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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마이크

밀렸던 감상 싹 다 하기 프로젝트 pt.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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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6 23:55:19

리뷰라기보다는 일기장에 쓸만한 글을 옮겨왔다는 느낌으로 적어보는 앨범 소감문입니다.

새해 첫 시리즈로군요! 사실 이틀 전에 다 써놨었는데 어영부영하다가 이제 올리네요. 덕분에 미리보기 모드가 깨져버렸...ㅠ


대상: 

적어도 세 곡 이상의 앨범.

내가 아는 / 어디서 들어본 아티스트 + 뭔가 지나가다가 추천 받거나 들어주세요! 했던 거라든지... 그런 앨범들


주의:

음알못. 특히 사운드알못.

붐뱁충.



(1) Tomnerd - 불가촉천민 (2019.12.13)


 Tomnerd는 2019년 7월 첫 싱글을 발표한, 아직은 크게 정보도 기록도 없는 뮤지션입니다. 사운드클라우드에는 2018년부터 곡이 올라와있고, 이도 더 나블라의 "중독"에도 피쳐링한 바 있죠. 이 앨범은 첫 싱글 "염색" 다음으로 나온 결과물이자 첫 EP입니다. 


 한마디로, 앨범은 매우 순박하고 담백합니다. 나이 순으로, 과거의 추억과 연관지어 하나씩 트랙을 만든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소재와 주제를 연결하는 방식도 괜찮았습니다 - 비록 결과물의 깊이가 기대하는 것보단 얕게 드러나긴 했지만요. 헌데 순박하다는 것이 사운드에까지 드러나는 것은 호불호가 갈릴 것이며 자극적인 것이 많은 씬에서는 매력으로 작용하긴 쉽지 않아보입니다. Tomnerd의 플로우는 지극히 정직하게, 한 박자씩 정확하게 밟아나가는 모습이 당황스럽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한 글자는 정확히 한 글자만큼의 자리를 차지한단 느낌입니다. 라임도 거의 안 맞춘 상태이며, 목소리에 다른 장치가 없기 때문에, 순수한 내용과 겹쳐 이 앨범은 일종의 동화 구연 같은 느낌이 듭니다 (유자 노래 같단 소리가 아닙니다). 오직 마지막 트랙 "오디세이"만이 어느 정도의 그루브감을 만들어내고 있어 듣는 재미를 조금이나마 줄 뿐입니다.


 감상이 끝나고 다시 제목을 보니 "불가촉천민"이란 제목이 영 어울리지 않습니다 - 주제와도 잘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에 붙이기에는 좀 공격적인 어감이 있었죠. 어쨌든 첫 싱글 "염색"과도 연관지어보면 일상적인 주제에서 얘기를 끌어내는 면은 칭찬할만하지만, 그 이상 음악적인 매력을 풍길 요소를 찾기 힘든게 가장 아쉬운 점이라 하겠습니다.



(2) Bola - Bola Tape 2 (2019.12.19)


 MBA 크루의 Bola가 갑자기 세 곡 짜리 작은 앨범을 냈습니다. "Bola Tape 2"라는 제목을 보고 과거에 "Bola Tape"이란 믹스테입을 발표한 적 있다는 걸 처음 알았네요. 일단 이 앨범에서는 MBA에서 하는 스타일과 좀 다릅니다. 싱잉 랩 기반의 트랩 뮤직인 건 같지만, 스웩을 하는 트랩이 아니라 말랑하고 듣기 편안한 곡들 위주죠. 그래서 그가 짠 탑 라인이 MBA 앨범보다 더 잘 살고 감미롭게 들립니다. 아무래도 Neal 말고 다른 비트메이커가 참여한 것도 그렇지만, MBA에서 매번 EK와 비교당하면서 기억에 잘 남지 않는 래퍼였던 반면 이 앨범에서의 Bola는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전히 전형적인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다 앨범 크기 자체가 작아서 할 말은 많지 않지만, 어쨌든 듣는 동안 EK가 어디 갔는지 궁금하지 않았다는 건 소기의 성공을 이룬 게 아닐까요.



(3) GOND - typeface: GROTESQUE (2019.12.19)


 GOND란 이름 역시 낯선 분들이 많을 것이나, 이현준의 "Analog TV" 앨범을 전곡 프로듀싱한 비트메이커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얼핏 "Analog TV"는 단순한 붐뱁 앨범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비트를 유심히 들어보면 난해하고 과격한 데가 있었습니다. GOND는 그런 비트메이커였고, 그동안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가 솔로 앨범으로 돌아왔습니다.


 첫 세 트랙 정도는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모습입니다. 기계적인 소리와 노이즈를 차곡차곡 쌓아올려 곡을 만들어가는 모습은 FRNK를 쉽게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폭발적인 FRNK의 비트보다는 더 응축된 모습이죠. 여기에 처음 보는 GOND의 랩이 더해집니다. 건조한 목소리로 툭툭, 하지만 끊이지 않고 던지는 GOND의 랩은 살짝 Kid Milli를 연상케도 합니다. "식물"까지는 이런 타악성 짙은 곡들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drunk on you"부터는 곡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후반부는 얼핏 들어선 마치 R&B 앨범을 듣는 느낌입니다. 이 위에서의 랩은 조용하고 감미로운 분위기를 풍기며, 앞 트랙에서의 느낌을 이어가는 동시에 전혀 다른 모습을 연출합니다. 재밌게도, 여기에서도 비트를 유심히 들어보면 여전히 범상치 않은 소스들이 뭉쳐 기묘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FRNK가 XXX 앨범을 만들면서 언젠가 말했던 "낯선 소리로 익숙한 사운드를 만드는" 작업이 이런 것인가 싶습니다. 


 이런 분위기의 반전은 앨범 설명에 있는 "GROTESQUE"의 이중적 의미, 즉 '기괴한, 흉측한'이란 뜻의 형용사와 단정한 모습의 폰트 이름 두 가지를 잘 대변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런 의도를 떠나, 두 가지 모습에 모두 만족할 사람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전반부의 GOND의 모습을 기대했기 때문에 후반부가 다소 뜬금없었죠 (분명 사운드를 구성한 재치는 흥미롭지만). 더불어 GOND의 랩이 크게 프레쉬하진 않았던 점 - 오히려 플로우를 화려하게 구성하려는 부분일수록 더 틀에 박힌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사가 생각보다 직설적이었던 것도 기대보다는 아쉬웠는데, 이건 이런 비트엔 좀 난해한 가사가 어울린다는 제 편견에서 기인했을지도 모르겠군요 - 소재의 참신함과 주제를 펼치는 논리는 좋았지만 표현의 깊이가 얕았단 의견입니다.


 이제 이런 인더스트리얼 사운드도 은근 자주 맞닥뜨리는 것이 되었지만, GOND의 사운드는 여전히 흥미를 끌기엔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걸 제시함에 있어서 상반된 두 가지 색깔을 택한 것이 효과적인 전략이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나름대로 능력을 증명하는 좋은 방법이었으려나요. 오히려, 비트메이커로써의 자신을 더 강하게 드러냈으면 좋았을 것도 같군요. 아무튼 제가 너무나 좋아했던 "Analog TV"의 프로듀서였기에 오랜만에 반가웠습니다. 앞으로 더 활발한 활동 기대합니다.



(4) KIMOXAVI - Les Fleurs du Mal (2019.12.20)


 KIMOXAVI는 Ray Hill과 파탈돕차일드 (FA_TAL Dopechild. 근데 이번 앨범 소개에선 전부 한글 표기로 썼더군요)로 이루어진 듀오입니다. 2017년 첫 EP를 발표했고, 최근 '사인히어'에 나와 예선에서 무대를 보여준 적도 있죠. 예선 무대만 놓고 따지면 단순히 1보컬 1래퍼의 그룹인가 싶지만, 조금더 파헤쳐보면 Ray Hill은 한 번도 보컬이라고만 규정된 적은 없고, '프로듀서형 아티스트'란 말을 즐겨 썼습니다. 그 말대로 그는 이 그룹에서 전곡 프로듀싱을 맡고 있으며 노래와 랩을 오가는 다양한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사인히어'에서 보여준 노래가 인상적이긴 했죠.


 그래서 그 인상적인 노래를 기대하고 듣는다면 "Les Fleurs du Mal"은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말했다시피 Ray Hill이 노래만 하지 않는 까닭도 있지만, 사운드의 방향이 딱히 보컬의 그윽함을 강조하는 방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일부 곡에서는 노래라기보다 싱잉 랩에 가까운 파트를 맡기도 하며, "NANA" "Young & Wild"처럼 그나마 노래 비중이 큰 곡에서도 Ray Hill이 소울풀하다는 감흥은 얻기 어렵습니다. 사운드알못인 제가 표현하긴 어렵지만 뭔가 목소리가 가볍고 얇게 처리되었다는 인상입니다. 기대한 모습에 따라 지극히 아쉬운 점이지만, '사인히어'에서 느껴지던 파탈돕차일드와의 간극은 이로써 좁혀지고 조화로워지긴 했습니다.


 비트에 있어서는 상당히 들을 거리가 많습니다. 그들은 '얼터너티브 힙합 듀오'라고 자신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Ray Hill이 과거 프랑스의 EDM 앨범 "Elektro-Tek"에 참여했다는 전적을 고려하면 예상할 수 있다시피 신디사이저가 주된 악기로 등장합니다. 치밀하게 쌓인 멜로디 라인이 만들어내는 아우라는 앨범에서 제일 귀가 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안에서 그들은 "Pay Day" 같은 하드 트랩도 했다가, "NANA" 같은 슬로우 잼도 했다가, "Dancing in the Dark" 같은 EDM이나 "Mirror" 같은 이모 힙합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 단 "Mirror"는 기본적으로 리듬감이 많이 살아있고 경쾌한(?) 바이브가 있어서 흔히 생각하는 이모 힙합보단 퓨쳐 베이스 같단 인상이 들더군요. 다양한 스타일이지만 Ray Hill의 비트 스타일이 탄탄해서 별로 들쭉날쭉하단 생각은 들지 않고, 프로듀싱이 잘 되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만 이 위에 얹어진 보컬이 못내 찜찜함을 남깁니다. 파탈돕차일드의 랩은 크게 흠을 잡을 데는 없지만, "BOM"처럼 이펙트 없이 맨 목소리가 드러날 때는 투박하고 심심한 느낌이 좀 납니다. 또 몇몇 곡에선 비트보다 랩이 빨라지려는 듯한 불협화음이 들렸습니다. Ray Hill의 보컬도 큰 문제야 없지만 뭔가 튜닝이 덜 된듯이 들리는 건 저뿐일까요. 전체적으로 깔끔하게 다듬지 않고 그냥 얹어졌단 생각이 들더군요. 앨범의 프로덕션이 고급스럽고 진한 맛을 풍기는데 이때문에 뒷맛이 개운치가 못했습니다.


 얼터너티브 힙합 듀오를 표방하지만 정말 대안적으로 많은 걸 제시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의미 없는 비난이 될까 조심스럽지만, 소개글에서 '한국에서 아직 생소한 이모 힙합'이란 문구가 왠지 아직 한국 힙합씬을 잘 모르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보컬 1래퍼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서 보아도, 기대를 충족해주진 못하는 앨범인 것 같습니다. 확인했던 그 진한 맛이 더욱 순수하게 우러나오는 다음 작품이 나오기를 기다려보겠습니다.



(5) Zesty - Mom's Car (2019.12.21)


 Zesty는 GR8VATTIC이란 크루의 리더인 래퍼입니다. 확인되는 첫 싱글은 2017년인데, 왠지 그보다 전부터 이름을 봐왔던 것도 같군요. 선공개 싱글 "새벽주행"에 이어 나온 첫 앨범 단위 작업물인 "Mom's Car"는 제목 그대로 자동차에 관한 이야기를 엮어 만든 EP입니다.


 첫 인상은 매우 경쾌하고 힘 있는 붐뱁입니다. 패기 넘치는 목소리로 Zesty는 운전과 인생의 여러 단면을 연결하여 얘기하고 있으며, 그런 비유들은 적절하면서도 어렵지 않게 다가옵니다. 몰고 다니는 차를 통한 스웩과 정면으로 대치하려는듯 당당하게 엄마 차를 몰고 다닌다는 얘기는 (심지어 "갓길 (Skit)"의 녹음 장소도 'Mom's car'라고 표기되어있네요) 이런 패기와 같은 맥락인 유쾌한 에너지로 느껴집니다. 탄탄한 발성이 이것을 잘 뒷받침해주기도 하고요.


 다만 이런 류의 아티스트 (특히 아직 커리어가 길지 않은 신인)들이 늘 맞닥뜨리는, 그가 "주차"에서 지적했듯 올드하게 느껴지는 것에 대한 대안이 잘 마련되어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일 것입니다. 랩을 풀어내는 데 있어 상당히 정직한 정공법을 택하고 있어 플로우에서 인상적인 순간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랩과 마찬가지의 에너지를 잘 담고 있지만 큰 변화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루핑 구조이고 비교적 BPM이 빠른 (그루브감이 상대적으로 약해지는) 비트들도 여기에 한몫하는 요소입니다. 대부분의 피쳐링진도 Zesty가 주는 감흥과 크게 다르지 않기도 하고요.


 이런 정공법은 얼추 부현석의 "Broke Boi Said" 같은 앨범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풋풋하고 솔직한 태도는 이 앨범의 큰 미덕 중 하나이죠. 허나 일반적인 붐뱁 앨범에 대해 고리타분하고 촌스럽다는 편견을 가진 이가 있다면 그 편견을 깨주기엔 역부족일 것 같습니다. 어찌 됐건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마음에 들기에 아쉬웠던 점을 뒤로 하고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6) Los - Snakes in the Grass (2019.12.21)


 얼핏 비교를 하면 "Snakes in the Grass"는 Los의 직전 앨범 "Flame Boy"와 큰 차이가 없어보입니다. "Flame Boy"의 총괄 프로듀싱을 했던 DOOMSDAY가 이번 앨범에도 비중 높게 프로덕션에 참여했으며, Los의 랩은 그때나 지금이나 하드코어합니다. 웨스트 코스트 사운드가 "Flame Boy"에서 안 쓰였던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Snakes in the Grass"는 여러모로 "Flame Boy" 때 느끼지 못했던 강력한 존재감을 풍깁니다.


 비록 Deepflow가 단순히 90년대 사운드를 가져온 앨범은 아니라했고, 실제로 "EA$Y"에 깔려있는 트랩 스타일의 드럼 라인이나 "GLS", "Dream Chaser"의 스타일은 별개이지만, 결국 지펑크로 대표되는 웨스트 코스트 사운드가 앨범의 주축이 된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유의 신디사이저 및 신스 베이스, 그리고 군데군데 보코더 사운드 같은 소스들이 그런 색깔을 잘 정해주고 있습니다. 지펑크가 한국 음악에서 시도된 적은 꽤 여러 번 있으나 지극히 이국적이었던 스타일에, 제일 잘 들어맞는 건 아무래도 이번 Los의 랩인 것 같군요. 아무래도 그의 삶이 보태지니까 더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달까요.


 Los 특유의 끈적한 느낌을 가진 랩도 비트와 잘 조화를 이룹니다. "Flame Boy"와 비교할 때, 하드코어한 느낌에 더 치중했으며, 플로우도 좀 더 타이트하게 짜였단 느낌이 듭니다. 훅 메이킹도 귀에 쏙쏙 꽂히게 잘 만들었죠. 다만 "Bounce" 같이 좀 빨라진 비트는 버겁게 들리더군요. 또 높낮이의 변화 없이 같은 목소리로 쭉 이어가는 랩이 듣는 사람에 따라선 지나치게 먹먹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야말로 'raw'함의 아우라를 가득 풍기는 음악입니다.


 무엇보다, "Flame Boy" 때 몰라봤던 Los의 음악이 이번 앨범에서 진하게 잘 구현된 듯합니다. 사운드의 힘부터가 달라요. 오토튠 싱잉 같은 맞지 않는 옷을 무리하게 하지 않고, 잘 하는 것에만 노력한 모범적인 예인 듯합니다. 랩 스킬에 대한 지적을 몇 번 보았는데, 제 생각에는 Los가 하고자 했던 건 이번 앨범에 거의 100%에 가깝게 실현된 것 같습니다. 이런 음악을 할 수 있도록 좋은 서포트를 보내줄 VMC에게 감사하며 다음 작품을 기다려보겠습니다.



(7) DUSTYY HANN - 7 DUSTYY' 2 (2019.12.23)


 DUSTYY HANN은 공연 후기 같은 데서나 간간히 이름을 들었던, 저에게는 아직 낯선 트랩 래퍼였지만, 트랩 매니아들에겐 이미 꽤 인정 받는 뮤지션이었던듯 합니다. 이번 앨범도 저는 첫 앨범인가 했는데 제목도 그렇고, 2018년에 이미 "7 DUSTYY'"가 있더군요. 다시 한 번 제 디깅 실력에 대해 개탄하고 반성하며 이번 앨범을 들어보았습니다.


 아마 클라우드 랩이라고 하죠? 낮게 깔리는 로우톤에, 기본적으로는 단순하게 반복되는 플로우와 라임과 중얼거리는 듯한 랩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 DUSTYY HANN의 음악은 이 정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안에 다양한 피쳐링진과 트랙 분위기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무드는 일정한 틀을 벗어나진 않습니다.


 음... 음악을 넓게 그리고 많이 들어봤다고 생각해도 넘지 못하는 취향의 벽이 있고, 그 벽 너머에 존재하는 가치가 있는 듯합니다. 트랩 뮤지션들과 매니아들의 큰 지지를 받는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 저는 그동안 Cohort 크루가 시작시킨, Jeremy Quest나 Okasian이 해오던 음악과 뭐가 다른지 잡아내질 못 했습니다 - 심지어 그 둘이 피쳐링에 참여했기에 직접적으로 비교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말이죠. 중독적인, 몰입시키는, 뭐 이런 표현, 인정합니다. 하지만 DUSTYY HANN이 가진 것은 무엇인지 쉽게 말할 수 없더군요.


 뭐, GAKA, JFKid, stevenc4stle 등이 참여한 비트는 적절하면서도 적당한 신선함을 가진 괜찮은 음악들이었습니다. 최종적인 앨범에 대한 인상은 물음표로 남을 것 같고, 아직 신인이라서, 혹은 믹스테입이라서 그렇다는 핑계도 생각해봅니다. 물론 모든 뮤지션이 저에게 좋게 들려야할 필요는 없는 거겠지만, 혹시나 미래에 저도 공감할 수 있는 날이 올지 기다려보겠습니다 - 아닌게아니라 그랬던 아티스트가 꽤 있었으니까 말이죠.



(8) Layone (래원) - Foxiboy (2019.12.23)


 제목과 앨범 커버를 보면 알 수 있듯, "Foxiboy"는 여러모로 "Fixiboy"의 후속작 같은 느낌입니다. 커버가 화사해졌듯 곡들도 "Fixiboy"의 우울감에서 벗어나 사랑을 테마로 한 밝고 상큼한 곡들로 채워졌으며, 이는 이번에도 Layone의 독특한 랩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느낀 실망은 대부분 이런 기대감에서 출발한 듯합니다. "느린심장박동" 다음에 나오는 앨범이었기에 특히 그랬지만, 어쨌든 Layone은 이번에도 열심히 노래를 합니다. 랩이 껴있긴 하지만 플로우 면에서 그렇게 크게 실험을 하진 않습니다 - 어디까지나 곡들의 주인공은 노래입니다. 그런 기대치 없이 일반적인 팝 랩의 선상에서 앨범을 접하면 나쁘지 않을 수 있습니다. Layone이 짜놓은 탑 라인은 듣기 편하고 흥겨우며, 다행히도 살아남은 그의 가사 센스는 다른 흔한 가요 랩과 이 앨범을 차별시키는 요소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허나 신박한 표현과 라임 이면에 남는 억지 라임의 느낌 ("지금 내가 보는 네 모습이 진짜 너라면 또한 무스비"?)은, "급Sick 싸이퍼"나 "느린심장박동"처럼 이를 보상해줄 청각적 쾌감이 약해 단점으로 더 크게 드러납니다.


 "Fixiboy"까지는 원래 만들어뒀던 믹스테입을 턴다고 치고, 이번 앨범은 말 그대로 본격적인 신작이었는데 이런 노선이라니, Layone이 세워둔 신년 계획이 궁금해집니다. 어쨌든 노래에 대한 욕심은 있는 것 같지만 그가 가진 욕심을 충족할만큼의 노래 실력이 있진 못해보입니다 - "Fixiboy" 정도라면 나쁘지 않지만 이번엔 전작보다 훨씬 멜로디 라인에 생동감이 필요했거든요. 그런 면에선 프로덕션도 다소 빈약하고요 (Laptopboyboy 비트가 신선하게 쓰였다는 의의는 있는듯). 어차피 본인이 하고자 하는 대로 가는 거겠지만 사정을 모르는 리스너로써는 Layone의 신기한 플로우를 들을 수 없다는게 무엇보다 아쉬운 점인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다음 앨범이 나온다면 일단 그에 대한 기대를 접어두고 듣는게 내상을 덜 받는 방법일지 모르겠군요.



(9) 한국사람 - 유령 (2019.12.24)


 "유령"은 여러모로 "환상"의 연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앨범을 틀면 바로 나오는 그라울링 가득한 한국사람의 거친 목소리 때문이죠. "떠올라" "아니 벌써 추운 겨울이다" 같은 포크송 스타일의 곡들이 사이에 껴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설" 때의 바이브에 가깝다는 "Tinder Girl"도 어느 정도 저번 앨범의 "666"과 매치를 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응되지 않는 거라면 "휴대폰 어드벤처" 같은 경쾌한 모던 락 정도겠군요.


 특징적으로 이번에는 본인이 비트를 만들지 않고 다른 사람의 비트를 썼으며, 때문에 투박한 느낌이 덜하고 살짝 고급스러운(?) 느낌이 있어 살짝 신선한 케미를 전달하는 듯합니다 (타이틀곡 "ozymandias"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보컬은 더더욱 악기의 하나로, 그야말로 딜리버리 따위는 개나 줘버린 것 같은 느낌입니다. 속삭이듯이 부르는 노래나,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격하게 내질러대는 랩이나 가사를 캐치하긴 매한가지로 어렵고, 한 번에 전달되지 않는 난해하고 함축적인 내용들이라 더 그렇습니다. "유령"이란 제목이 어울리는, 때론 고어하기까지 한 기괴함이 앨범 전체에 서려있습니다.


 장르 하나로 국한되지 않는 그의 독특함 때문에 객관적으로 좋다 나쁘다를 얘기하기가 어렵습니다. "환상" 때의 연장선인만큼 이번에도 호불호는 극단적으로 나뉠 것이며, 오직 곡 수가 적어서 한 번에 소화하기 좀 편하다(?)는 정도일 거 같네요. 다만 "환상" 때의 충격에 왠지 모를 변태적인 끌림을 느낀 분이라면 이번 앨범은 큰 선물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실, "전설"을 들을 때만 해도 순수하게 이게 뭐지 란 의문을 던졌던 저도 어느새 그정도로 그에게 적응해가고 있는 거 같군요.



(10) Croco - XTAPE (2019.12.23)


 다모임 에피소드에서 잠깐 등장했던 Croco입니다. 당시 소개했던 것처럼 프로듀싱과 랩을 전부 하고 있으며, 사운드클라우드에는 2년 전부터 곡이 올라왔던 듯하지만 앨범 단위 결과물은 이번 것이 처음입니다.


 트랩 리듬의 비트에 얹은 가볍고 건조한 랩이 상당히 고개를 끄덕이기 좋게 만들어져있습니다. 이런 가벼움은 Leellamarz의 랩이 생각나게 하기도 하는군요. 앨범을 듣는 내내 '선을 잘 지킨' 깔끔한 앨범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트나 랩이나 군더더기 없이 딱 필요한만큼 했달까요. 자연스럽게 영어와 한글을 오가는 부드러운 발음도 좋았고, 후반부에 살짝 분위기를 일탈하는 말랑한 분위기도 어색하진 않습니다. 첫 앨범이니만큼 많은 걸 단정지을 순 없지만 단점을 찾기 어려운, 가볍게 듣기 좋은 앨범입니다.


 본인의 스펙트럼 중 "X 코드"를 이용하여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다른 코드는 어떤지 몰라도 일단 X 코드는 좋은 것 같습니다. 후에 보여줄 다양한 모습들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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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2020-01-07 09:46:23

로스 앨범에 대한 감상이 많이 겹쳐서 반갑네요!
챙겨듣는 에너지와 열정에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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