화자가  정면에 나서서 솔직한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가수는 아닐 수 있겠죠. 아마 이 부분 때문에 '철학적이다', '현학적이다' 심하면 '뜬구름 잡는 소리한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 이그니토의 가사는 평소에 소설이나 시만 조금 읽어도 해석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좋습니다. 백번 양보해 가사는 그렇다고 칩시다. 예? 플로우가 단조로워요? 누구의 영향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국힙에서는 음절 수를 늘렸다 줄이고, 감정선을 크게 휘둘러야 플로우가 화려하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근데 플로우는 박자거든요. 박자를 쪼개고 밀고도 있지만 그걸 얼마나 다양하게 배치하느냐가 플로우의 화려함을 결정한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상 가능한 플로우는 사실 국힙에 지천으로 깔렸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비와이죠.



많은 분들이 비와이의 단점을 완급조절로 꼽으시던데 저는 거기에 동의 못합니다. 비와이 완급조절 존나 잘해요. 어디서 강세를 줘야 할지 잘 알고 자기가 가진 재료를 적재적소에 쓸 줄 아는 래퍼라는 겁니다. 근데 왜 다 똑같이 느껴지냐. 박자 구성이 오질나게 허접해요. 키보드로 타이핑하듯이 일정하게 박자가 떨어져요. 비와이 본인도 그걸 알아서 그런지 어쩐지는 몰라도 라임 아닌 데에서 뚝 끊고 강세를 주는데, 그거 전혀 다채롭지 않거든요. 비와이 랩을 따라하기 어려운 이유? 간단합니다. 박자를 오지게 쪼개거든요. 박자가 어려워서가 아니예요. 근데 박자 쪼개는 걸로 플로우의 화려함을 결정하기엔 다양한 박자가 주는 경이로움이 굉장히 커요. 무슨 소리냐.



직접 들어보시죠. 더콰이엇 스윙스가 이그니토한테 개쳐발린 트랙입니다. 발성과 목소리의 차이도 있겠지만 박자 구성에 있어서 비교가 안 됩니다. 사실 이건 아직도 유효한 얘기고요. 아 행여나 이그니토 빨아줄려고 별 개소리를 다한다 싶으시면 아래 곡도 들어보시죠.



이그니토와 더불어 박자 어렵게 타는 몇 안되는 국힙 래퍼, 이센스가 스윙스 버벌진트를 압도한 트랙이죠. 행여나 이걸 듣고도 감이 안 오신다면 발로 박자 잡으면서 음절 하나하나를 따라가 보세요. 확실히 뭐가 다른지 느껴질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그니토의 음악은 항상 똑같다?


이그니토 칠린터뷰에서도 나온 내용이죠. 뭐, 이그니토의 곡 대부분 어둡고 진중한 분위기긴 합니다. 근데 가사 주제, 곡 구성, 플로우 구성을 생각하면 글쎄요. 사실 항상 똑같은 류의 비트에 똑같은 주제로 알맹이도 없는 소리 하는 래퍼는 정작 지금 엄청 빨리지 않나요? 그거도 꽤나 여럿이? 항상 어둡다는 이유로 이그니토의 음악이 똑같다는 건 기타에 디스토션만 걸면 다 같은 메탈이라는 거랑 똑같은 논리라고 봅니다. 당장 이번 앨범만 보더라도 보통 이그니토 하면 생각 못하는 사랑 노래도 들어가 있고 하거든요.



뭐 이런 거...


이그니토를 좋게 보는 분들 중에서도 앞서 언급한대로 악마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분들도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요것도 그렇고 예전에 레버넌스 앨범만 들어도 악마 프레임은 오로지 데몰리쉬에 한정된 컨셉이지 오히려 서정시인에 가까운 면모를 훨씬 많이 보여줬거든요. 사실 따지고 보면 데몰리쉬에서도 Life처럼 서정적인 곡이 타이틀곡이었지만 말입니다.


글을 끝내기 전에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허구한 날 아티스트는 없고 B급 연예인만 남았다고 한탄하기 전에 지금 있는 아티스트부터 좀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습니다. 막말로 국게 보면 쇼미충을깔 자격이 있나 싶어요. 정작 자기들도 쇼미더머니 꼬박꼬박 챙겨보고 거기 출연진 위주로 소통하면서. 포털사이트에 '비와이가 에미넴보다 잘하나요?' 내지 '랩몬스터는 언더그라운드에서도 인정받았잖아요' 같은 글 올라오면 캡쳐해서 올려놓고 '어휴 이게 뭐람'하면서 우월감 느낀다고 힙합씬에 일조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어차피 진짜 아티스트들 관심 안 주기는 마찬가진데. 네, 잡설이 길었네요. 여튼 이그니토를 굉장히 좋아하는 '리쓰-나'로서 아쉽기도 하고 한 마음에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봤습니다. 긴 글 읽느라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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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7-05-08 01:38:20

 재밌게 읽었습니다 :) 다음 리뷰는 이그니토 앨범으로 생각했는데 많은 도움 되었습니다. 그나저나 제피의 "What's Hip-Hop" 오랜만에 듣게 되었는데 이그니토의 바운스 다시들어도 굉장히 좋네요.

Updated at 2017-05-08 02:13:26

이그니토가 뭔지 모를 말만 뱉어낸다고 하길래 리뷰나 써볼까.. 하다가 게을러서 미루고 있었는데 재미있는 글 잘읽었습니다.

무조건 청자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도 잘못된 말일 수 있지만 이해가 안되면 자신의 언어능력을 한 번 되돌아 보는 것도 좋을텐데..

2017-05-08 07:26:36

재미나게 잘 읽었어요,

음반 구매하고 CD발매되면 들어보려고 하는데

기대감이 커지네요 ㅎㅎ

2017-05-08 10:16:05

아... 알겠는데 안땡김

2017-05-08 10:39:38

본인만의 방식을 고집해서 계속 연구하고 가다듬는데 

요즘 리스너들의 입장은 다 똑같은거같다 뭔소린지 잘 모르겠다. 

특히나 힙합 듣기 편해져버린 요즘 다들 가볍고 신나게 혹은 돕하게 즐기는 리스너들에게 

이그니토의 일관적인 방식은 일단 재미가 없어버릴 수 있겠다.. 싶네요.

 

이래놓고 쇼미더머니에서 뭔가 팍 때려주는 이슈가 몇 생기면 

음악 외적으로 호기심이 발동들 해서 또 우루루 몰려들거에요 일시적으로.

 

어쨋든 이그니토 너를 빅딜부터 바이탈리티까지 지켜봤다의 입장인 리스너로써 충분히 공감되고

아쉽고 서운하고 오만가지 만감이 교차하는.. 좋은 분석글이었습니다. 감사해요 동지.

2017-06-02 10:29:31

양싸야 2년만에 명글 하나 드랍했구나!

Updated at 2017-06-02 10:33:11

근데 님 대체 무슨 이유에서 븨제이는 싫어하시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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