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렸던 감상 싹 다 하기 프로젝트 pt.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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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8 22:40:18
  밀렸던 감상 싹 다 하기 프로젝트

리뷰라기보다는 일기장에 쓸만한 글을 옮겨왔다는 느낌으로 적어보는 앨범 소감문입니다.

현재 저는 11.2 월요일까지 휴가입니다.

부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육아열전이거든요.


대상: 

적어도 세 곡 이상의 앨범.

내가 아는 / 어디서 들어본 아티스트 + 뭔가 지나가다가 추천 받거나 들어주세요! 했던 거라든지... 그런 앨범들


주의:

음알못. 특히 사운드알못.

붐뱁충.



(1) kaogaii - 열혈 (2020.9.3)


 ...솔직히 고백하자면 가오가이의 앨범이 나왔다는 걸 모르고 있다가, 어떤 분이 쓰신 LBNC의 올해 활동 목록을 보고 알았네요. 자칫하면 올해 활동은 HOFGANG 뿐이라고 생각할 뻔...


 kitsyojii이 성공적인 변신을 했듯, 가오가이도 과거 Playback 때에 비해 이미지 변신을 꾀했습니다. HOFGANG 앨범 얘기하면서 말한 적 있지만, 완전히 변해버린 kitsyojii에 비해 가오가이는 랩 스타일 같은 것 때문에 어느 정도는 Playback 때의 모습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kitsyojii와 마찬가지로 뻔뻔하고 막 나가는, 때로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허황된 모습을 차용하여 자신의 과거와 구분 짓고 있습니다. 


 "열혈"은 제목처럼 뜨거운 걸 담으려했습니다. 싱글과 HOFGANG이 있지만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첫 기회인 바, 가오가이로써의 이미지를 열혈남아로 굳히려는 의도가 다분합니다. 과거에 비해 훨씬 쩌렁해진 톤과 시원시원한 발성이 캐릭터랑 상당히 잘 어울립니다. kitsyojii는 무척 멜로디컬한 랩을 하는 데 비해 가오가이는 호통을 치는 듯이 직선적인 랩만 한다는 것이 재밌군요. 이런 음악과 조화로운 캐릭터를 새로 옷으로 입은 덕에 "열혈"은 Playback 때에 비해 훨씬 재미있고, 몰입 가능한 앨범입니다.


 근데 아직은 군데군데, 그 캐릭터에 본인이 적응 못하는 것 같은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HOFGANG 앨범 때도 마찬가지로 느꼈던 건데, 비슷한 얘기만 반복한다든지, 진부해서 굳이 넣을 필요성을 못 느낀 라인 같은 것들이 간간히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무원" 2절? - 기발한 것과 이상한 것은 정말 한끗 차이라, 그냥 제가 너무 까탈스러웠는지 모르지만요. 랩적으로도 비슷합니다. 뭔가 파워풀한 걸 보여주고 싶은 의지가 넘치다보니 가끔 본인 역량 이상의 스킬을 시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발성이 좋아서 파워는 충분히 느껴지기만 하지만... 한줄 반복이 많았던 훅도 아쉬웠고요.


 HOFGANG 앨범을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kitsyojii랑 비교하는 건 지양하려고 합니다. 둘은 같은 팀이지만 다른 스타일을 하고 있고, 가오가이의 변신도 이정도면 성공적이라 느끼기에 굳이 정도를 비교하는 것도 무리수겠죠. 허나 활동 정도에서도 kitsyojii가 훨씬 치고 나가고 있는 건 부정할 수 없지 않을까요. 와중에 쇼미더머니에선 애국 컨셉이라는 웬 이상한 캐릭터를 잡으려고 하는데, 딱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나온 후 본인의 커리어를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2) 이승여ㅂ - 희생소식 (2020.10.12)


 이번 앨범을 제외하면 별다른 정보가 없는 이승여ㅂ은, 6월에 EP를 발표했던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의 소속 레이블 "영혼도심"의 또 다른 소속 뮤지션입니다 (감상 글을 쓸 때 연작 시리즈거나 작업실 이름 정도로 추측했는데 레이블이라더군요). 영혼도심에서 나오는 앨범이 그렇듯 이번에도 이레네가 총괄 프로듀싱을 맡았고, 그래서인지 어두침침한 색을 띄고 있습니다.


 이승여ㅂ의 음악은 비판적이고 직설적입니다. 넓게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거짓과 연기, 배신 등 의사소통과 관련된 부정적인 요소들을 다루며, 노래마다 소재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세부적인 내용을 정확하게 짚어갑니다. "아수라"의 괴물 이야기나 "죄의 삯"처럼 신과의 대화 형식을 취한 것도 신선했어요.


 다만, 랩적으로 힘이 부족해서 메세지에 음악적인 힘이 부여되지 않는게 제일 아쉬운 점입니다. 돌려 말하지 않는만큼 소리로 취할 수 있는 방향은 비교적 뻔해지는데, 이 기준에 맞춰서 보면 발성이 약하고 플로우 디자인이 감흥 없이 이뤄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중간에 싱잉으로 후렴을 만든 것은 변화 요소로써 좋지만 "소음" 같은 곡에서 깔끔하게 정리가 안 된듯 해서 거슬렸고요.


 이에 맞춰 이레네의 프로덕션도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에 비해선 의도적으로 힘을 뺐던 것 같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이 프로덕션은 조금 다른 색깔을 띄고 점차 악기가 추가되어 풍부해지며, 인스트루멘탈 트랙인 "1393"으로 끝을 맺습니다. 1393은 자살 예방 헬프콜 번호로, 부정으로 시작했던 앨범의 서사를 긍정으로 끝맺는 의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다이나믹한 서사를 효율적으로 담아내기엔 위에서 말한 점에서 래퍼의 역량이 조금 아쉬웠던 것 같습니다. 아래로 떨어지려면 분명한 추락이 있어야지 이후의 상승이 돋보이는데, 결국 앞에서 보여준 것들이 아티스트의 의도보다 훨씬 덤덤하게 다가왔던 거 같아, "1393" (조금 더 넓게 보면 "주홍글씨"도)의 분위기 전환이 뜬금 없게 느껴졌습니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거의 첫 흔적이라는 데에서 이승여ㅂ은 아직 설익은 래퍼라고 판단할 수 있을 듯합니다. 표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많은 듯한데 아직은 발전의 여지가 많아보입니다. 이런 부분들이 추후에 더 완숙해지면 좋겠군요. 동시에 이제야 두 개 들은 셈이지만 영혼도심의 색깔도 어느 정도는 알 거 같군요 (결국 이레네의 색깔이라 해야하려나).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색깔이라 앞으로의 활동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거 같습니다.



(3) TAEO - Twinkle (2020.10.14)


 TAEO는 Blackpink나 청하와도 작업한 바 있는 The Black Label 소속의 작곡가 겸 래퍼입니다. 래퍼로써의 커리어는 확인 가능한 건 길지 않지만, 첫 EP에는 Verbal Jint, Justhis가 랩으로, Ian Purp, GAKA가 프로듀싱으로 (+Don Malik "선인장화"에서 큰 역할을 했던 Bababa도) 참여해서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습니다.


 The Black Label 내의 포지션이 '작곡가 겸 탑라이너'라고 들었습니다. 듣기 전에는 R&B 앨범이거나 적어도 신박한 노래가 실려있는 힙합 앨범일 거라 예상했지만, 실제로 들어보니 멜로디의 비중이 그리 크진 않습니다. 그냥 아주 촌스러운 관점에서는 톤이 노래하는 사람 치고 너무 어리게 느껴지는 면도 있습니다. 가벼운 트랩 풍의 싱잉 랩이지만, 배경을 반영하듯 팝적인 코드가 많이 가미되어있고, 중독적인 포인트를 주는 후렴구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대를 했던 것에 비해선 아쉬운 앨범이었습니다. 취향 탓이지만 음악 스타일이 많이 가볍고 얕다고 느꼈습니다. 그게 그거대로 키치한 매력을 가지면 좋은데, 그 와중에 개성적이려고 하는 느낌이랄까요? 호화로운 피쳐링진은 좋지만 그런 전체적인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프로듀싱진도 모르고 들었을 땐 크게 감흥이 안 가고요 (뭐, Bababa는 원래 전자 음악 쪽 했다고 들었습니다). 만약에 그런 배경이나 피쳐링진이 없었다면, '한국의 흔한 싱잉 래퍼 N호' 정도에서 감상이 끝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건 괜히 기대치를 높게 가져가서 생겨버린 지나친 실망일 수 있겠네요. 위에서 말했듯 제 취향과 많이 다르기도 했고요. 가볍고 통통 튀는 싱잉 랩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다른 의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향후 작품에서는 조금 더 큰 감동이 담겼으면 하네요.



(4) 미돼새 - How Can I Lose (2020.10.15)


 미돼새는 2016년부터 랩을 시작했다하고 그의 사운드클라우드 계정엔 세 개의 믹스테입이 올라와 있지만, 아마 대개는 Paloalto가 7interview에서 추천하는 신인으로 얘기했던 것 때문에 처음 이름을 들어봤을 겁니다 (Paloalto는 미돼새의 작년 트리플 싱글인 "YACHT"에 참여하기도 했죠). 그리고 이건 스트리밍 사이트 기준, 1년이 넘는 시간만에 발표되는 그의 신작이자 트리플 싱글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의 음악을 제대로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여러모로 안정된 랩 스킬과 오토튠이 일단 귀에 들어옵니다. 가사도 한글을 주로 사용하여 하고자 하는 얘기를 확실하게 전달하는게 안정적이라고 받아들여집니다. 이렇듯 안정감이 여러모로 발현되기에, 전체적으로 그에게 흠잡을 데는 없습니다. 다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지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랩을 잘하긴 했는데, 개성을 얘기하라고 하면 솔직히 할 얘기가 많이 생각나지 않는군요.


 어쨌든 그가 어떤 음악을 하는지 더 알고 싶은 호기심 정도는 생기게 하는 음반이었습니다. Paloalto가 그의 랩에서 무엇을 봤는지는 조금 더 많은 추후 작업물에서 확인해야할 것 같습니다. 기대와 동시에, 이 정도로 끝날까 우려가 되는 면도 없잖아 있군요.



(5) Icey Blouie - 555 (2020.10.15)


 STAREX 크루의 Icey Blouie가 발표한 새 EP입니다. Icey Blouie는 STAREX 컴필에서 개인적으로 재발견이 없었던 멤버 중 하나였습니다. 클라우드 랩이라고 하던가요? 발음, 박자, 톤 등 면면에서 흐리멍텅한 느낌을 풍기는 걸 키 포인트로 하는 그의 음악은 저의 취향과는 정확히 반대편에 있습니다. 그래서 노선을 바꾸지 않은 다음에야(?) 제가 주관적으로 그의 음악을 좋아하게 되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555"는 눈에 띄는 점은 몇 가지 있는데, 전작 ("SAVE WORLD 2020")에 비해 앨범의 색깔이 명확하게 잡혀있단 점입니다. 사귀던 사람과 차이고 다가온 우울 속에 만들어진듯한 노래들은, 했던 얘기를 또 하는 감은 있지만 (실제로 같은 가사도 종종 재활용되고) 그래도 그가 하는 음악의 색깔과 매우 잘 어울리는 듯했습니다. 가사에 코데인, 마리화나, 자낙스 등이 자주 등장하다보니 약기운에 취한 듯한 느낌을 배가시켜주는 면도 있습니다. 그외에, 개인적으로는 Laptopboyboy가 이런 비트도 찍는구나 하고 재발견하는 면도 있었습니다.


 그가 해오던 음악과 잘 어울리는 옷을 입었기 때문에, Icey Blouie를 좋아하던 분이라면 이번 음반이 표현하는 감성에 흠뻑 젖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어울리는 옷이라 해서 이대로만 가면 쉽게 질리긴 하겠죠. 앞으로도 본인의 매력을 발산할만한 여러 스타일을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6) 개리 - 2020 (2020.10.15)


 개인적으로는 거의 은퇴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던 차에 개리가 새 앨범을 발매했습니다 - 앨범 단위로는 5년만이군요. 여러 비트메이커가 참여했지만 특히 DJ Spray가 주축이 되어준 걸로 보입니다. 결론부터 말해서 예상했던 정도의 내용물이 있었습니다. 더 이상 개리가 힙합씬에 무엇을 하겠다고 신경을 쓰진 않으리라 생각하고, 랩을 연구한다든지 할 위치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고 생활이 안정을 찾아가면서 유순해진 스타일이 음악에 반영되었고, 그에 따라 랩에서 느껴지던 파워나 아우라 같은 건 많이 죽었습니다. 특히 네 곡 중 세 곡이 전형적인 1랩 1보컬의 구성과 간편한 내용, 팝적인 코드로 이루어져있어 소위 '가요 랩'으로 느껴지고, 이건 "바람이나 좀 쐐", 아니 리쌍 시절부터 그래왔기 때문에 이제 와서 호들갑 떨 필요는 없는 부분입니다. 


 해서 많은 이들에게는 개리가 오랜만에 앨범을 냈다 이상의 의미는 크게 가져가지 못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리스너 쪽에서도 마찬가지로 마음을 비우고 듣는다면 문제 삼을 부분은 없습니다. 뭐가 됐든 가사와 플로우는 다소 빛이 바랬을 뿐 개리스러움은 느낄 수가 있긴 하니까요. 팬들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경험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7) 최엘비 - CC (2020.10.16)


 "CC"는 대학 생활에 기반을 뒀을 수밖에 없을 제목 때문에 작년 1월에 나온 정규 앨범 "오리엔테이션"의 후속작이라고 추측케 합니다. 결론적으로 본작은 "오리엔테이션"과 눈에 띄는 연결점은 없습니다. 만약 연결점이 느껴졌다면 그건 최엘비가 만들었다는 공통점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이 앨범은 값진 작품입니다.


 예상대로 "CC"는 사랑 노래로 채워진 앨범입니다. 그래도 많이 너그러워졌지만(?), 아직도 사랑 노래로 가득 채운 힙합 앨범이란 것은 어딘가 찜찜한 데가 있는 표현입니다. 대중성을 노릴 때 제일 먼저 택하는 소재이기도 하거니와 주제가 단일화된다는 것은 앨범의 색깔도 단조롭게 만들기 일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은 최엘비의 표현력입니다 - 솔직하게 말해, 잘 들었던 "오리엔테이션"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감흥이었습니다. 간단하게는 풋내기 사랑 얘기가 너무나도 디테일하고 진솔하게 적혀서 제가 가진 찌질한 사랑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끌어내기 때문일 겁니다. 아마 그 시절 제가 이 앨범을 들었으면 아마 바닥에서 눈물을 질질 짜며 꿈틀거리며 들었을 것 같군요.


 좀 더 구체적으로, 앨범의 트랙은 모두 사랑 얘기이지만, 일차적으로 다루는 소재는 다양합니다. 첫 트랙은 자신의 강박적인 성격, "구름구름"은 흡연, "비가와"는 맥북을 망가뜨린 사연 (쇼미 때 이미 이런 곡을 쓸걸 염두에 두고 만들었을까요?) 등등. 표면적으론 다른 얘기를 하다 깊이 들어가 사랑과 연결시키며 주제를 발전시키는 글의 흐름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전체 서사에서 "결혼소식"에서 제일 다운되었다가 "아님 말고"에서 본격적으로 훌훌 털어내는 듯한 마무리 (보너스 트랙이 보너스 트랙다운 위치에 있으면서 이야기를 완결하는 번외편 역할을 하는게 정말 좋았습니다)도 인상적입니다. 한없이 슬프고 감정적이 될 수 있는 경험에,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적당한 유머와 돌려 말하기를 통해 앨범이 돌아가는 내내 단조로움을 느끼지 않게 한 것은 최엘비의 필력이 이룬 성취라 할 것입니다.


 이야기가 중심이 되다보니 프로덕션은 조금 힘을 뺀 느낌이 있습니다. 다양한 프로듀서가 참여했지만 통일성을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단순한 비트를 제공, 비트가 이야기에 끼어드는 것을 최소화했다 생각합니다. 최엘비의 랩도 가사를 안 봐도 듣는데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로 전달력이 좋고요. 다만 이는 바꿔 말하면 음악적으로는 무난무난한 수준에 머물렀단 뜻이기 때문에 감질맛 이상은 못 느끼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오리엔테이션"에서 "사랑+실수=증오"가 베스트 트랙 중 하나였기에 이런 격앙된 곡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지 않은 것이 앨범의 장점과 단점을 상징할지도 모르겠군요. 위에서 사랑 얘기만으로 채우는 단조로움을 극복했다 했지만, 어쨌든 다른 앨범보다 하는 이야기의 폭이 좁았던 건 사실이니까요.


 음악적인 뭔가를 바란다면 다소 심심한 앨범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뭐, 애초에 최엘비가 랩 테크니션은 아니니 큰 문제는 아니지 않을지요. 그런 이야기에 덜 집중하게 되서인지, EP나 "쇼미더머니" 같은 데에서의 모습은 큰 감흥 없이 다가오는데, 정규 앨범에서만큼 최엘비다운 매력을 제대로 뿜어내는 거 같습니다. 특히 본작 같은 스토리텔링은 제가 한국 힙합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8) 조광일 - 암순응 (2020.10.16)


 근래 들어서는 비슷한 사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곡 하나로 붐업된 신인 조광일. 8ladin, S section 등의 이름으로 활동을 했던 적도 있는 모양이지만 스스로도 작년에 낸 "Grow Back"을 진짜 커리어의 시작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Grow Back" 당시 Pinto Sound라는 크루는 아마 현재 소속 레이블인 Dippin' Calz Records의 전신이었으려나요.


 조광일은 엄청난 관심과 비례하여 수많은 비난을 몸에 받았던 래퍼입니다. 이미 "곡예사" 때부터 이러한 논란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가장 단순하게는 한물 갔다고 평가 받는 속사포를 정면에 내세웠다는 점 때문이었죠. 허나 속사포 랩은 지금도 여러 래퍼가 즐겨 쓰는 스타일입니다 - 당장 Justhis만 봐도 생각보다 자주 속사포를 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조광일의 논란은 좀 더 근본적으로 그의 랩 실력에 대한 판단에서 기원했다고 생각합니다.


 "암순응"에서 조광일은 기존의 스타일을 고수합니다. 앨범에서의 모습은 분명 그간 싱글들에서 보여줬던 모습보다 개선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속사포에 집중하다 박자가 무너지는 경우는 많이 줄었습니다 - 위에서 말한 '실력에 대한 판단'의 근거 중 일부였죠. 이는 그의 완급 조절력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걸 보여줍니다. 속사포만으로 앨범을 채우는 것에 대해 우려가 많았고, 그 생각이 변치 않은 이들도 많으나 앨범 전체로 보아도 저는 이 정도면 충분히 잘 컨트롤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덴티티를 잃지 않는 선에서 속도나 톤의 강약 조절을 통해 강조점을 두고, 감정 전달도 효과적이었던 것 같아요. 적절하고 다양한 비트 초이스도 한몫 했고요. 만약 천편일률적으로 느껴졌다면 그건 랩보다는 내용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신념을 확실히 밝히는 건 좋지만 선택하는 단어나 표현이 다소 반복적이더군요. 랩 테크니션에게 가사는 덜 중요할 수 있으나 분명 본인이 메세지를 버린 쪽이 아니기에 무시할 수 없는 부분 같습니다.


 여전히 특유의 파열음을 동반한 발음은, 사실 속사포 래퍼에겐 치명적인 부분입니다. 이미 빠른 속도로 떨어진 가사 전달력을 더 저해하는 요소이기 때문이죠. 이는 단순히 단점이 아니라 그냥 본인의 개성으로 봐야할 것 같기도 하지만, 호불호가 어느 쪽으로 갈릴지는 생각해봐야할 문제입니다. 더불어 강하게 목소리를 내길 좋아하지만, 톤이 비교적 얇고 발성이 단단하진 않아서 의도한만큼의 폭발력이 잘 안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어느 정도 여러 무드와 시도가 있어 이 부분은 앨범에서는 조금 가려집니다.


 뭐가 됐든 본작을 이 시기에 낸 것은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많은 래퍼들이 관심이 쏟아지는 시기에 안주하다 활발한 활동을 펼치지 못하고 전성기를 지나보내는 걸 보아왔습니다 - 코로나19 사태가 이런 빠른 정규 발매에 영향을 끼쳤으려나요. 완전히 여론을 못 뒤집을지언정 "암순응"은 그런 지대한 관심의 순풍을 타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입니다. 또 앨범이라는 큰 프로젝트에서 크게 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줘, 일회성 뮤지션이 아닐 가능성을 입증했습니다. 속사포 랩은 호불호가 많이 갈리지만 속사포 자체가 잘못인 건 아닙니다 - 결국 좋은 음악은 그런 걸 가리지 않으니까요. 막 커리어를 시작한 래퍼에게 이 정도의 이정표는 향후 좋은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전망을 약속하기엔 적당하다 생각하며, 현재의 자세와 열정을 유지하여 앞으로도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랄 뿐입니다. 



(9) PULL UP 22 - Black Ice 2 (2020.10.16)


 아마 힙합엘이 국내 게시판의 단골이 된지 좀 된 분이라면 PULL UP 22의 이름이 낯설지는 않을 것입니다 - 어그로 홍보꾼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GGM RECORDS의 앨범에 피쳐링 참여한 것 때문에 알게 되었지만요. PULL UP 22는 작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트랩 래퍼로, 별다른 소속은 없어보이지만 (어그로 홍보글에 로열 갱 어쩌고 하던데 왠지 신뢰가 안 가는 글이라...), Potty Monkey에게 곡을 써주는 ICECREAMTRUCK이 이 사람이란 말은 보았네요. 나름 왕성한 작업 활동을 하고 있어 2월 첫 앨범 "PULL UP 22" 발표 후 벌써 세 번째 앨범이며, 곡 수부터 17곡이라는 위용을 자랑합니다. 마침 Goretexx가 Jimmy Paige로 오랜만에 이름을 바꿔 참여했다길래 겸사겸사 처음 감상해보게 되었습니다.


 PULL UP 22는 비교적 흔한 트랩 래퍼입니다. 싱잉 랩을 기본으로 한 mellow한 바이브의 트랩이며, 가사에 마약이나 총, 경찰 같은 미국 힙합 요소들이 자주 사용된다는 점에서, 콜라보했었던 GGM RECORDS와 비교할만한 스타일이라 할 수 있겠군요. 사실 그의 대부분의 특징은 '흔한 스타일'이라는 걸로 후려치는게 가능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어보면 장점은 있습니다. 첫번째로 이런 류의 트랩 스타일이 흘러가듯 듣는 쪽이다보니 자연스럽게 귀를 잡아끄는 멜로디 메이킹이 필요한데, PULL UP 22가 그런 능력을 가졌단 것. 이 역시 GGM과 비교할만 하지만, 톤이 좀 거칠어서 GGM과는 다른 맛을 줍니다. 플로우에 있어서도 너무 지루하지 않게 자주 변화를 주고, 비트도 일정한 틀이 있긴 하지만 앨범의 진행에 따라 그 안에서 나름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 없이 듣는 음악이라 했지만, 랩을 쓰는데는 나름 고민을 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도 뜻을 알고 쓰는지 알 수 없는 한글과 영어가 뒤섞인 트랩 곡과 달리 나름 가사에 한글, 영어가 균형 있게 섞여있고 내용도 알아듣기 쉽거든요. 특히 느낌 있단 이유로 본인이 감당치 못하는 수준의 영어를 번역기 돌려가면서 쓰는 세태를 상당히 싫어하는 저로썬, 영어가 얼추 맞는 것도 좋지만 한글로 마찬가지의 느낌을 낸다는 점을 크게 환영했습니다.


 다만 이 분야 곡들에 비해서도 후렴이 상당히 길다고 느낀 건 저 뿐인지 모르겠군요. 트랩 치고는 긴 3-4분의 곡들이 많은데, 이런 곡들이 짧지 않은 훅을 여러 번 반복해서 돌리면서 늘어난 길이다보니, 곡 구성의 가성비가 그리 좋진 않다고 느꼈습니다. 멜로디, 플로우 짜는 실력으로 훅 메이킹도 좋게 했지만 그래도 살짝 너무 나갔달까요. 그래도 이런 장르의 팬이라면 이 정도 이상의 흠을 잡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는 그렇진 않다보니, 범람하는 트랩 래퍼 사이에서 저 정도면 차별화를 시키는데 충분한지 확신은 들지 않습니다. 그래도 본인 작업을 허투루하는 래퍼는 아닐 거 같아, 어그로 홍보 때문에 기분 나빠 무시할 것까진 없다는 믿음이 드는군요.



(10) Fisherman - The Dragon Warrior (2020.10.18)


 워낙 음악을 섬세히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진 저에게 인스트루멘탈 앨범은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게 최고의 인스트루멘탈 앨범을 묻는다면 주저 않고 Fisherman의 "Well Being"을 고르겠습니다. 오직 무지 때문에, 인스트루멘탈로는 감동을 받지 못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저의 생각을 산산조각 내고 그야말로 욕을 내뱉게 한 앨범이 바로 "Well Being"이었죠. 그래서 새로운 작품, 그것도 정규 앨범이 나왔다는 소식에 기대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목부터 참 신박합니다. "용의 전사"라니요. Fisherman하면 떠오르는 포근한 감성과 어떤 수로 연결을 시켜야할지 난감합니다. 결국 앨범에서 이에 대한 많은 설명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상상력을 가동시켜야 하지만, 저는 아직 감이 잡히진 않네요. 다만 bluc 님이 쓴 앨범 소개글의 설명 '절대적 가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란 설명도 그럴 듯해보입니다.


 Fisherman하면 떠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특유의 악기 소리 변형입니다. 특히 몽글몽글하게 뭉쳐놓은 피아노 소리는 거의 트레이드마크죠. 이번 앨범도 가만 내버려둔 악기가 없습니다. 잔뜩 누르고 굴리고 뭉쳐서 특유의 몽글몽글한 느낌이 들고, 이걸 스타카토로 연주해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히는 감성을 전달합니다. 정말 그의 전매 특허라고 할만한 스타일입니다. 또한, 소리의 배치도 기가 막힙니다. 좌우를 넘어 앞뒤, 가깝고 멈을 오가는 배치는 음악으로 만드는 사운드스케이프를 실제적인 3차원으로 만들어줍니다 - 아무리 바빠도 반드시 두 귀로 들어야하는 음악입니다.


 기본적으로 "Well Being" 때랑은 다른 전략을 취한 앨범입니다. "Well Being"은 하나의 악기 (주로 피아노)가 주축을 이뤘는데 "The Dragon Warrior"는 여러 악기의 오케스트라가 주된 그림입니다. 보컬 피쳐링이 훨씬 많은 것도 그것의 일환일지 모르겠습니다. 피쳐링진들은 저마다 좋은 목소리를 안겨주었지만, 사실 Fisherman의 음악과는 이질적인 느낌이 많아서 (이런 감각의 음악이라면 인간의 목소리로 매칭하긴 쉽지 않을 거 같긴 합니다) 마냥 반갑진 않았습니다. CD2에는 이 곡들의 인스트루멘탈이 수록되어있는데, "(instrumental)"이라는 표시가 없는 걸 보면 Fisherman도 보컬을 필수적 요소로 보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목소리가 빠진 상태에서도 빛이 나는 곡들입니다.


 좀 더 적절한 표현으로 이 앨범의 가치를 설명하고 싶지만 아는게 없어서 못 하는게 아쉽습니다. 기대치가 너무 "Well Being"으로 맞춰져있다보니 놀라운 멜로디 전개와 피아노 음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번 앨범에 적응하는데 시간은 좀 걸린 거 같습니다. 그래도 Fisherman의 놀라운 능력을 확인하는 데는 매한가지로 값진 작품입니다. 단언코 인스트루멘탈에 익숙치 않은 저에게도 인스트루멘탈로 계속 작품을 내줬으면 하는 비트메이커입니다.


  밀렸던 감상 싹 다 하기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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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0-10-28 23:46:55

조광일은 그 특유의 파열음 때문에 듣다 꺼버리게 되더라고요.

Updated at 2020-10-29 00:23:58

조광일이라는 인물의 등장이 개인적으로는 아주 반갑습니다.
새로운 사운드에 대한 연구 끝에 독보적인 무언가를 만들었다는 점은 굉장히 높이 삽니다.
다만, 그간 일부의 트랙에서는 지나친 텅트위스팅덕에 그루브를 느끼기 힘든 랩이 있었다는건 부정 못 하겠습니다.(특히 '막말'이 그러했다고 생각합니다.)
반감을 느끼는 분들이 많은 이유도 공감이 가요.

그래도 암순응은 최근 들었던 앨범 중 가장 메세지있는 앨범이었다는 점을 아주 높이 사구요, 이전에 지적받아온 단점들을 많이 보완되었다 생각됩니다.
(4번 트랙부터가 진국이라고 생각..)

개인적으로는 올해 좋게 들은 앨범들 중 하나입니다.
다만, 곡예사 리믹스는 차라리 싱글컷으로 나왔으면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앨범 전체적인 흐름에 방해된다고 느껴지기도 하고, 여운을 남기는 마무리였으면 좋았겠다는 생각..

앞으로가 더욱 기대가 됩니다.

WR
2020-10-29 22:43:45

개인적으로 "곡예사" 때는 환영하는 신인이었는데, "한국" 때부터 너무 같은 걸 한다 싶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막말"은 말보다는 랩으로 멋부리기만 하려다 망했다는 느낌.


곡예사 리믹스는 보너스 트랙이라고 안 적혀있을뿐 보너스 트랙이 맞다고 생각을 해서

아예 전체 흐름에서 고려를 안 했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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