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렸던 감상 싹 다 하기 프로젝트 pt.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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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3 23:15:38

리뷰라기보다는 일기장에 쓸만한 글을 옮겨왔다는 느낌으로 적어보는 앨범 소감문입니다.

우왕 100번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들을 앨범은 너무 많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상: 

적어도 세 곡 이상의 앨범.

내가 아는 / 어디서 들어본 아티스트 + 뭔가 지나가다가 추천 받거나 들어주세요! 했던 거라든지... 그런 앨범들


주의:

음알못. 특히 사운드알못.

붐뱁충.



(1) kitsyojii & Leebido - Buck Foys (2020.9.7)


 LBNC의 두 래퍼가 콜라보하여 낸 앨범입니다. Leebido의 경우는 HD BL4CK과 낸 앨범에 이어 두 번째 콜라보 앨범이기도 하군요. 예상대로 둘의 조합에서 더욱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kitsyojii입니다. 여전히 그의 랩은 발칙하고 유쾌하며 거침 없습니다. 특히 훅 메이킹 실력은 더욱 물 올랐다고 느껴집니다. 예전 곡들보다 덜 장황하고 포인트를 주어 기억에 훨씬 쉽게 남게 한 듯합니다. 


 Leebido의 경우 생각보다 kitsyojii 스타일에 잘 묻습니다. 본래 건조한 트랩 랩을 뱉던 것만 생각이 났어서 이렇게 멜로디컬한 싱잉 랩을 세게 구사할 줄은 몰랐네요. 가사 어조도 kitsyojii 스타일의 독특함을 생각하면 꽤 어울리게 방향을 잡았습니다. 다만 너무 맞춰간 것 같다는 생각은 드네요. 예를 들면 Leebido가 다음 앨범을 낸다면 과연 이런 음악을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반면, 그래도 Leebido가 있었기에 "내가 걸레가 된 이유"나 "걍" 같은 무드의 곡도 수록된 걸까 싶기도 합니다.


 kitsyojii는 여전히 재능을 가감 없이 발휘 중이고, 그가 이름을 바꾼 후 낸 작품은 언제나 인상적인 것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전곡 프로듀싱을 맡은 HOMEALONe의 비트도 서포트를 잘 해주었고요. Leebido 역시 괜찮은 케미를 보였지만, Leebido 솔로에 대한 기대는 아직 되지 않는게 좀 아쉽습니다. kitsyojii의 팬이라면 추천하는데 망설임이 없겠지만..



(2) Kim Fuji - Ordinary Boy (2020.9.7)


 Kim Fuji는 별다른 기록도, 소속 크루도 없는 말 그대로 '쌩신인'인 래퍼입니다. 이런 그의 믹스테입을 처음 알게 된 계기는 힙합엘이 게시판에 아주 약간 어그로성 제목을 단 홍보 글을 올린 것이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지만 전 게시판에서 홍보글, 광고글을 삭제하고 있기 때문에 은근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내용이 정성이 있어서(?) 지우지 않았던... 그리고 그후 어떤 분이 DM으로 들어보길 추천해주셔서 들어보게 되었네요.


 당시 그 '홍보글'에서 Kim Fuji는, 본인이 수퍼 루키가 될 줄 알았지만 보잘 것 없는 자신을 확인 후 음악을 취미로 하기로 하는 과정을 담은 (말 그대로 'ordinary boy'가 되는 거겠죠) 앨범이라고 적었습니다. 듣기 싫으면 가사라도 봐달라며, 가사에 상당한 공을 들였음을 직간접적으로 강조하였죠. 그 말대로 "Ordinary Boy"에 실린 가사는 얕지 않습니다. 변해가는 주변 환경에 대한 자신의 반응과 감정의 추이를 매우 디테일한 언어로 표현하여, 흡사 허심탄회한 대화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인상적인 펀치라인도 꽤 보이고요 - "CREAM CHEEZE BAGEL"이라든지, "내 인생은 불우까지고 마블은 없었다"라든지...


 그리고 "Ordinary Boy"는 메세지에 대부분의 메리트가 치우쳐있는 앨범이기도 합니다. 이는 치밀하게 짜인 가사를 봐도 그렇지만, 5분 대의 곡이 세 개나 있다는 점을 봐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운드 위주의 트렌드로 흘러가는 이 씬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풀기 위해 긴 시간을 할애하는 경우가 드물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점은 Kim Fuji의 강점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 5분 대의 곡을 언급 안 하더라도 다른 곡들도 대부분 짧지 않고 가사의 밀도가 높은 편이라 더욱 길게 느껴지죠.


 문제는 그 길이를 청각적으로 끌고 갈만큼의 몰입감이 있느냐인데, 이 부분은 약합니다. Kim Fuji의 하드웨어는 괜찮다 느껴집니다. 탄탄한 발성을 기반으로 잡혀있는 톤, 딜리버리에 적당한 발음 등, 기본적으로 갖고 있을 건 다 갖고 있죠. 문제는 리듬의 설계인데, 나름 신경 쓴 구석이 보이나 대개는 의도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한 가지 예로, 문장을 두세 토막으로 모아서 툭툭 던지듯 랩하는게 있는데 (말로 하려니;;) 이게 오히려 박자 저는 느낌도 나면서 역효과가 나는군요. 그저 얘기하는듯한 톤 운용도 그렇습니다. 이것도 자연스럽게 얘기하는 톤이면 모르겠는데, 와중에 목소리에 힘을 주고 있으니 그냥 한 가지의 목소리로 딱딱한 랩을 하고 있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로 인한 결과로 긴 노래들은 정말 그 시간 동안 긴 독백을 듣는 인상을 받으며, "깨끔발 블루스"의 훅 같은 그루브가 중요한 부분은 잘 살지 못합니다.


 왠지 직업으로써의 랩은 버린다고 했던 사람의 앨범을 끌어내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하는게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제 경험상 취미로 한다고 해서 창작욕이 줄어들진 않더군요 (...). 하드웨어를 갖춘 것만 해도 기본 밑천은 있는 거라,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지, 돌아오긴 할지는 몰라도 조금 더 다듬어서 멋진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3) Haeil - 내가 잠들지 못하는 다섯 가지 이유 (2020.9.6)


 Haeil은 E.viewz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R&B 보컬 겸 작곡가입니다. 스트리밍 사이트에서만 확인되는 첫 활동이 2016년이고, 케이팝 작곡가 및 중국에서의 활동 등 여러 이력이 있는 걸로 보아 신인이라 말하기도 어렵겠지만 여튼 저는 처음 접하는 아티스트네요. Sony Music에 합류 후 올해 여름까지도 E.viewz란 이름을 썼던 것 같지만 이번에 (본인 말로는 '공부하는 시기'를 마치고) 이름을 Haeil로 바꿔 첫 EP를 발표한 것입니다.


 불면증, 혹은 잠을 방해하는 온갖 고민들을 소재로 만든 앨범이기에 전체적으로 chill한 분위기에서 앨범은 진행됩니다. 여기에 맞춰 Haeil의 보컬은 나른하다가 후렴이나 브릿지에서 악기가 추가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다시 떨어지는 구성이군요. 나른한 무드에 조화롭게 어울리는 전환이 마음에 듭니다. 개중에 "도깨비"는 이런 분위기와 대조적인데다 피쳐링한 sokodomo가 워낙 인상적이어서 튀는 트랙이네요. R&B는 깊은 감상을 못 하는 데다 취향이 촌스러운 탓에 이 정도 감상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나른함이 제 취향은 아니긴 했습니다. 그래도 새로이 알게된 아티스트이니 일단은 반갑네요.



(4) seeherwave - Herly Tour (2020.9.9)


 seeherwave는 Greenn, KUDI, junwhi, coldcandy로 이루어진 크루입니다 - 앨범의 전곡을 프로듀싱한 coen이 멤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앨범 커버엔 네 명만 그려져있네요. 과거 이 시리즈에서 다룬 Jay Greenn 때도 잠깐 언급을 했고, 그 Jay Greenn은 이번에 Greenn으로 이름을 바꿔서 참여했습니다. 나머지 멤버들도 각자 활동을 이어왔으며, 특히 coldcandy는 "BAD CHANNEL"이란 팀 활동도 따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앨범으로 판단하는 seeherwave의 색깔은 Greenn의 "greennvinyl" 감성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둡지 않고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코드의 싱잉 랩을 근간으로 해서 일상적인 소재 - 주로 연애 이야기를 소재로 풀어내고 있죠. 클리셰에 빠지기 쉽지만 각자 가사 표현이나 라이밍에 있어 허투루 쓰지 않은 흔적들이 보이며, 이 역시 "greennvinyl"에서 느꼈던 것들입니다. "greennvinyl" 얘기를 할 때 pH-1 또는 Crucial Star와 같은 맥락에 있다고 얘기했는데, 이번 앨범도 그렇게 얘기해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


 멤버들은 실력과 스타일의 큰 차이 없이 각자 기량을 담아냅니다. 듣기 불편한 멜로디가 없고 각자 간의 톤 차이도 약간은 있습니다. 하지만 크게 보아서는 사실, 앨범 자체가 하나의 색으로 너무 귀결되는 듯했습니다. 자꾸 "greennvinyl"과 비교를 하는게 무안하지만 그 앨범보다 다양한 색은 부족합니다. 이는 컴필레이션이기 때문에 하나의 색으로 통일했기 때문일 수 있고, coen이라는 비트메이커가 총 프로듀싱을 맡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멤버들 각자의 퍼포먼스를 봐도 부르는 멜로디의 코드, 가사의 질감, 플로우의 리듬 등이 전부 비슷비슷합니다.


 청량감 있는 빠른 템포의 "Summer Pop"이나, 찐한 레트로 신스를 추가한 "얼음땡" 등이 다 다르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느낌으로 귀결되는 것은 멤버들이 이번 앨범에서 보여준 폭이 좁다는 뜻이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비슷한 랩이 첫번째, 두번째, 그리고 세번째 벌스까지 이어지다보면 곡이 끝나기 전에 질리는 느낌이 조금은 있더군요.


 각자의 기량이 평균 이상은 되기 때문에 노래를 하나씩 떼놓고 보면 어디가 잘못 되었다고 집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seeherwave의 색을 분명하게 보여줬다고 할 수도 있겠고요. 뭐가 됐든 "greennvinyl" 당시 음악을 그만둘 수도 있다고 암시했던 것의 반대로 Greenn의 새로운 작품을 본 건 반가웠습니다. 이번 앨범은 의도적으로 그들의 한 면만 선보인 것이며 다른 모습도 앞으로 보여주기를 바라봅니다.



(5) 도니모리 - ADDICTION (2020.9.11)


 도니모리는 작년부터 작업물을 내기 시작한 뮤지션입니다. 본래 랩과 비트메이킹을 겸하고 있으며, 이 시리즈에서 한 번 다룬 적 있는 Young Ill과는 랩 레슨으로 이어진 사이라고 하더군요. 그가 낸 과거 곡들을 들어보면 어둡고 불친절한 기운이 감지됩니다. 그런 그가 인스트루멘털 앨범을 냈고, 예상했다시피 눈치 보지 않고 만들어진 앨범입니다.


 글을 연재하면서 노이즈를 활용한 여러 인스트루멘털 앨범을 접했고 "ADDICTION"도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트랙부터 귀를 후벼파는 고음이 강렬한 인상을 안기면서 시작되며, 이런 분야의 음악이 늘 그렇듯 강하고 묵직한 타격감의 비트와 함께 진행됩니다. 이런 난해한 음악을 감상할 깜냥은 여전히 안 되지만, 듣는 재미 중 하나는 전혀 음악적이지 않은 소스를 가져와서 음악인 척(?)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여기엔 여러 노이즈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보컬 소스 (본인의 시그니처 사운드도 예외가 아닙니다)를 활용한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곡들은 대개 2분 내외로 짧아 하나하나 굵고 짧은 인상들을 남깁니다.


 말을 하지 않는 앨범을 논하는 건 여전히 저 같은 음알못에겐 어려운 일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그런 소스들을 헤아리면서 여운 아닌 여운을 느낀 앨범이었습니다. 최근 들은 앨범 중에는 Jasin (aka mtclu)의 "Power of Tower"가 잠깐 떠올랐네요. 후에 랩 앨범으로 돌아와 조금 더 이해가 쉬워지면 다시 들어봐야겠습니다ㅎ



(6) Khakii - THE SUMMER RUSH (2020.9.11)


 Khakii는 WAVY가 설립된 후로 첫번째로 영입된 래퍼였죠. 앞서 발표한 두 개의 싱글이 나쁘지 않은 인상을 남겼던 가운데 처음으로 발표된 앨범 단위 작업물 "THE SUMMER RUSH"입니다. 이전 싱글을 만들었던 Stally 외에 APRO, Beautiful Disco 등이 프로듀서로 참여하였는데요, 공통적으로 일렉 기타 또는 베이스 세션을 사용해 밴드 느낌을 잘 섞은 비트가 Khakii의 중저음 목소리와 잘 어울리는 듯합니다. 이는 Khakii의 딱딱한 듯 부드러운 고급스러운 플로우와 잘 맞물립니다.


 다만 이번 기회에 Khakii의 랩을 계속 듣다보니, 특유의 느낌이 잠깐잠깐 어설프게 들리는 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발음을 흘리는게 아니라 단순히 새는 것처럼, 레이백을 하는게 아니라 저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이랄까요. 그럴때면 여지 없이 Khakii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평범하구나 느끼곤 했습니다. 그래도 이러한 잠재적인 약점을 이펙트나 비트로 커버를 하면서 앨범을 잘 끌고 간 것 같습니다. 일단 이번 EP까지는 "Lazy" "Bass"에서 받은 감흥을 잘 이어간 것 같습니다. 좀 더 재밌는 걸 뽑아낼 수 있을지는 아직 지켜봐야할 것 같네요.



(7) D.I.D. - Death in Debt (2020.9.11)


 "Death in Debt"는 Newchamp 2집에서 이미 예고되었던, Newchamp의 새 크루 D.I.D.의 컴필레이션입니다. 이 크루는 Newchamp 본인 외에 Jegal Jin, Own Racks, Occasio로 이루어져있으며, 호서전문예술대학에서 교수와 제자 신분으로 만났다가 크루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랩 레슨을 받는 사람이 스승의 스타일을 답습하게 된다는 건 편견입니다. 랩 레슨은 자기 스타일을 상대에게 덧씌우는 작업이 아니고 기초를 잡아주는 것에 좀 더 초점이 맞춰져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D.I.D.의 넷은 꽤 많은 걸 공유합니다. 무엇보다도 Newchamp하면 떠오르는 '양아치스러움'을 근간에 깔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셋은 적당히 흘리는 발음과 공격적인 단어, 도발적인 메세지로 무장하였습니다. 재밌는 건, Newchamp가 참여한 곡과 참여하지 않은 곡의 분위기가 꽤 뚜렷하게 나뉜다는 것 - 후자에선 좀 더 트랩 스타일의 오토튠 싱잉 랩이 빈번히 나타납니다. 하지만 여튼, 근간은 같습니다.


 2집 수록곡 "장첸 2020" "목숨 전당포"가 재수록되었듯, 결과적으로 Newchamp 2집에서 보았던 그 분위기가 "Death in Debt"에서도 다시 연출됩니다. 넷은 나름 통일성 있게 분위기를 끌어가면서도 각자 조금씩 차이나는 톤과 랩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허나 들을수록, Newchamp가 가진 짬은 이런 거구나 하는 비교가 되는 건 저뿐일까요. 기본적으로 셋은 Newchamp처럼 목소리가 꽉 차있지 않아 타격감이 덜합니다. 여기에서 풍기는 악인의 이미지 (기믹으로나 음악적으로나)는 클리셰적인 장치들이 많아 크게 듣는 재미를 주지 못합니다. 멤버 중 Jegal Jin은 Newchamp와 목소리가 제일 비슷해서 개성 면에서 제일 큰 타격을 입어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어 랩 비중이 꽤 큰데, 딱히 영어로 랩을 해서 이득을 볼 정도의 영어 실력은 아니라고 생각되더군요...


 나름 다양한 분위기 (위에서 말했듯 Newchamp가 참여하지 않은 곡을 중심으로)를 연출하려 했지만 수록된 12곡 내내 비슷한 칙칙한 분위기가 이어지며, 끝까지 몰입시킬만한 매력은 부족해보입니다. 이는 이제 막 시작한 신인들임을 감안할 때 어쩔 수 없는 부분일지 모르겠지만, 앨범이 나온 이상 현재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일이죠. 컴필레이션은 D.I.D.를 소개하는 역할 정도로 하고, 각자 독자적인 작업을 하면서 맞는 옷을 찾아볼 시기 같습니다. 왜인지 이번 컴필레이션은 Newchamp의 입지를 고려하더라도 지나치게 외면 받고 있는 점은 안타깝지만, 후에 찾아올 모습은 더 새롭고 발전되있으면 좋겠습니다.



(8) 한요한 - 올인 (2020.9.12)


 한요한의 새 앨범이 나올 때마다 저를 비롯한 몇몇 사람은 자기복제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전작 "원기옥"은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는 데는 도움이 전혀 안 되었으니까요.


 최근 대외적인 활동을 많이 줄인 탓에 상당히 오랜만이라 느껴지는 이번 EP는 다행히 우려를 더 키우진 않았습니다. 자기 복제의 중요한 축(?)이라고 얘기되는 Minit이 4곡 중 2곡에 참여했고, "떠나버려"는 실제로 곡이 시작하자마자 후렴이 들리는 듯한 전형적인 곡이었지만, 적어도 나머지 세 곡은 조금 다른 어프로치를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또 하나의 Minit 프로듀싱인 "올인"은 늘 등장하는 후렴 전 빌드업이 비트에 있었지만, 전과 달리 '두구두구두구'의 느낌은 약합니다. 비트 자체가 너무 속도감을 강조하지 않았고, 한요한과 Paul Blanco가 벌스에서 적당히 파워를 조절했으며, 후렴도 깔끔하게 마감한 덕택인 거 같습니다.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로 남은 이번 EP를 들으면서, 한요한의 자기 복제 논란은 단순히 프로듀서를 바꿔야 되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Minit 앨범을 들으면서도 떠올랐던 생각이죠. 락스타란 이미지에 매몰되어 너무 비슷한 느낌의 바이브만 고집한다든지 (예를 들어 무조건 일렉 기타를 쳐대며 달리는), 막무가내인 라이프스타일과 스웩을 버무린 지나치게 단순한 가사 표현이라든지 투박한 보컬 등, 결국 문제는 비트보다 한요한에게서 나온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방금 언급한 세 가지 중 뒤의 두 가지는 한요한의 아이덴티티이기도 해서 그냥 부정하는 것도 답은 아닌 거 같군요. 뭐 어쨌든 이번 EP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한 것만으로 상당히 고무적이라 느낍니다. 다음 작품도 이렇게 천천히 나아가면 좋겠네요.



(9) GIST - 약속 (2020.9.12)


 최근 들어 훨씬 작업물 발표 주기가 잦아진 GIST의 새 EP입니다. 한층 더 보컬 능력을 강조한 이번 EP는 GIST를 R&B 가수로 두고 평가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특히, SEIN이 전곡 프로듀싱한 이번 비트가 재지한 느낌이 짙게 깔려있어 힙합 외의 장르를 더 연상시키는 덕분이기도 합니다. 만약 R&B 가수로써 그를 바라본다면 아직은 깊은 감성을 묘사해내는 능력은 조금 부족하다 생각되지만, 여튼 평범한 싱잉 래퍼로 보기엔 확실히 노래는 잘 부르는 셈이죠.


 결과물이 나오는 텀이 짧아진 만큼 대부분의 장단점은 유효합니다. 저는 항상 그의 목소리가 주는 감성에 따라가지 못하는 얕은 가사를 단점으로 지적하곤 했는데, 느낌 탓인지 "약속"은 어느 정도 이 부분에 대해 변화를 꾀하려 했던 것 같지만, 오히려 의미 없이 툭툭 끊기는 문장들의 느낌 때문에 어설프다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더불어 멜로디 전개도 상당히 직설적인 편이라, 슬슬 목소리 색 말고 다른 부분에서도 포인트를 줘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 Crucial Star의 피쳐링과 많은 대조가 되더군요.


 앨범을 자주 내면, 팬이 아닌 리스너의 입장에선 사실 자기 복제를 한다는 느낌 때문에 따분함을 더 느끼기 마련이고, GIST도 완전히 거기서 자유롭진 못한 것 같습니다. 다만 그런 허슬을 통해 이루는 발전도 분명히 있는 걸 알기에 GIST의 행보를 지켜보는 건 아직 충분히 가치 있어보입니다.



(10) Layone - 이태원 (2020.9.15)


 드디어 "Fixiboy" "Foxiboy"를 거쳐 본모습을 드러낸(?) 래원을 이 시리즈에서 다루게 되는군요. 이미 "느린심장박동"부터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던 그의 작법이 확고한 결정체를 이룬 것을 "이태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의미를 모두 거세해버리고 지극히 사운드에만 집중한 랩, 얼핏 보면 요즘의 트렌드와 부합하나 플로우와 톤이 아니라 라임과 순수 랩의 리듬감으로만 시도한다는 데에서 래원은 분명한 차별점을 갖습니다. 막말로, 하려고 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스킬은 아닌게 분명합니다. 단순히 모음만 짜맞춘게 아니라 어느 정도의 발음 변용까지 활용하여 예상치 못하게 일치하는 라임을 만든 거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모두가 같은 고민을 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완전히 내용이 사라진 랩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가? 아무리 사운드 위주로 트렌드가 흐르고 있었다고 해도 언제나 최소한의 얘기 주제는 있어왔습니다. 근데 가사를 들여다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아니 오히려 감상을 해칠 수 있는 곡이라? 신기한 경험이지만 언젠가는 빛바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래원의 음악은 이미 "느린심장박동" "해바라기"를 거치면서 조금씩 신선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확장 가능성입니다. 과연 래원은 이 이상 무얼 할 수 있을까요. 뭐 제가 예상치 못한 아이디어를 내준다면 그건 실로 반가운 일이겠지만, 새로 만든 틀이 너무 좁다는 우려를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틀의 색은 너무 뚜렷해서 피쳐링 벌스와 비트와의 조화마저 충분히 꾀할 수가 없어보입니다. 의미없는 독설을 던지기 싫지만, 대안이 없다면 이번에 출전하는 쇼미 9가 커리어의 정점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 아직 래원이 이런걸 하는지 모르는 대중들을 즐겁게 해준 후, 더이상 재밌어할 대상이 없을 때가 위기인 겁니다. 부디 제 이런 걱정을 향후 민망하게 느끼게 될 정도로 시원한 돌파구를 찾아내줬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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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0-09-24 11:55:13

와! 드디어 밀감싹 모음집 100번째! 진짜 대단한게 새 앨범 듣고 댄스디님 인스타 가보면 반드시 그 앨범에 대한 감상평이 있다는 점... 특정 앨범에 대한 구체적인 감상평을 볼 수 있어서 좋고 더불어 새 앨범 디깅도 밀감싹 덕분에 편하게 찾아듣고 있습니다

 

언제나 사랑화 평화 있으시길 바랍니다 땐스디옵빠...

WR
2020-09-24 16:46:59

밀려있다보니 평균 2주된 앨범을 얘기하게 되어서 뭔가 시의적절하게 읽기는 어려우실 수 있는데

잘 읽고 계시다니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 쟈이즈쨩...

Updated at 2020-09-24 17:42:15

100번째라니...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하십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WR
2020-09-24 16:47:09

ㅎㅎㅎ감사합니다!

 
24-03-18
 
24-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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