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 '어미' 의존 라임에 대한 생각
휴일이고 어쩌다가 시간이 남아서 길게 씁니다. 양싸님의 의견을 잘 보았습니다. 이런 논쟁을 좋아하시는 분이 많은 것 같아서, 다소 뜬구름 잡을 수도 있지만 일개 리스너로서 글 한 번 올립니다. 논쟁은 언제나 환영이지만 맹목적 비방과 댓글은 사양합니다. 이 전에 올릴까말까 정리하던 글이 있었는데, 수정해서 다시 올립니다. 전 음악에 대해서는 전공자는 아니지만, 문학을 전공하고 있고, 계속 할 생각이라서 이 부분에서만큼은 남에게 소개할 때 전공자라고 얘기할 정도의 자부심은 있습니다.
우선 소리와 표기 문제를 건드리죠. 산이가 한글에 대한 감사가 아닌 한국어(소리)에 대한 감사를 세종대왕에게 하는 것처럼 말이예요. 소리와 표기에 관한 문제는 중요합니다. 중세나 근대 국어에는 각자병서표기 (지금은 ㄲ, ㄸ, ㅆ, ㅃ, ㅉ으로밖에 남지 않았으며 된소리를 표현하는 용도로 사용되지만)인 ㅂㅅ, ㅂㅈ라는 표기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때(時)’를 가리키는 말을 ㅂㅅㄷㅐ라고 표기했습니다.(여기는 옛한글이 표기가 안 되는 군요.) 그리고 실제 발음도 [bstæ]라고 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답니다. 지금 제주도 방언에 그런 식의 발음을 한다고 해서요. 즉, 중세 한국어에도 모음이란 매개 없이 발음되는 소리가 있다고 가정하기도 합니다. 단지 현대한국어에는 없어졌을 뿐이죠. 영어와의 비교를 통해 살펴보죠. 영어의 Spring[spriŋ]은 1음절입니다. 그러나 한국어로 ‘스프링’은 3음절입니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모음이 없이 자음 혼자서만 발음되는 음운 현상은 많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가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실제 발화에서 모음뿐인 어미나 조사를 명확하게 발음하지 않습니다.) 즉, 왜 이 얘기를 먼저 꺼냈느냐고 묻는다면 영어권의 특징이 바로 저런 모음이 없어도 발음이 되는 음운 현상과 지금의 한국어의 음운 현상의 차이가 랩에서의 차이도 만드는 것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이 부분이 다른 언어와 중요한 특징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이 과연 한국어 랩의 약점일까는 고민해야할 부분입니다. 저도 이쪽분야는 전문분야가 아니라서 이정도로서 더 쉽게 설명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는 분명한 언어적인 차이입니다.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면 라임 논쟁을 꺼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군요. 버벌진트와 UMC의 논쟁은 이제 한국 힙합의 하나의 상징과도 같다고 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랩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에 버벌진트는 라임에 UMC는 리릭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죠. 사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분명 크나큰 오류가 있습니다. 그 부분은 뒤에서 밝히기로 하죠.
이 논쟁은 이미 결판이 난 문제라고, 아직까지도 어그로를 끌기 위한 소모적 논쟁으로 치부해버립니다. 그러나 충분히 발전적 논쟁이 될 수가 있어요. 우리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처음부터 당연한 게 아니었습니다. 전 적어도 힙합을 사랑하고 랩을 좋아하다면 다양한 각도로 다양한 생각들을 풀어내면서 발전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당연히 랩에는 라임이 꼭 있어야 한다고 하죠. 랩은 음악이기 때문에 운율적인 요소가 꼭 필요하다고 하고 그게 바로 라임이 필요한 이유라고 말이죠. 사실 이 문제를 조금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봅시다. 조금 더 크게 봐서 힙합이라는 판을 떠나서, 문학의 시(詩)를 생각해보죠.
힙합의 랩과 랩의 가사는 본질적으로 언어이기 때문에 문학에서부터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잠깐 문학 수업으로 되돌아가서 한국 시(詩)의 역사를 살펴볼까요? 한국 최초의 근대 시(자유시라고 말하는)의 출발점을 학자들 대개 신체시라고 불리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형식은 서양의 자유시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죠. 그렇다면 이전의 우리나라에는 시(詩)가 없었느냐? 정확히 말하면 서양의 시(詩)와 비슷한 것이 있었죠. 그리고 그러한 것을 시(詩)라고 부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는 이를 시조(詩調)라고 해서 다른 명칭으로 부릅니다. 물론 한시(漢詩)도 있겠지만 이 역시 중국의 시(詩)의 형태를 가져온 것이고, 우리말이 아닌 중국어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양의 자유시를 가져와서 이전의 시조가 아닌 시(詩)라는 새로운 형식의 문학 장르가 생겨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서양의 시(poet)의 요소를 거의 다 가지고 왔습니다. 형식적인 자유로움, 이미지, 사유의 요소 등등 그러나 한 가지 가져오지 못한 게 있죠. 바로 서양 시가 갖고 있는 운율적인 요소(마땅한 번역어가 없으므로 라임이라고 하겠습니다.)입니다. (전통 중국 시의 각운과 거의 비슷한 개념이죠. 대부분 한시를 보면서 한자음 한 글자를 비슷하게 맞춘 거라고 치부해버리고 비중 있게 생각하지 않으시는데 중국인들이 한시를 직접 낭독하는 것을 보면, 아 왜 각운을 맞추는지, 각운의 효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겁니다.)
서양시의 저런 특징적인 운율적 요소(라임)를 한국어로 구현하기 어려웠습니다. 한국의 근대(현대)시는 운율적인 요소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굳이 비슷한 발음의 단어를 맞추어 시를 쓰는 경향이 거의 없습니다. 왜일까요? 바로 언어적인 요소에서 한국어는 영어권의 라임 사용이 그다지 적절치 않다는 것이죠. 서양의 라틴어 원 계열의 언어들은 굴절어로 비슷한 형태(와 발음까지)로 굴절합니다. 예를 들면 영어에서 명사형 접사–tion, 부사형 접사-ly, 과거형 접사-ed, -ing 등등. 한국어는 교착어이기 때문에 조사와 어미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조사, -는, -을, 어미 –는, -게, -이다. 뭐 전부터 이런 논의에 대한 말은 많았으니까 더 이상 자세히 적지는 않겠습니다. 한국어의 교착어적 특징(조사와 어미의 사용)이 운율을 더 강조하기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자유시의 전통에서는 별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논의조차 없는 것 같더군요. 한국 자유시 전통에서도 어미의 활용을 통한 대구를 시에서 자주 사용하긴 하지만, 리듬의 효과에 대해서 치밀하게 분석한 글은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제가 무지할 가능성이 더 크군요.)
그렇다면 한국의 시(詩)는 어디서 운율적인 요소를 가지고 오느냐? 주로 음보율에서 가져옵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예를 들어서 설명할 수 있겠죠. 오히려 이는 시조, 가사의 전통에서 오고 있어요. 음보율과 음수율에서 운율을 가지고 옵니다. 4음보니, 3/4/3이렇게 3번으로 끊어 읽는 것으로 운율을 맞추고 있죠. 우리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게 있는데, 시라는 장르는 본질적으로 소리 내서 읽어야하는 장르입니다. 즉 노래여야 한다는 점이죠. 한국의 근대시는 이점이 많이 퇴색됐지만, 여전히 낭송을 통해 시를 소리 내서 읽죠. 아무도 글자로만 읽지는 않아요. 그것은 시를 반쪽으로 읽는 것이니까요. 시조와 가사 역시, 음악에 맞추어 소리 내는 본질적으로 노래입니다. 아예 시조창이라는 것도 있고, 시조와 가사에 맞춘 음악이 아예 따로 있습니다. 퇴계 이황도 그런 소리를 했었죠. 한시를 쓰긴 하지만 우리말과 달라 노래를 할 수 없으니까, 시조로서 우리말로 된 노래를 불렀다고요. 예를 들어 도산십이곡의 시조들이 그렇습니다.
우리 말, 한국어 화자에게 전통적으로 노래는 라임, 각운보다 음보, 음수율이 중요하게 여겨졌어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근대시(서양의 자유시의 영향을 받은)는 오히려 운율이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음보율과 음수율을 지키지 않는 경우도 많거든요. 반면 전통적인 시조와 가사에 영향을 받았다는 전통적 서정시는 음보율과 음수율로 운율을 맞춥니다. 대표적으로 김소월의 시라고 할 수 있는데 3음보에 맞춰서 시를 읽죠.
우리나라에서는 서양의 자유시가 들어온 이후로 이제는 시의 운율적 요소를 중요시 않는 전통이 계속되다보니, 별로 음보율과 음수율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몇몇 시조시인을 제외한 시인들은 음보율과 음수율이라는 형식을 갖춘 시를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잠깐 딴소리 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만큼 시가 많이 중시되는 나라는 이제 거의 없습니다. 지금 세대는 현저히 약해졌지만 시를 자체적으로 생산해내고 소비하고 있습니다. 시는 교과서뿐 아니라, 돈이 전혀 안되고 적자가 나도 메이저 문학출판사들은 시집을 발행합니다. 오히려 미국 같은 경우에는 교과서에서만 등장하죠. )
문학수업이 지루하셨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다시 힙합의 라임으로 생각해보죠. 힙합의 라임은 서양 전통의 시에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습니다. 물론 조금 더 다양한 방식의 라임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즉, 문장을 파괴해서 라임을 맞춘다는 식의 라임들이 있습니다. 영어랩의 예를 들면, 문장 구조를 파괴하면서 라임을 맞추는 대표적인 예로 에미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요새는 전반적으로 이러한 추세이므로 누가 선구자로 할 수는 없겠네요. 하지만 비교를 통해서는 충분히 간략한 흐름(?)을 알 수 있을 겁니다. 1997년 puff daddy의 정규 1집의 타이틀 곡 ‘I’ll be missing you’의 랩의 라임 운용방식을 보시죠.
Seems like yesterday we used to rock the show
I laced the track, you locked the flow
So far from hangin′ on the block for dough
Notorius they got to know that
Life ain′t always what it seem to be
Words can′t express what you mean to me
Even though you′re gone we still a team
Thru your family I′ll fulfill your dreams
In the future can′t wait to see if you′ll
Open up the gates for me
Reminisce sometime the night they took my friend
Try to black it out, but it plays again
When it′s real feelings hard to conceal
Can′t imagine all the pain I feel
Give anything to hear half your breath
I know you still livin′ your life after death
물론 5년이란 시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2002년에 나온 eminem의 without me입니다.
I've created a monster, 'cause nobody wants to
see Marshall no more they want Shady I'm chopped liver
well if you want Shady, this is what I'll give ya
a little bit of weed mixed with some hard liquor
some vodka that'll jumpstart my heart quicker than a
shock when I get shocked at the hospital by the doctor when I'm not cooperating
when I'm rocking the table while he's operating (hey!)
you waited this long now stop debating 'cause I'm back,
I'm on the rag and ovulating
I know that you got a job Ms. Cheney but your husband's heart problem's complicating
So the FCC won't let me be or let me be me so let me see
they tried to shut me down on MTV but it feels so empty without me
So come on dip, bum on your lips fuck that,
cum on your lips and some on your tits and get ready 'cause this shit's about to get heavy
I just settled all my lawsuits Fuck YOU DEBBIE!
들어보셨을 거라는 전제하에 사족은 더 붙이지 않겠습니다. 분명 영어의 랩도 라임 운용방식이 많이 바뀌었을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한국에 미국 힙합이 들어오면서, 한국말로 했을 때, 라임이 주는 음악적 효과(운율)를 어떻게 하면 줄 수 있을까를 치열하게 고민했죠. 그리고 그러면서 라임을 사용하는 몇 가지 방법론이 등장했습니다. 제가 임의로 정했습니다만, 구체적인 분석틀이 없기에, 오만하지만 한번 적어봅니다.
① 교착어의 특징을 이용한 조사와 어미 위주의 라임으로 운율을 맞추자.
② 비슷한 발음을 묶어서 라임과 같은 효과를 주자.
③ 서양 언어 전통의 라임보다 한국어의 특징을 잘 살린 (음보율과 음수율을 통해) 운율을 보여주자.
그 방법론 중에서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고 ②이죠. 사실 요새 본토 힙합을 들어도 서양 시의 전통과 같은 라임이 아니라 비슷한 발음으로도 라임을 맞추기 때문에, 당연히 모두들 라임의 방법론은 역시 ②이라고 동의하는 듯합니다. 물론 ②의 장점은 운율(리듬)을 극대화하여 효과적으로 운율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힙합음악은 다른 음악적 요소보다 리듬을 가장 부각시키는 특징이 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저도 ②의 방법론에 많은 동의를 합니다. ②방법론의 가장 큰 전제는 ‘랩의 본질은 음악(리듬)에 있다.’입니다.
② 방법론이 가진 장점이 분명 있습니다. 언어의 의미와 언어의 리듬의 불일치가 가져오는 뜻하지 않는 음악적 리듬의 극대화가 있죠. 이러한 것을 잘 활용하는 건 피타입이 아닐까합니다. 전 피타입이 피쳐링이니까 이렇게 한다고는 했지만, ② 방법론을 극대화로 활용한 것은 의 피타입 벌스라고 생각합니다.
불한당가, 불안감과 억울한 밤 따위 금한다
따분한 감각A들 아까운가? 그맘 다 안다, 그만 간봐
붉은 물든 한강과 남산 자락들, 안방같은 서울거리,
놀이판 벌인 불한당, 답을 안단다 용들 꿈틀한다
따분한 판 바꿀 한방같은 노래 받아라, 불한당가
뒤집어, 궁금한 다음 카드
보고 싶었던 걸 볼테니 자리 지켜
그 만담같은 노랜 내 불 붙은 볼펜이 태우지
가끔 한밤, 다급하게 날 찾는 북소리
혼이 듬뿍 서린 그 소리,
불한당가 봐라, 금마차를 탄 비굴한
탐관오리 같은 자들 볼기짝을 때려 붙잡을
순간이 왔다 이제 불한당과 가자,
뭣들 한당가 준비된 불한당들의 놀이판,
그래, 불한당과 함께라면 넌 불한당
이제 같이 불러라, 불한당가
따라와 그대, 불한당과 함께라면 넌 불한당
이제 같이 불러라, 불한당가.
피타입 랩을 들을 때는, 항상 리듬이 귀에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의미가 한발 짝 뒤에 전달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 리듬이 주는 장르적 쾌감이 분명 힙합에 있어 상당부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사를 보지 않으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는 미국힙합, 영어 혹은 불어로된 음악을 들을 때 생기는 리듬이란 그런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주장해봅니다.
하지만 ①이나 ③의 방법론은 완전히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 에 대해 저는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특히 ①, ③의 방법론의 가장 큰 전제는 ‘랩의 본질은 언어에 있다.’입니다. ①,③의 방법론은 사실 거의 동일한 선상에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어를 쓴다. 그렇다면 한국어로 가장 운율을 잘 표현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가 바로 ①, ③방법론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따라서 나래이터처럼 하는 랩이 운율은 적어도 확실한 전달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언어의 본질적인 특성인 의미의 전달을 가장 최우선으로 하고 있으니까요. 맨 처음에 논의한대로 버벌진트가 라임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UMC가 리릭(가사)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쓰는 것은 사실 오류입니다. 버벌진트는 라임을 대표하는 게 아니라, ②방법론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 랩에 있어 라임이 있다기보다는 라임과 같은 효과를 주는 것이 있는 것이 더 바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어 자체에 일단 라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없으므로) 그리고 UMC는 운율따윈 전부 무시하고 가사적(언어적)의미만을 쓰는 것이 아니라, ①, ③방법론(①보다도 ③방법론에)을 대표하는 상징입니다.
즉 랩의 본질이 음악에 달려 있는가, 언어에 달려 있는가에 대해 서로의 중점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분명 이는 소모적이라기보다는 발전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랩의 본질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실 두 가지 부분(리듬과 언어)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죠.
솔직히 ② 방법론을 극단적으로 말하면, 비슷한 음절(의미를 가지지 않아도 상관없는 소리)을 반복하는 것으로 랩이 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우리말도 아니고 영어도 아니게 랩하면 되지 않나요? ‘응구루부르트가 빠뚜카, 불거루 파추타/ 투투루쿠루만 카프타 추츄부우자추 나프까’ 의미가 안 중요하다면, 이렇게 랩을 해도 되나요? 극단적이라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음악적 소리만 좋다면 저렇게 써도 되지 않나요?
전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어떻게든 의미를 가져야 랩이 되기 때문이죠. 이거에 대해 완전히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우리는 흔히 ②방법론과 ①, ③방법론이 서로 상충되고 반대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만 사실 충분히 함께 갈 수 있는 방법론입니다. 아니 우리도 모르게 충분히 함께 가고 있습니다.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서 라임보다 한국어 발화상황, 음보율과 음수율을 갖추고 있는 랩들이 등장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이러니하게도 크루시픽스 크릭의 UNION의 버벌진트 Verse를 보면서 ① 방법론에 가깝다고 생각했거든요.
몇 년만이야 대체
니가 내게 먼저 인사 안 했으면 그냥 지나칠 뻔했네
어딘지 모르겠지만 얼굴이 변했네?
지금은 어디 살아? 아직도 거기 사냐?
난 서교동 간 지 벌써 몇 년 됐잖아
넥타이 멘 거봐라, 직장다니나봐.
음? 지금도 음악 해. 티 많이 나냐?
수염은 원래 고등학교 때부터 짱 먹었잖아
넌 몸에 살이 쫌 붙었다?
야 지금 급한가? 아니면 한잔해
내일 토요일인데 뭐 타이밍도 딱 맞네
그래, 집에 전화해. 기분 좋다.
근데 너 설마 유부남? 예상보다 빠른데?
난 making money & music 땜에 바빠서
택도 없지 결혼. 부모님 눈치 따가워.
돈은 쫌 벌리냐고? 어 그럭저럭
너보다 많이 벌 수도 있어 어쩌면.
야 진짜 반갑다. 저기 좋겠는데
쫌 앉아서 옛날 얘기 좀 하다 가자.
여기서 버벌진트는 한국어 의미의 전달력을 극대화합니다. ‘뻔했네’, ‘변했네’, ‘거기 사냐?’ ‘티 많이 나냐’의 식의 라임 운용방식이 촌스러운가요? 오히려 자연스럽고 랩적으로 깔끔하다고 생각합니다. 버벌진트는 ②방법론만을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사랑해 누나’같은 곡도 라임과 한국어의 요소를 동시에 살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입니다.
버벌진트 단연코 부정하겠지만 개인적으로 UMC 음악의 영향을 아예 안 받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버벌진트 보기에 UMC는 ②방법론을 부정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버벌진트에게는 ②방법론을 대표하는 다음절 라임과 자신 다음절 라임의 창시자라는 자의식을 짓밟았기 때문이거나 혹은 실제로도 UMC 당시에도 2011년의 3집에서도 ②방법론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죠.) 유독 UMC를 완전히 부정한 게 아니었을까요?
사실 ①의 방법론도 처음에는 촌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방법론이 아니라, 그 랩자체가 촌스러워서 착각한 것 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주 쓰입니다. 개인적으로 이에 해당할만한 곡은 The Quiett ‘한번뿐인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사를 볼까요?
한번뿐인 인생 이렇게 살 수 없어
바람처럼 왔다 이슬처럼 갈 수 없어
내게 두 날갠 있지만 전혀 날 수 없어
세상이란 새장에 갇혀서
내가 세상보다 좀 더 높다면 낮췄어
사람들은 그게 인생이라고 가르쳤어
참고 억누르고 솟아오르는 눈물을 절대
보이지 않았어 고독만이 남았지 곁엔
때론 강한 척 때론 약한 척
그럴수록 진짜 내 모습은 점점 사라져
복잡한 머리 속에서 파도 치는 혼란
거울을 쳐다봐도 난 내가 누군지 몰라
나 이제 후회 없이 살고파
모든 게 끝나는 순간
미소지으며 떠나고파
한번뿐인 인생 이렇게 살 수 없어
바람처럼 왔다 이슬처럼 갈 수 없어
①의 방법론으로만 쓰인 것은 아니지만 효과적으로 어미를 맞춘 대구적인 표현을 통해 전달하고자하는 부분을 명확하게 전달하면서 또한 강조합니다. 이 랩이 마냥 촌스러운가요? 가사로만 보면 촌스럽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직접 듣거나, 불러보면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 노래방가면 이 노래를 많이 부르는데, 정말 더콰이엇의 패기를 잘 보여주는 랩이라고 생각합니다. 팔로알토도 이러한 ①방법론의 랩을 자주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팔로알토의 ‘감기’라는 곡을 보죠.
방안에서 혼자 꿈을 꿨을땐
거창한걸 바란적이 없었네
원하던걸 내 손안에 쥐었을땐
감사함보다 욕심이 더 컸었네
내가 아닌 내가 내가 됐어 어느새
인사를해 거울속에 낯선그대
예전의 난 지워졌나봐 결국엔
이젠 이게 또다른 나니까 다시 적응해
다 크고나니 아버지도 흘리는 눈물
내 가족을 지켜나갈 준비해
사는건 참 치사하고 유치해
고상한척하는 내가 제일 웃기네
예민해지면 혀가 바로 흉기네
뱉은만큼 내 마음에 더 큰 흉 지네
지금 서있는곳이 꿈을 꿀 침대
꿈은 현실이지 낭만이 깨어 숨쉴때
‘꿈을 꿨을땐’과 ‘손안에 쥐었을땐’이 대구를 이루고, ‘없었네’와 ‘컸었네’가 대구를 이룹니다. 그나마 다른 건 ‘어느새’와 ‘낯선그대’, ‘결국엔’, ‘적응해’, ‘눈물’이라는 라임정도밖에는 없고 16마디를 거의 모두 대구의 반복으로 이룹니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노래인데, 그렇게 촌스러운가요? 어느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가에 대해서는 랩퍼들의 생각이 참 다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한영혼용을 많이 쓰는 랩퍼들은 랩의 본질을 언어보다 리듬에 중점을 두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랩은 간지나 보이고 리듬이 있으면 된다고 보는 입장이죠. 그 부분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① 방법론을 중요시하는 랩퍼들은 랩의 언어적 전달력과 의미를 항상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글이 길었습니다만, 우리는 여전히 랩을 들을 때, 라임을 중요시 합니다. 과연 한국 힙합에게 라임은 있는 것일까? 아니면 라임과 같은 효과를 주는 것이 있는 것일까? 라임과 같은 효과를 주는 것들을 우리는 라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면 한국말의 운율을 부각시켜주는 다른 요소들을(아직까지 라임으로 부르지 않겠지만, 음보율이나 음수율에 대한 연구) 끌어들여서 더 탄탄해질 수 없을까? 하는 고민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사실 랩을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위의 세 가지 방법론 모두를 연구하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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