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렸던 감상 싹 다 하기 프로젝트 pt.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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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4 00:23:15
  밀렸던 감상 싹 다 하기 프로젝트

리뷰라기보다는 일기장에 쓸만한 글을 옮겨왔다는 느낌으로 적어보는 앨범 소감문입니다.

나름 짧은 기간을 두고 쓰는 거 같은데, 이전 시리즈가 벌써 3페이지로 갔군요. 예전에는 한 페이지에 두 글이 있던 적도 있는데. 제가 느리게 쓰는 것보단 힙플의 리젠율이 스믈스믈 올라가고 있는 긍정적인 싸인이라고 봅니다.


대상: 

적어도 세 곡 이상의 앨범.

내가 아는 / 어디서 들어본 아티스트 + 뭔가 지나가다가 추천 받거나 들어주세요! 했던 거라든지... 그런 앨범들


주의:

음알못. 특히 사운드알못.

붐뱁충.



(1) ODEE - SCUMBAG (2020.3.29)


 어느덧 중견 래퍼의 폼이 나기 시작하는 ODEE의 새 EP입니다. 정규가 하나쯤 나올 타이밍인듯 한데 다시 EP인 건 아쉽긴 하네요. Buggy, Viann에 이어 이번에는 Holiday와 1MC 1PD 시스템으로 제작된 앨범입니다. ODEE는 뭔가 하드코어 붐뱁 래퍼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저번 QM과의 콜라보 앨범을 제외하면 고전적인 붐뱁은 거의 하지 않아왔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Holiday의 트랩 비트가 이번 앨범을 채우게 되었습니다.


 ODEE의 가드불능기나 다름 없는 톤은 이번 앨범에도 꽉꽉 차있습니다. 사실 ODEE의 노래는 톤을 언급하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특색 있고 강력합니다. 트랩 스타일이긴 하지만, ODEE는 그 느낌따라 달리기보단 천천히 리듬을 밟아가는 것을 택합니다. 때문에 이번 앨범의 랩은 어느 때보다 몹시 절제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 일부러 줄여 발음하는 것도 많고, 문장에도 딱 필요한 단어만 썼죠. 이런 구조 안에서 ODEE의 톤은 더욱 밀도 높게 느껴져서 노래를 듣다보면 매우 묵직하게, 느리지만 꾸준한 템포로 얻어맞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전곡 3분 미만에 다섯 곡 뿐이지만 그래서 큰 존재감을 느낄 수 있죠.


 ODEE의 장점이 매우 강력하게 발휘되어있기 때문에 이를 단점으로 지적하는 것은 개인적인 취향 탓일 가능성이 더 높겠습니다. 허나 무척이나 텁텁하고 먹먹하게 어레인지가 된 트랙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플로우의 변주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치우쳐있는 분위기를 해소하기엔 부족하죠. 뭐, 반대로 이것이 취향이라면 큰 선물이 될 수 있겠고, 이번에 보지 못한 모습은 다음 작품에서 기대해보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2) Coogie - UP! (2020.3.29)


 "UP!"은 현재 Coogie가 할 수 있는 걸 가장 정확하고 균형 있게 담은 앨범입니다. 어떤 면으로는 첫 정규 앨범이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모범 사례라고도 할 수 있죠. 다소 평이 엇갈리는 것은 Coogie라는 뮤지션에 대한 잘못된(?) 기대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애초에 Coogie는 기발한 랩을 선보이는 뮤지션이 아닙니다. Coogie의 노래는 극도로 정형화된 플로우와 라임, 탑 라인을 탄탄한 음정과 발성으로 들으면서 오는 청각적 쾌감이 메리트입니다. 8마디 내내 한 가지 리듬 패턴으로 뻔뻔하게 이어가도 한 줄 한 줄이 단단하게 고막을 때리는 톤과 완벽한 정박에 떨어지는 라임이 오히려 듣는 재미를 유발하는 케이스인 거죠. 개인적으로 전작 "Emo#1"은 싱잉에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이런 쾌감이 적었고 그래서 아쉽게 들었던 반면, "UP!"은 꽉 차있습니다.


 한편 Coogie는 하드코어한 랩과 감미로운 싱잉 둘을 모두 주 무기로 삼는 뮤지션입니다. 이 두 가지를 보여주기 위해 "UP!"의 전반부는 랩, 후반부는 싱잉으로 주로 위치가 되어있으나, 동시에 이 둘은 상호 교환 가능합니다. 즉, 싱잉으로 빡센 랩 같은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는게 Coogie라는 거죠. 여기에 GXXD를 필두로 참여한 여러 비트메이커들의 톡톡 튀는 비트는 Coogie의 랩 효과를 더욱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아서 이번 앨범에 실망했다는 것도 이해는 가는 부분입니다 - 이만큼 기대했고 기대한 걸 보여줬으니 됐다 라는 평은, 제가 얼마 전 쓴 한요한 앨범에 대한 후기와는 모순되는 면이 있긴 하군요. 제 입장에서는 그걸 보완할만큼 하드웨어가 뛰어나서 괜찮은 건데, 반복에서 오는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UP!"은 매우 안전하게 간 앨범입니다. "All I Know" "Right Away"가 좀 프레쉬하게 들리지만 피쳐링한 MOON과 pH-1이 기여한 바가 더 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전과 다른 것이 없다는 말은 앨범의 호불호와 상관 없이 꽤 정확한 평가가 될 것 같습니다.


 그냥 큰 기대 않고 귀를 즐겁게 하기엔 합격점인 앨범이었던 거 같습니다. 짜릿한 탄산 같달까요. 여운은 확실히 약합니다 - 여운을 남기려고 후반부를 마련했다면 그 부분은 다소 아쉬운 결과이긴 하군요. 어쨌거나 첫 정규 앨범으로는 모자람 없이 나왔다고 보입니다. 허나 그런 저 역시도, 같은 전략이 통하는 건 여기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남는군요.



(3) Zior Park - THUNDERBIRD MOTEL (2020.3.30)


 Zior Park은 아직도 베일에 쌓인 부분이 많은 아티스트입니다. 공식 작업물은 2018년에 처음 등장하며, 당시에는 "Filot Park" 소속이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크루인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Big Blue Booth"라는 믹스테입이 연이어 나온 후 마미손의 Beautiful Noise에 합류, 단체곡 "Noise"에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지만 아직도 활동이 그리 많지 않아 궁금증이 더 큰 아티스트죠. 사운드클라우드에 지역을 뉴욕이라 적어놓은 것도 그렇고, 곡들이 전부 영어로 나오는 걸 보면 교포인가 싶기도 하고요. 그의 아우라는 잠깐만 보더라도 뇌리에 각인되기 충분합니다. 앳된 고음의 목소리와 뮤직비디오나 트랙 등에서 드러나는 기괴한 컨셉은 국내 힙합씬에 전무후무한 그의 영역을 만들었습니다.


 "THUNDERBIRD MOTEL"은 이런 바이브를 잘 계승하고 있습니다. 'Thunderbird 모텔에서 발견된 일기장을 토대로 제작된 믹스테입'이라는 배경 하, 늘 그와 작업을 같이 하는 Ohio Fish라는 비트메이커와 함께 제작한 트랙에는 망상과 불안에 시달리던 한 남자가 모텔에서 뛰어내리기까지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앨범에 전체적으로 깔려있는, 행진하는 듯한 경쾌한 멜로디와 스윙감 넘치는 비트는 이런 플롯을 고려할 때 참 역설적입니다 - 특히 드디어 주인공이 뛰어내리는 것을 암시하는 (후렴에는 '자살과는 다르다'란 가사가 들어있습니다) "Lonely Diver"는 제일 밝은 분위기죠. 중독적인 톤과 멜로디 아래 깔려있는 이런 미묘한 불편감이 Zior Park의 음악을 구성하는 주축입니다.


 스타일의 독특함을 고려하면 꽤 호감 가는 음악들이라 생각만큼 호불호가 갈리진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목소리가 미성은 아닌 관계로 내내 듣다보면 살짝 질릴 순 있을 것 같네요. 언어의 장벽은 가장 큰 장애물이 될 듯합니다 (사소한 지적일 수 있지만, 제가 느끼기로는 의외로 영어 발음, 액센트나 문장 구조가 부자연스러운 데가 꽤 많습니다... 개인적으론 더더욱 Zior Park의 정체가 궁금해지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데뷔 이래로 거의 같은 류의 음악을 해오고 있는지라 어느 지점엔가 매너리즘에 도달할 거라는 기우가 미리 들기도 합니다. 허나 말마따나 아직도 숨겨진 부분이 많은 아티스트라, 섣불리 걱정하기보단 우선 현재 나온 결과물을 즐기는게 낫겠죠.



(4) Dino.T - 자소서 (2020.3.30)


 오랜만에 보는 이름입니다. 지난 EP "Epilogue"를 기준으로는 10개월 만이군요. "자소서"는 저번 앨범에 비해 그만의 싱잉 랩 스타일을 더 완성시킨 느낌이 듭니다. 처절하게 절규하는 듯한 발성은 그대로인 상태에서 발음을 의도적으로 흘리니 약간 주정 같은 느낌이 드네요. 이번에도 전체적으로 어두운 주제를 그리고 있고, 그게 주정 느낌하고는 상당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이 듭니다. 종원이, Dumo의 비트도 과하지 않게 주제의 색깔을 그리는데 잘 보탰다고 생각합니다. "이름" 같은 트랙은 여러 번의 변주로 약간 실험적인 시도를 한 셈인데, 개인적으론 크게 나쁘진 않았지만 호불호는 좀 갈리는 거 같더군요. 마지막 트랙 "Keep Sleeping"은 상대적으로 밝은 얘기를 하려는 트랙이지만 같은 감성, 같은 플로우로 가져간 것도 약간은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사실, 끝까지 그런 스타일로 이어지다보니 앨범이 실제 길이에 비해 좀 길고 쳐지게 느껴지는 것도 있습니다.


 멜론 리플에 보니 예전처럼 센 랩을 하길 바라는 반응도 있던데, 뭐 스타일의 변화는 항상 올드 팬의 아쉬움을 수반하기 마련이죠. 처음에 말했듯, 싱잉 랩 스타일을 좀 더 완숙하게 뽑아낸 앨범이라 생각합니다. 아직 완전하지 않고 단점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써는 나쁜 얘기를 할 필요 없는 작품 같네요.



(5) Blase - WAGWAN (2020.3.31)


 최근에는 Roof Top으로 두 장의 EP를 발표했던 Blase가, 두 개의 선공개 싱글에 이어 새 EP를 발표했습니다. 소속이 "FA"라는 곳으로 나와있군요. 첫 EP "0"이나 Roof Top의 앨범에서나, 약간 스타일은 달랐지만 트랩 기반의 음악을 보여왔고 마지막은 오토튠 싱잉으로 멜로디컬한 음악을 했었는데요. 이번 "WAGWAN"은 마찬가지로 트랩이지만 훨씬 하드한 걸 갖고 나왔습니다. 좀 더 격앙된 톤과 댐핑 넘치는 발음으로 일관하는 앨범은 근래 들었던 앨범 중 "Rap Legend 2"를 연상시킬 정도입니다.


 나쁘지 않은 랩입니다. 다만 파워가 워낙 세다보니 중간중간 Blase 본인도 힘에 부치는 듯이 들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후반부 한두 트랙을 빼면 정말 Blase는 폭주기관차처럼 랩을 뱉습니다. 곡들이 2분 전후의 짧은 길이라 생각보다 금방금방 트랙은 교체되지만 Blase의 온도는 그대로입니다. 가사적으로도 특별히 내용을 담으려고 했다기보단 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좀 더 파열음이 나는 단어를 고르고, 짧게 축약했단 느낌입니다. 텐션을 업시키는데는 좋지만, 9트랙 내내 고막을 때려대기만 하니 앨범을 순차적으로 들을 땐 지치기 쉽습니다. 면도가 '기관총'이라 표현했던 "Rap Legend 2"도 뒤에 가선 스타일 변화가 있었는데 이건 정말 초지일관이거든요.


 여담으로 참여진 중 pH-1은 놀랍더군요. 지난 앨범 "HALO"에서 역량을 확인한 바 있지만 아직도 보여줄 게 많은 뮤지션 같습니다. 그리고 주로 감각적인 곡을 찍어왔던 GXXD가 이런 하드한 트랩 만드는 것도 살짝 새롭네요.


 곡 길이가 짧긴 하지만 트랙 수가 꽤 되어서 볼륨 있는 앨범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던 특징 때문에, 근래 Superbee, 그리고 Coogie 앨범을 듣고 쓴 글처럼 여운은 그닥 남진 않습니다 - 사실 두 앨범보다 훨씬 심합니다. 컨셉을 갖고 만든 앨범이라면 트랙 길이와 구성을 조금 조정했으면, 혹은 약간만 다양성을 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6) Sikboy - Orange County (2020.4.1)


 Sikboy는 오랫동안 LA에서 활동해오던 교포 2세 래퍼로, 2009년 믹스테입 "My Bad"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즈음 Soar Saem의 레이블 "Elemental Classik"의 초창기 멤버로 함께 하여 Comma 1집에 "Respect Ma Swagger"란 곡으로 참여하였는데, 저에게는 이게 Sikboy를 처음 안 순간이었습니다 (이번 앨범의 "SIKBOY"에도 담겨있는 얘기죠). 바다 건너에 있다보니 아무래도 자주 소식을 접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활동을 이어왔으며, 무산된 첫 EP의 공개곡 "JZZ SX"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기도 했죠. Sikboy를 아시는 분은 그가 Unique One vs Rimi 디스곡에 이름이 나왔을 때, 또는 San E를 디스했을 때, 혹은 최근 Mic Swagger Open Mic에 참여했을 때 아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은근히 활동 경력이 긴 래퍼입니다.


 2년 전 한국으로 들어온 후 현재는 "BrosNight"이라는 크루?에 들어가있는 거 같군요. 이번 앨범은 Sikboy가 한국에서 내는 첫 EP라고 합니다. OPENMICSWG의 인연으로 받은 Nuol의 비트를 제외하고는 BrosNight의 프로듀서 Clayheart가 전곡을 제공하였고요. 마치 미국 서부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듯, 앨범 전반부는 지펑크 스타일의 트랙이 들어가있습니다. 그러다 중반부에선 일반적인 붐뱁, 그리고 후반 두 트랙은 감성적입니다. 심지어 마지막 트랙은 싱잉 랩도 하죠.


 Comma "Respect Ma Swagger"가 제게 뇌리가 깊게 박혀있다보니, 그 사이에 Sikboy가 많은 트랙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10여년 전 트랙을 비교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그때처럼 Sikboy는 타이트하게 플로우를 짜고 전개해나가지만, 일단 처음으로 느껴지는 차이는 여유로움입니다. 과거에 비해 현재의 랩은 힘이 더 들어가있고 투박하게 느껴집니다. 특히 마디마디의 밀도가 높기 때문에 이런 투박함이 더 여실히 느껴지는 거 같습니다. 더불어 톤을 운용하는 게 별로 없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랩이 많이 지루하게 들립니다. 이는 전반부, 요즘 시대에는 촌스럽게 들리기 마련인 지펑크 비트에서 더 치명적으로 작용합니다. Comma의 노래처럼 로파이한 비트가 차라리 더 어울렸을까요?


 한편 전반, 중반, 후반이 전부 다른 분위기로 짜여있는 앨범을 들으면서 아직 Sikboy가 본인 음악에 자신이 없는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약간, 뭘 좋아할지 몰라 다 넣어봤다는 느낌이 들었달까요. 아직 인지도가 크지 않으니 다양한 시도는 득이 크긴 하겠지만 그래서 앨범이 좀 집중이 안 되었습니다. "Orange County"는 확실히 쌩뚱맞은 트랙으로 기억에 남는군요. 


 이런저런 점을 지적하다보니 제가 까칠해진 건(?) 시대의 영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Sikboy의 스킬풀한 랩은 현재 트렌드와 많이 대치되어있습니다. 다른 말로, 랩에 대한 별다른 장식 없이 오로지 스킬로만 승부를 보려고 하는 것이죠. 오로지 스킬만 보자면, 준수한 편이긴 하지만 부족한 점은 보이기 마련이고 이를 커버할 다른 특징이 없으니까 더 그런 거 같습니다. 사실 예전의 저 같으면 스킬풀한 랩만 있으면 좋아했을텐데, 붐뱁충이라 자처하던 저도 이것저것 들으면서 취향에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무쪼록 본인의 이름을 각인시킬만한 어울리는 옷을 빨리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7) 김디지, 중식이 - 음주남녀 (EAT, SOJU, MAN, WOMAN) (2020.4.1)


 작년 12월 나온 리메이크 성격을 띈 더블 싱글을 제외하면 4년만에 신곡으로 컴백입니다. 한때 김디지라는 이름은 상당한 존재감을 지녔고 씬 안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번에 인디 가수 중식이와 EP를 냈습니다.


 냉정하게 따져봅시다. 대략 2000년대 중반 전을 제외한다면, 김디지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그의 수려한 랩을 즐기고자 들었던 건 아닐 겁니다. "2 jazzy for hiphop"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진한 재즈 풍의 비트도 매력 포인트이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또라이 같은 행보가 적절하게 반영된 그의 컨셉에 반해 음악을 찾게 된 게 아마 주 이유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지금 오랜만에 돌아온 이 앨범은, 그 두 가지가 전부 없습니다. 김디지는 5곡 전부를 프로듀스했지만 (Yonze라는 비트메이커도 함께 하긴 했습니다), 이전의 재지 바이브는 간간히 들려오는 색소폰 소리로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뭐, 늘 재지한 것만 했던 것도 아니고, 게다가 콜라보 파트너가 인디밴드의 보컬이니 당연한 것일 순 있지만, 재즈를 떠나서 비트가 너무 단촐하게 변했습니다. 빗대어 말하자면, 어설프게 대중성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아마추어 래퍼들의 비트가 생각난달까요.


 불행히도 이러한 분위기는 김디지의 랩에도 반영됩니다. 영화 "음식남녀"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노래들은, 기본적으로 술과 음식을 소재로 하여 남녀 관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또라이 감성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죠. 물론 디지는 "너는 천사다, 난 아닌데" "나에게 거짓말을 해봐" 등의 감성곡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적도 있지만, 공교롭게도 이들은 제가 위에서 언급했던 "2000년대 중반 전"의 곡들입니다. 즉, 호평에는 시대적인 배경이 있을 수 있다는 거죠. 게다가 이번에 '추가'된 오토튠은, 아주 살짝 들어갔을 지언정 전체적인 분위기와 조화롭지는 못한 듯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남은 것은 김디지의 랩과 중식이의 보컬 뿐인데요, 결국 근본적인 질문 - 과연 뭐 때문에 이 음악을 찾아 들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는 김디지라는 이름이 반가워서, 그리고 과거에 보여줬던 감성을 재현하여서 좋게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중식이의 팬이어서 그럴 수도 있고요 (개인적으로 중식이의 음악을 잘 몰라서 말을 아끼지만, 이번 앨범으로 봐선 둘의 시너지가 썩 좋은 편은 아닌 거 같습니다). "Insane Deegie"를 생각하고 이 앨범을 듣는 사람들은 실망스러워할 확률이 매우 높아보입니다.


 어차피 언제까지고 아티스트에게 과거의 이미지를 고수시킬 권리는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바뀌고 컨셉을 바꾸는 것은 창작자의 권한이자 자연스러운 과정이죠. 앞으로도 중식이와 여러 콜라보를 예고한 상태에서 이 앨범 하나 갖고 속단하는 것도 안 좋은 일이겠죠. 그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진 몰라도, 자신의 음악이 어떤 어필을 가져왔는지를 고심해볼 필요는 있다 생각합니다. 향후 행보에서는 좀 더 팬들을 놀래킬 모습을 기대해봅니다.



(8) Boinata - Holy Robber (2020.4.1)


 Boinata는 Lil Tachi의 크루로 유명한 탈주닌자클랜 (TNC)의 멤버입니다. 현재 TNC의 인지도는 Lil Tachi를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Boinata도 나름 솔로 활동을 펼쳐왔습니다. 이번 앨범만 해도 작년 12월에 이어 두 번째 EP고, 특히 재작년과 작년에 Lil Tachi와 콜라보 믹스테입을 각각 낸 바 있죠.


 앨범은 네 트랙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앞의 두 트랙과 뒤의 두 트랙이 스타일이 다릅니다. 앞 트랙은 앞뒤 안 가리고 달려가는 하드 트랩, 뒤의 두 트랙은 싱잉 랩이 주가 된 트랙이죠. 둘 다 에너지가 잔뜩 실려있는 트랙으로, 특히 전반부는 Lil Tachi를 많이 닮아있습니다. 사실, Lil Tachi 앨범 얘기할 때 '피쳐링진이 어느 파트인지 헷갈린다'라는 말을 제가 했던 적이 있는데, 그만큼 크루가 비슷한 스타일로 통일되어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는 좋은 점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시원시원하게 달려나가는 느낌이 싫진 않습니다. 앞뒤 안 가리는 느낌은 호불호가 있을 순 있겠는데, 예를 들면 "OKAY!"의 후렴이 뜬금 없이 형의 배신(?)을 얘기한다든지, "Nervous"의 raw한 느낌의 박자와 믹싱 상태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겠네요. 개인적으로 전반부 두 트랙이 더 매력적이었던 거 같습니다. 후반부 두 트랙도 시원하긴 하지만 왠지 이건 더 흔한 스타일이었던 거 같거든요. 


 트랙 길이도 짧고 4트랙 밖에 안 되어서 금방 끝나는 앨범입니다. 사실 저로써는 Boinata를 처음 제대로 접하게 된 건데, 일단 그가 가진 (더 나아가 TNC가 가진, 이라고 해도 될 것 같네요) 에너지 하나는 확실히 기억하고 갑니다. 나머지 감상은 앞으로 나오는 작품에서 하는게 나을 거 같네요.



(9) Code Kunst - PEOPLE (2020.4.2)


 쇼미더머니, 고등래퍼 등 각종 대중 매체를 통해 대중들에게 친숙한 비트메이커가 되었지만, 사실 Code Kunst가 그동안 내놓은 음악은 그의 이름만큼이나 심오하고 비대중적인 것이었습니다. 방송에서 보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Code Kunst가 무뚝뚝하고 심각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미지의) Ignito 같은 사람일 거라 추측했으니까요. 그게 사실과 정반대라는 걸 알게된 현 시점에서, 그는 발매 전부터 이번 앨범은 듣기 편안한 앨범이 될 거라는 뉘앙스의 발언을 많이 하였고, 과연 "PEOPLE"은 그의 커리어 중 제일 쉬운 앨범이 되었습니다.


 마냥 가볍다는 뜻은 아닙니다. Code Kunst 특유의 무겁고 우울한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유지되어있죠. 전작들과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꼽자면,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도 할만한 '소름 끼치는' 느낌의 보컬 샘플 비중이 줄었습니다. 그 외에 악기들을 만진 것도 과거엔 여러 이펙트와 필터가 걸려있었다면 이번에는 우리가 아는(?) 소리 그대로 사용된 게 많아요.


 많은 이들이 이번 앨범을 "Code Kunst 순한맛"이라 얘기했고, 그 얘기는 적절한 요약입니다. 본래 Code Kunst의 비트는 화려한 멜로디나 웅장한 세션으로 승부 보는 타입이 아니었습니다 - 위에서 말한 효과들이 풍기는 아우라가 그의 음악의 아이덴티티였죠. 근데 그런 것들이 많이 빠지다보니, 기대하던 팬들 입장에선 좀 애매해진 겁니다. 특히 앨범 전반부는 우울한 분위기가 강조는 되어있는데 귀를 잡아끌 것이 상대적으로 약해서, 지루하고 쳐지는 감이 있습니다 - 늘 그래왔듯 이번 앨범도 호흡이 길거든요. 사운드에 대해 잘 모르는 평범한 막귀로써 얘기하는 거지만, 이 전반부가 "PEOPLE"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을 좌우하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JOKE!" 이후 분위기도 환기되고, 후반 세 곡 (보너스 트랙까지 네 곡)은 Code Kunst에게서 기대하는 재치가 보였던 거 같아요. 특히 마지막으로 가면서 그가 말하고자 했던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이란 주제가 서서히 드러나는듯한 구성이 여운이 있고 좋았습니다.


 한편, 워낙 Code Kunst의 비트 분위기를 다루는 것이 쉽진 않아서 리스너 입장에서 피쳐링진에 까다로워지는 거 같습니다. 과연, 신선한 조합은 없었지만 생각해보면 Code Kunst가 너무 많은 사람이랑(?) 작업하긴 했어요. 이렇게 변호를 할 순 있는데, 또 그런 비판에 일정 부분 동의하고 있긴 합니다. 개인적으로 Jvcki Wai가 기대되었지만, "Set Me Free"는 개중 진부함이 제일 크게 느껴진 곡이어서 (+Loopy 고음이 너무 어색...;) 제 퍼스널 워스트에 들어갑니다. 넉살, Legit Goons가 잘 해줬지만 과거 콜라보에 비하면 '선방' 정도였죠. 반대로 베스트를 꼽아보라면, 단골 피쳐링 멤버이면서도 스타일이 바뀌었다보니 신선함이 있던 C JAMM의 "JOKE!" (Simon Dominic의 상반된 벌스도 호감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 앨범 주제를 잘 드러내면서 따스하게 마무리해주는 "PEOPLE"이 있겠네요.


 실망하는 여론들이 꽤 있었고, 무슨 이유에서 그런 반응이 나오는지 공감은 됩니다. 특히 아티스트의 메세지를 피쳐링진의 도움을 받다보니 온전한 전달이 되지 않을 리스크가 있는 비트메이커의 앨범이라 더 그런 듯합니다. 하지만, 발매 전후 Code Kunst가 거듭 밝힌 앨범 제작 의도를 고려한다면 좋은 앨범이라 생각합니다. 막말로, '순한 맛'이라는 건 배려가 섞인 행동입니다. 기대하던 바와 다소 달라져있대도, 그가 했던 말을 고려할 때 수긍이 가지 않는 부분은 적었습니다. 여전히, Code Kunst는 실력 있고 훌륭한 뮤지션입니다.


 

(10) Queen WA$ABII - Spice It Up! (2020.4.3)


 프로듀서 겸 DJ로 활동한 전적이 있다는 Queen WA$ABII는 2019년 말 "Look At My!"와 "안녕, 쟈기"로 나름 인상적인 신고식을 치렀습니다. Lil Cham이나 Rimi 등, 섹슈얼한 이미지를 강조한 여성 힙합 트랙을 낸 아티스트가 아예 없던 건 아닙니다만, 그것들에 비해서도 한 술 더 뜬 컨셉이라 흥미를 유발하긴 충분했었습니다. 허나 "Look At My!" 뮤직비디오가 일부에서는 조롱거리 취급을 받았던 것처럼, 아직 그녀가 했던 음악은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와중에 발표된 앨범이 그녀의 첫 EP "Spice It Up!"입니다.


 발칙한 컨셉은 늘 반감을 사기 마련이고 그녀는 그걸 예상한 듯 "Band Wagon"에서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힙합은 솔직한 장르이고, 힙합에서 못 말하면 어디 가서 말하겠습니까. 단, 무얼 말하든간에 음악은 음악으로 얘기해야하는 겁니다. Queen WA$ABII가 논란이 되는 이유는 사실 그 이유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발성이 제대로 갖춰져있지가 않은게 치명적입니다. 오토튠 싱잉을 한 앞의 두 트랙은 완전하진 않지만 그나마 오토튠이 이를 커버해줍니다. 좀 세게 랩을 해보려는 뒤의 세 트랙은 얄짤이 없습니다. 당장 "Baby Toes"에서 'shoot'이란 단어를 말하자마자 모든게 드러나버립니다.


 Uneducated Kid를 연상시키는 단순한 가사는 그렇다쳐도, 랩에서 Dbo가 연상되는 건 그녀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컨셉으로만 승부하는 시대가 되었다지만 그녀의 랩의 빈약함을 커버하기엔 오히려 진부하고 감흥이 부족한 컨셉입니다. 한 가지, 이번 앨범은 beatstars라는 비트메이커가 1에서 4번 트랙까지 주고 "Nuna Banks"만 Queen WA$ABII 비트였는데 개인적으로 비트는 "Nuna Banks"가 제일 좋더군요... 거기까지입니다. 만약 그녀의 음악이 이번에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 보인다면, 솔직한 목소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보수적인 사회가 문제가 아니라 다른 데에서 원인을 찾아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밀렸던 감상 싹 다 하기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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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0-04-14 00:44:13

부끄럽지만 이 중 못 들어본게 절반 이상이군요..

WR
2020-04-14 09:18:57

부끄러운 게 아니죠. 저는 옛날부터 듣고 있어서 DETOX, Founder 이런 거 하나도 못 듣고 있어요.. 흑

2020-04-14 10:06:34

애플뮤직 founder 안떴음요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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