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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마이크

프란씨스 D. 마갈로나, 필리핀 최초의 메인스트림 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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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0 18:54:45

 

80년대에 탄생한 필리핀 힙합(Filipino hip-hop)은 삐노이 힙합(Pinoy hip hop)으로도 불리는데요, 투팍 샤커(Tupac Shakur)가 살아있을 적 본토 힙합의 황금기와 역사를 같이했을 정도로 아시아씬 전체를 통틀어서도 유구함을 자랑합니다. 필리핀씬이 낳은 거물들만 해도 안드루 E.(Andrew E.), 마이클 V.(Michael V.), 글록-9(Gloc-9)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이들 중 가장 최고로 손꼽히는 이는 단연 프란씨스 D. 마갈로나(Francis D. Magalona)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갈로나는 그의 이명 중 하나인 '필리핀 랩의 제왕(The Filipino King of Rap)'으로 설명될 정도로 필리핀 올드스쿨 래퍼 중 가장 높은 위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실제 2004년 당시 본토에서 제일 권위가 있었던 힙합 잡지 더 소스(The Source)의 5월호에서 그의 업적이 실렸고, 사후에는 필리핀 정부 산하의 국가문화예술위원회에서 대통령공로메달을 수여했으며, 본 떠그스-n-하모니(Bone Thugs-n-Hamonry)는 2014년 내필공연에서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퍼포먼스를 보였습니다.

 

 

1964년 10월 4일 마닐라에서 태어난 마갈로나는 만달루용(Mandaluyong)에서 학업을 수행하고 1984년 비보이 겸 영화배우로 활동하다가 1989년에 랩게임에 입문하여 다음 해인 1990년 [Yo!]로 앨범 데뷔를 했는데요, 수록곡 중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Mga Kababayan"이 흥행을 하면서 필리핀 래퍼 최초로 메인스트림에 진입함과 동시에 필리핀 힙합의 첫 황금기를 엽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992년에 낸 2집 [Rap is FrancisM]은 "Man from Manila"와 "Tayo'y Mga Pinoy" 등의 곡으로 민족주의와 사회 비판을 섞어 필리핀 힙합의 열기를 절정까지 끌어올린 덕분에 필리핀 힙합의 역사에 길이 남을 앨범으로 남게 됩니다.


이후 1993년 1월 1일 3집 [Meron akong ano!]를 발매하여 필리핀 랩 메탈의 선구자가 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개인 회사인 레드 에그 레코드(Red Egg Rocord)를 설립했습니다. 1995년 4월에 발매한 4집 [FreeMan]은 수록곡 "Kaleidoscope World"가 1996년 아윗 어워드(Awit Award) 및 NU 록 어워드(NU Rock Award)에서 올해 최고의 노래 및 최고의 음반제작상을 수상하면서 마갈로나를 필리핀 록씬에서 완전히 자리 잡을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마갈로나 본인의 경력에서 화룡점정을 찍고 필리핀 음악사에서 당당히 이름을 남기게 하였습니다. 

 


 

필리핀 힙합의 첫 황금기가 저물어갈 때도 그는 [Happy Battle]과 같은 앨범을 내면서 록 가수로서의 정체성과 래퍼로서의 초심 둘 다 놓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음악 활동을 이어갔고, 외적으로는 '이트 불라가!(Eat Bulaga!)'의 공동 호스트와 MTV 아시아(MTV Asia)의 VJ로 일하고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는 등 대중들에게 만능 엔터테이너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2008년 8월 8일 빠식(Pasig)에 소재한 시립병원에서 백혈병을 진단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져 팬들과 언론 및 연예계는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이에 마갈로나는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고 미디어 서커스는 원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전하고 치료에 전념하면서도 성하지 않은 몸으로 아티스트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의료진의 노력에도 병세는 악화하여 결국 마갈로나는 모국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 대한 기쁨과 팬들의 응원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하고 2009년 3월 6일 입원 중인 시립병원에서 향년 4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화장은 11일 새벽에 진행됐고 장례식에는 그의 부인인 삐아 마갈로나(Pia Magalona)와 자식들, 음악 동료들, 필리핀 유명 연예인들이 참석했습니다. 장례 행진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교통 체증을 일으켰고, 사후에도 그의 명성을 이용하여 금전적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이 많았지만 삐아 마갈로나를 비롯한 유족들의 노력으로 저지되었습니다.


이렇듯 마갈로나는 랩, 노래, 작사, 비보잉, 프로듀싱 등 음악 산업에 있는 힙합 아티스트들에게 필요한 모든 소양을 겸비했고, 실제로 그것들을 씬에서 표현하면서 끼친 영향력은 여느 아티스트들 보다도 막대할 정도로 한 나라와 민족의 음악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고, 그간 이뤄온 것들에 안주하지 않으면서 새 길을 개척함과 동시에 초심을 잃지 않았고, 생애 마지막에는 맥동이 다 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 프로의 진정한 모습을 팬들의 뇌리에 깊게 새겼습니다. 그가 살아있으면서 힙합씬에서 보여준 모습은 오늘날 아시아 만방의 언더와 오버를 지향하며 아티스트가 되기를 추구하는 어린 래퍼들이 배워야 할 모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추천곡 목록을 나열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Mga Kababayan

 

1집 [Yo!]에 수록된 마갈로나의 첫 히트곡. 사실상 필리핀 힙합의 황금기가 이 곡으로 인해 열렸음. 2014년에 딸인 막씬 마갈로나(Maxene Magalona)가 아버지랑 비슷한 옷을 입고 따라부르는 퍼포먼스를 선보였음.

 

 

Man from Manila

 

1992년 2집 [Rap is FrancisM]의 1번 트랙. 열강들의 필리핀 통치를 비판함과 동시에 자신의 랩스킬을 자랑하는 곡으로 밑의 "Tayo'y Mga Pinoy"와 더불어 필리핀 힙합 황금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렸음.

 

 

Tayo'y Mga Pinoy

 

1992년 2집 [Rap is FrancisM]의 2번 트랙. 필리핀의 사대주의를 비판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한 덕분에 위의 "Man from Manila"와 더불어 필리핀 힙합 황금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렸음.

 

 

Mga Praning

 

1992년 2집 [Rap is FrancisM]의 5번 트랙. 당시 필리핀 사회에 만연한 마약 문제를 비판하고 있음.

 

 

Ito Ang Gusto Ko

 

1993년 1월 1일 3집 [Meron akong ano!] 수록곡으로 마갈로나가 시도한 첫 랩록 음악.

 

 

Kaleidoscope World

 

1995년 [FreeMan]의 수록곡으로 마갈로나의 곡 중 제일 대중적으로 알려졌음. 곡명 그대로 요지경 세상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자는 주제를 설파하고 있음. 사후 아들 엘모 마갈로나(Elmo Magalona)에 의해 "Kaleidoscope World Forever More"란 곡으로 리메이크됨.

 

 

Watawat

 

[FreeMan 2] 수록. 곡명 그대로 필리핀 국기의 변천을 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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