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렸던 감상 싹 다 하기 프로젝트 pt.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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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1 20:39:57

리뷰라기보다는 일기장에 쓸만한 글을 옮겨왔다는 느낌으로 적어보는 앨범 소감문입니다.

연말이 다가옵니다. 그래도 이렇게 계속 써와서 연말에 무슨 앨범 나왔는지 찾아보긴 쉽겠단 생각이 드네요.

근데 아직도 졸라 많이 나오고 있...


대상: 

적어도 세 곡 이상의 앨범.

내가 아는 / 어디서 들어본 아티스트 + 뭔가 지나가다가 추천 받거나 들어주세요! 했던 거라든지... 그런 앨범들


주의:

음알못. 특히 사운드알못.

붐뱁충.



(1) Eluphant - 4 (2019.11.9)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4"는 심하게 미적지근한 앨범입니다. 제작 의도도 그랬을테고, 실제 결과물도 예상보다 훨씬 그렇습니다. 지난 몇달 간 나온 더블 싱글 "e" "L" "U" 외에 신곡 두 곡만 얹어서 낸 앨범치고 상당히 통일성 있게 느껴지는 것은, 싱글들에서 앨범까지 이르는 디스코그래피가 어느때보다도 Eluphant 특유의 감성에 갇혀있고 매몰되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른바 '대중적'이란 말은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용도로 쓰일 수 있겠지만, 저는 그것이 반드시 퀄리티로 직결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취향에 따른 오그라듬이야 있을 수 있겠지만 그 틀 안에서도 충분히 아름답고 세밀한 앨범을 뽑아낼 수 있는 것이죠. 다만 그런 앨범을 만들 때 종종 저지르는 실수는 대중에게 가까이 가고자 하는 여러 장치를 너무 넣다보니 오히려 본질적인 부분과 주객전도가 되버리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4"는 그런 오류를 답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피쳐링이 없는 두 트랙을 포함하더라도 전곡의 후렴이 보컬로 이루어져있는데, 이 보컬 이상의 임팩트를 주는 랩 벌스가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뭐 가끔, 예를 들면 "싱가포르 슬링" 정도? 에서는 살짝 귀를 잡아끌긴 했지만, 이제는 Kebee와 Minos가 쓰는 패턴은 정형화되어서 어떤 흥미도 주지 못하는 듯합니다. 곡이 잔잔하니 랩 또한 치고 나갈 자리가 제한되어있고, 정성을 들인 티는 나지만 스스로 리밋을 설정한 티도 같이 납니다. 특히 Minos의 구어체를 섞는 듯하면서 난해한 비유로 빠지는 랩은, 이번 앨범에 이르러서는 그냥 돌려 말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줬으면 좋겠다는 짜증만 유발하고 맙니다.


 비트에서 이런저런 시도를 하는 것 같아 보이고, ASSBRASS, Keeproots가 짜놓은 비트는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앨범 8곡이 거의 전달하고자 하는 바이브가 똑같은데다, 첫 두 트랙은 일반적인 가요에서 보이는 코드 진행을 거의 따라가는 거 같더군요. 세 트랙을 넘기기 전에 이 앨범 수록곡들은 전부 뻔해집니다. 그나마 힙합적인 얘기를 푸는 "추수"는 그저 '우리가 그래도 뿌리 깊은 래퍼다'라고 체면 차리는 용도인 걸로만 느껴집니다. 


 Eluphant를 놓고 Soul Company 시절을 기억하는 건 이제는 의미 없습니다. 그들의 변화는 점진적이었으니, 과거로 돌아갈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그들의 변화를 새삼 확인하고는 슬퍼지는군요. Eluphant의 팬이던 제가 이번 앨범에서 아무 것도 못 느꼈다는 점보다, 위에서 언급했던 때로 "뿌리 깊은 래퍼"인 두 명이 이만큼이나 변해왔다는 것, 그리고 Kebee는 모르겠지만 Minos는 이 Eluphant 활동을 빼면 거의 의미 있는 활동이 없다는 것이 더 슬프게 합니다. 여전히 둘은 예술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것 같지만, 이번의 결과물은 그저 좋은 가요가 채 되지 못한 불완전한 작품일 뿐입니다.



(2) MFBTY - Dream Catcher (2019.11.10)


 Tiger JK는 지난 10집으로 Drunken Tiger 활동을 마무리하였고, 저는 이 소식을 다시는 고전적인 붐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이유는 그가 현재 몸 담그고 있는 MFBTY의 음악이 붐뱁하고 거리가 상당히 있기 때문이죠. 아니 사실, MFBTY는 어떤 장르라고 규정 짓기 어려운 음악을 합니다.


 씬에서 제일 오래된 아티스트들이라 할 수 있는 Tiger JK와 윤미래 (Bizzy는 쬐금은 짧으니까...)가 이런 음악을 한다는 것은 대단하다고 볼 수 있지만, 문제는 나온 결과물들이 항상 호감형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랜만에 MFBTY가 앨범 단위로 낸 "Dream Catcher"는 전작들과 거의 비슷한 감흥입니다. 앨범 수록곡들이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 "안된다고 해도 될 때까지 해"를 들으면 붐뱁인가 싶다가도, 다른 타이틀곡인 "MOTEL"은 일렉트로니카에 가깝죠. 어떤 곡은 가요 같다가 어떤 곡은 난해합니다. 단지, 공통적으로 MFBTY의 곡들은 우리가 멤버들의 과거 커리어와 연륜으로 기대하는 것에 비해 많이 가볍습니다. 아마도 신나는 곡을 만들려다 나타난 현상인 거 같은데, 이게 저는 좀처럼 적응이 안 되더군요. 


 예상을 벗어나는 음악을 하면서 세 멤버의 역할은 몇 년 전과 동일합니다. Tiger JK가 독특한 목소리와 발음으로 리드를 하면, Bizzy는 그것을 거의 비슷하게 재현하는 역할을 합니다. 윤미래는 이를 다시 한 번 재현하거나 (단 완전 영어 또는 조금 단순화된 한글 가사로) 후렴 노래를 맡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가벼운 분위기에서 윤미래의 땜핑 쩌는 랩이나 소울풀한 노래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게 제일 아쉽습니다. 아예 사운드 자체가 가벼움을 지향하고 있는 듯 들립니다.


 차라리 MFBTY가 EDM 팀으로 전향을 선언한다면 현재의 행보가 쬐끔 더 이해가 될 것도 같아요. 사실 팀 결성 이래로 하는 음악이 그렇게 크게 변한 건 아닌데, 저는 여전히 들을 때마다 적응이 안 되네요. 그나마, 원래가 알게 모르게 노래를 랩에다 섞어왔어서인지 오토튠 싱잉은 의외로 어색하진 않았습니다. 아무튼, 셋이 찾아낸 새로운 모습에 제가 언제쯤이 되야 적응할지는 잘 모르겠네요.



(3) ONE - PRVT 01 (2019.11.11)


 꽤 파란만장하다면 파란만장한 커리어를 이어가던 ONE이 결국 인디펜던트로 정규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그것도 16곡 꽉 찬 규모로 말이죠. 모습을 드러낸 앨범은 2017년 나온 지극히 YG 입김이 많이 작용한듯한 더블 싱글과 많이 달라졌지만, C Jamm 또는 Sik-K와 많이 비교를 당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여자나 약을 자주 언급하는 퇴폐(?)적인 가사는 "킁"을 연상시키며, "Nineteen"에서 "포커페이스", "GZB"에서 "Slay"를 떠올리기 어렵지 않습니다. 오토튠을 적용하는 방식과 락적인 사운드는 저도 전반적으로 Sik-K가 많이 생각나더군요.


 하긴, 원래부터 ONE은 개성파 래퍼는 아니었습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다른 래퍼와 제일 차별화되는 부분은 그의 외모 (...)였죠. 외부적 사정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단서가 적어서 그랬더라도, 청자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판단입니다. 그 와중에 홀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다니, 본인의 가치를 증명하기 좋은 기회였지만, 여전히 무난하기만한 발성과 톤으로 만드는 그림에는 한계가 있어보입니다. 일부 후렴구를 제외하면 멜로디 전개는 지극히 안전한 노선을 따르고 있으며, 때로는 비트와 잘 붙지도 않을 때도 있습니다. 가사가 덜 중요한 장르라지만 어쨌든 깊이가 얕은 클리셰 투성이인 것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 중 하나는 비트의 훌륭함입니다. Ian Purp, GXXD, Saint Leonard 셋이 나누어 제공한 비트의 에너지는 확실히 ONE의 밋밋함을 커버해주고도 남습니다. 특히 Ian Purp와 GXXD는 둘의 개인 커리어에 비춰봐도 신선합니다. 한 번 돌리기 살짝 버거운 크기의 앨범을 끝까지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은 훌륭한 비트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락적인 비트가 어쩌면 "킁"이나 "FL1P" "BOYCOLD" 같은 앨범을 생각나게 하는 원인일 수도 있겠죠.


 한편, 그동안 작업했던 곡들을 모아 낸 거라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앨범 구성은 믹스테입 같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습니다 (보도 자료엔 '첫 정규'로 얘기가 되어있던데, 어디서는 EP라더군요). 비트가 어느 정도 통일되어있어서 거슬리는 정도까진 아니지만 흐름을 많이 고려한 트랙리스트는 아니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이런 포트폴리오 같은 리스트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긴 한데, 그래도 무난한 보컬에 피쳐링 없이 16곡이나 끌고 나갈 거였으면 "Swift"나 "Stone" 같은 확 잡아끄는 트랙을 전반이나 중반에 배치했으면 좋았을 거 같군요. 특히 이 두 트랙은 앞서 보여주던 스타일과 상반되는 면이 많아서 마지막에 갑툭튀하긴 좀 부적절해보입니다.


 누군가를 연상시킨다는 게 마이너스는 될지언정 아예 부정당할 이유는 아니라는게 저의 꾸준한 지론입니다. 또, 비트를 ONE이 만든 건 아니더라도 어쨌든 앨범의 일부이니 일단 앨범의 플러스 요소인 건 맞겠죠. 마지막으로, 오랜 공백기 끝에 새로운 음악적 챕터를 시작하는 의미가 있다는 말로 이 앨범을 변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왜 정규여야 했는지, 왜 피쳐링 없이 16곡이나 넣어야했는지 등의 석연치 않음은 남습니다. 이번 앨범을 훨씬 친숙하게 느끼게 하기 위한 방법은 꽤 많았을텐데 말입니다. 돌아보면 아직까지 ONE이 진정으로 자신이 뭔가 다른 아티스트라는 걸 증명한 적은 없는 거 같습니다. 새로운 챕터를 시작했다면 부디 이후 펼쳐질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그걸 증명할 수 있길 바랄게요 (12월-1월에 하나 더 추가로 낸다는데, 그때에 기대를 걸어보도록 합시다). 



(4) $atsuki - 좆같은 내 인생 (2019.11.12)


 아마 한국 힙합씬에서 제일 시끄러운 방식으로 이름을 알린 듯한 $atsuki가 드디어 첫 EP를 냈습니다. 일명 트랩 메탈이란 스타일을 위시하여, 내공이 딸리는 사람은 4마디를 넘기기 힘든 소음성 벌스와 폭력적인 가사로 유명해졌지만, 다른 $atsuki의 곡을 들어보면 의외로 평범(?)한 이모 힙합의 형태를 띄고 있는 곡도 많았습니다.


 의외로 $atsuki에겐 첫 앨범인 이번 앨범 (최대한 이름을 말하는 걸 삼가는 중)도 그런 곡들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총 일곱 곡 중, "멍청한 나의 하루" "자살은 곧 타살이다" 두 곡을 제외하면 호흡이 매우 느려서 약간 락 발라드 같은 느낌이 더 강하군요. 이런 다양한 분위기의 곡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톤이 생각보다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여타 이모 트랩퍼들처럼 오토튠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편견을 깨부수듯, 하이톤의 보컬 때는 오토튠 없이 (물론 튠 보정을 안 한다는 의미로 쓴 말은 아니에요) 깔끔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atsuki가 유명했던 폭력적인 가사의 비중이 줄었다는 것도 긍정적으로 볼만하고, 중간에 그녀와 상반되게 타이트하게 받는 Lean Lean과의 호흡도 괜찮습니다. 다만 이외 요소들은 전부 클리셰를 크게 벗어나는 느낌은 아닙니다. 랩적인 걸 시도한 3, 4번 트랙은 플로우에 대해 큰 욕심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지루한 면이 있고, 가사들이 전체적으로 비슷한 얘기에 대한 표면적인 나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뭐, $atsuki 앨범이라고 했을 때 예상했던 범주를 뛰어넘는다는게 중요한 거 같습니다. 절대적인 점수를 따졌을 땐 아직 지나치게 느낌에 의존하고 허술해보이긴 하지만, 이 장르의 팬들은 그것을 더 장점으로 치는 것 같더군요. 그런 면에서 $atsuki는 괜찮은 앨범을 뽑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한편 그녀는 앨범 소개 글에서 25곡짜리 앨범을 후속으로 준비 중이라고 했습니다. 음... 25곡 규모라면 사실 이것보단 조금 더 재밌는 앨범이면 좋겠는데 말이죠.



(5) gong - Seoul Boutique (2019.11.13)


 gong은 과거 0CD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래퍼였습니다. UnderKorea라는 소규모 레이블 소속으로 낸 1집 "정글청춘"은 DMX를 연상시키는 걸걸한 목소리와 공격적인 랩으로 소소하지만 좋은 평을 받았으며, 이후 Amoeba Culture에 들어가 꽃길만 걸...을 것 같았지만 생각보다 밋밋한 싱글 몇 개를 낸 후 음악을 그만 둔다며 사라졌었죠. 그러던 그가 돌아온 게 많이들 알고 있을 "내일의 숙취" 주제가였고, 이제야 슈퍼잼 레코드 소속으로 공식 활동을 재개하려 하는 듯합니다.


 이미 "내일의 숙취" 주제가에서 보여준 음악 스타일이 있었기에, 과거 모습과는 상반된 어쿠스틱한, 포크 가수 같은 모습으로 완성된 앨범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예상 외로 앨범에는 세션도 잘 갖춰져있고, 랩도 있습니다. 그리고 랩에서 은근히 과거 0CD의 거친 목소리도 조금씩 묻어나오긴 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순한 맛이 강조되어있어서, 저처럼 0CD (특히 "정글청춘" 시절)의 기억을 갖고 있는 분이 아니라면 개리의 랩이 연상되기 쉬울 거 같습니다. gong이 전곡 프로듀싱한 비트는 듣기 편안하고 친근합니다. 전체적으로 밴드 음악의 형태를 띄고 있고, 보사노바, 재즈, 포크 같은 것들이 살짝살짝 느껴집니다.


 순한 목소리로 바꿨대도 기본적으로 걸걸한 느낌을 탑재한 gong의 목소리는 애절한 느낌에 딱 어울립니다. 화려하거나 과감한 장치는 없지만 듣고 있으면 금세 빠져드는 매력이 있네요. 랩보다 훨씬 비중이 높은 노래의 경우에도 일반적인 개념의 '잘 하는 노래'는 아니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애절하고 구수합니다. 진부한 비유를 들자면 소주가 어울리는 노래들이네요ㅎㅎ 원래 0CD로써 2집을 준비하다가 어떤 사정으로 음악을 관뒀다고 했는데, 돌아온 모습은 많이 다르지만 포근하고 좋습니다. gong으로써 좋은 모습 펼쳐주기를 기대합니다.



(6) 이현준 - Main Stream (2019.11.13)


 "Analog TV"는 저에겐 정말 깊은 인상을 남겨준 앨범이었습니다. 사전 정보 없이 ("끓는 물의 개구리"보다 먼저 들음) 그저 추천으로 들어본 앨범은, 고막을 사정 없이 구타하는 단단한 랩과 GOND라는 신인 비트메이커의 과감한 비트, 그리고 허심탄회하면서도 시적인 표현들까지, 피쳐링진이 없다는 걸 잠시 눈치 못 챌 정도로 엄청난 앨범이었습니다. 그렇기에, VMC의 "Boiling Point" 프로젝트 첫번째 타자로 그가 선정되었다는 소식에 크게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본작도 이현준은 본인 외의 참여진을 최소화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곡을 XENOVIBE가 비트를 만들었고, "민낯" "명함" 두 곡에만 Fredi Casso가 비트를 보탰죠. 덕분에 이야기들이 무척 개인적인 스토리로 단단히 채워질 수 있습니다. 부분이지만 직설적으로 보여지는 가정사를 배경으로 "Main Stream"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이번 '메인스트림'이란 단어는 단순히 상업적인 주류를 뜻하지 않습니다. 물론 "Intro"에서 '돈 벌려면 돈 있는 데로 가야된다'라는 아버지의 말과 함께 현준은 상경을 하죠. 그리고 서로를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사람들과, 두꺼운 화장으로 '민낯'을 숨기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회의에 잠깁니다. 흔하게 보는 "성공을 위해 상경 후 마주한 비정한 사회"의 플롯입니다.


 그런데 "Mainstream Love"부터 '메인스트림'이란 단어가 다르게 쓰이기 시작합니다. 다름아닌 누군가의 삶의 중심이라는 의미죠. 이 의미는 "유모"에서도 다시 차용됩니다 - 이번엔 조카의 메인스트림이 되겠다는 다짐으로요. 여기서부터 점차 확장된 의미는 끝에 가서 '너 하나의 메인스트림'이 되겠단 말로 끝을 맺습니다. 지극히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개념이었던 단어를 개인적인 것으로 뒤집고, 밝지 않은 배경에 역설적인 희망의 불씨를 남기는 멋진 결말입니다.


 가사는 이 앨범의 가장 큰 무기 중 하나입니다. 근래 앨범 중엔 O'domar의 "밭"에서 느꼈던 줄기가 이번 앨범에도 굵직하게 관통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 무드에 따라 극과 극으로 치닫는 이현준의 목소리 운용은 여전히 놀랍습니다. 반전 요소처럼 존재하는, 문득문득 Crush를 연상시키는 힘 있는 보컬과 멜로디 메이킹은 R&B 가수라고 해도 괜찮을 정도로 자연스럽습니다. 이런 보컬은 대개 앨범을 대중적으로 보이게 하는 역할로 쓰이나, 오로지 이현준의 것이 실린 이번 앨범에선 재밌게도, 그런 감미로운 보컬마저 "하드코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가 쉽게 좋아할 수 있는 앨범은 아닐 겁니다. 기본적으로 무겁고 호흡이 긴 앨범이라 듣는 이에 따라선 너무 장황하게 느껴질 겁니다. "Analog TV"는 GOND의 다이나믹한 비트와 앨범의 짧은 길이 (+첫 트랙이 아예 노래였다는 점도)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정규라는 커진 판은 리스너에게 조금 더 무게 있는 감상을 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XENOVIBE의 비트가 전작 같은 임팩트는 없이 다소 평범한 수준에 머물러있는 느낌입니다. 중간에 Fredi Casso의 비트가 템포를 올리면서 분위기를 환기시켜주지만, 마지막까지 듣다보면 뭔가 곡이 계속 비슷해지는 것 같긴 하더군요. 일부에서는 E-Sens나 TakeOne이 너무 연상된다는 얘기도 했는데, 이게 큰 단점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공감가는 부분이긴 합니다.


 이 앨범은 뛰어난 하드코어 힙합 앨범입니다. 비단 강렬한 사운드 때문만이 아니라, 본인이 전달코자 하는 메세지에 모든 음악 요소가 쏠려있는 것 (대중의 눈에 들기 위해, 호감을 사기 위해 덧붙인 장식이 없는 것)이 하드코어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위에서 단점처럼 열거한 것은 하드코어한 앨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점이기도 합니다. 개선의 여지는 있으나, 그래도 감동이 있었던 작품 같습니다. 무엇보다 제목처럼, 앨범에서 그려내는 이현준만의 '메인스트림'이 큰 여운으로 남는군요. "Analog TV" 이후로 너무 숨어 지냈습니다. 부디 이 기회로 더 활발한 모습 보여주길 바랍니다.



(7) D'uncanny - Trip Uncanny (2019.11.13)


 D'uncanny는 은근히 이름 자체는 특이해서 기억에 남아있는데 대체 누구의 어떤 트랙에서 접했는지를 모를 정도로 사전 정보가 없습니다. 이런 저의 무지를 꾸짖는듯 그는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확인되는 첫 싱글 나온 해만 해도 2013년이며, 이번 앨범이 이미 다섯 번째 EP라는 점을 제외해도 여러 싱글과 사운드클라우드 무료 곡 등 작업량이 많았던 뮤지션입니다. 특히 네 번째 EP 수록곡 "한 시간만"은 Verbal Jint와의 콜라보 곡이기도 하죠. 또한, 비트메이킹, 랩, 엔지니어링에 아트워크까지 도맡아하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fsb"라는 아트 크루에 속해있기도 합니다. 2016년 전에는 Superbad란 이름을 썼다는 것도 나오는데, 신기하게도 스트리밍엔 과거 작품까지 D'uncanny의 앨범으로 설명글이 바뀌어있네요.


 아무튼 이제야 저는 D'uncanny 음악을 들어보게 되었습니다. EP끼리만 비교했을 때 이번 EP는 랩보다 싱잉의 비중이 늘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본래 전 트랙 프로듀싱을 맡던 것과 별개로 이번에는 다른 사람의 비트도 꽤 받았다는 점도 있는데, 이 부분은 분위기가 통일되게 잘 유지되어서 많이 차이가 느껴지진 않습니다. 과거 곡들은 아주 대충 들었지만, "한 시간만" 같은 트랙에 있던 특이함은 비중이 조금 줄었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더 대중적인데, 그만의 개성은 잘 유지되고 있는 듯합니다. 개성의 원천은 그의 톤입니다. 잠깐 Anderson .Paak이 생각나는 얇은 톤으로 무리하지 않고 읊조리듯 풀어가는 플로우는 랩에선 다소 묻히는 느낌이 있지만 노래에선 괜찮은 시너지가 있습니다.


 큰 흠을 찾기 어렵고 쉽게 즐길 수 있는 앨범입니다. 임팩트는 약할지언정, 이런 chilling하는 느낌을 잘 내는 아티스트가 한국에 별로 없는 것도 사실이죠. 뭐가 됐든, 지금보다 언급이 더 되어야하는 아티스트인 건 맞는 거 같군요. 



(8) 예솔 - 13월 (2019.11.14)


 Vegaflow에 이어, 실로 다시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이름입니다. 마지막으로 랩을 들었던게 아마 2006년 2soo - Funkstew의 피쳐링 벌스였을 겁니다. 그전의 힙합씬에서, 워낙 여성 래퍼가 드물기도 했지만, 거의 표준이었던 윤미래와 다른 매력으로 언더그라운드에서 활약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매력적인 래퍼였죠. 알게 모르게 음악은 계속 해왔다는데, 너무나도 오랜만에 MC 한새 총 프로듀싱 하 (이 자체도 의미가 꽤 있죠)에 EP가 나오게 됐습니다.


 첫 트랙 인트로에서 바로 들리는 "Daggaz yo"나, 이젠 너무나도 다른 행보를 걷는 Skull의 피쳐링까지, 여러모로 옛날 팬들에게 서비스가 좋은 앨범입니다. 앨범에 실려있는 랩은 거의 완벽에 가깝게 과거 그녀의랩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약간 에너지는 십몇 년 전 그것에 비해 다운될 수밖에 없지만, 탄탄한 랩톤과 플로우는 여전합니다.


 이런 옛 스타일의 완벽 재연은 필연적으로 촌스러움을 야기합니다. 당시만 해도 랩, 그리고 곡을 꾸미는 것의 연구가 덜 되어있었죠. 무조건 4/4박자, 90대 BPM의 비트와 일정한 패턴의 플로우 (특히 끝 글자를 처리하는 방식에 있어), 정해진 라임 배치, 평탄한 목소리의 흐름과 사태를 악화시키는 정직한 벌스 중심의 구성까지, 지금 와서 듣기엔 지루한 게 사실입니다. "발화"는 그나마 약간의 운용이 있고 ('느리게 박자를 가지고 노는 타입' 부분의 랩은 역으로 예솔이 얼마나 박자를 갖고 노는데 있어서 경직되어있는지를 보여줍니다), "13월"과 "온도계"는 보컬 피쳐링이 있어서 괜찮은데, 오직 랩으로만 쭉 이어가는 "술래"는 보완할 구석이 없네요. 앨범이 짧게 끝나서 그렇지, 조금 더 트랙 수가 많았다면 단점은 더 크게 드러났을 거 같습니다.


 더 가혹한 평을 내리기에 앞서, 10년이 넘는 공백기 끝에 돌아와 왕년의 모습을 완벽에 가깝게 재현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Daggaz를 모르는 이들에게 적용되지 않는 부분이겠지만, 저는 어쨌든 그런 객관적인 부족을 느끼면서도 많이 반갑더군요. 무엇보다 힘을 잃지 않고 한 글자 한 글자 힘줘가는 랩에 약간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아재가 되어가는 것인가... 암튼, 이것이 컴백일지 이벤트일지 몰라도, 모습 다시 보여줘서 고맙고, 앞으로 계속 활동을 이어나갈 거라면 경직된 틀을 깨는 모습도 같이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9) Owen - smile (2019.11.14)


 힙합엘이에서의 일련의 사건 이후, 원래 "Andy Warhol"이라는 제목으로 예정이던 앨범이 새로운 예명 Owen과 함께 발표되었습니다. 게시판에서의 사건이 심경에 영향을 끼쳤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언제나처럼 제 감상에 있어선 무의미한 사건들입니다. 괜히 '스뜨감'이 아닌데 새삼 그에 대한 얘기를 할 필요는 없죠.


 여튼 2CD, 16트랙이라는 규모로 나온 "smile"은, 결론적으로는 Owen이 Owen한 앨범이고, 큰 변화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Owen에 대한 호감도가 이 앨범의 호불호를 크게 결정할 것입니다. 전작 "P.O.E.M. 2"와 비교하자면 좀 더 멜로디컬한 부분이 많아지긴 했죠. CD1, CD2로 나눌 때 CD2에서 더욱 이런 변화가 두드러집니다. 이번에 대부분의 트랙을 제공한 moocean과 eggu는, 붐뱁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진 않지만 부드럽고 재지한 바이브를 가지고 있어서 전작의 거칠었던 느낌과는 대비됩니다. 또 오토튠의 비중도 늘었죠. 한마디로 저번보다 먹통의 느낌은 줄었습니다.


 저는 의외로(?) Owen을 많이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이유는 그의 톤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 때문인 거 같습니다. 'raw'하단 말이 잘 어울릴 정도로 Owen은 그냥 목소리를 꾸밈 없이 내는 것 같습니다. 이게 "run" 같은 시원시원한 싱잉이나 "gimmick" 같은 화려한 플로우에 귀를 뺏기면(?) 그의 막힘없이 내뱉는 랩에 집중하게 되어서 좋은데, "lo-fi" 같은 의지할 것 없는 곡에서는 좀 텁텁하게 느껴지더군요. 노래도 그렇습니다. 튜닝조차 안 한듯 그대로 담겨있는 Owen의 노래는 좋게 봐줘도 감미롭진 않습니다. 이런 점이 "makaveli"에서 가장 거부감이 느껴지더군요 (내용은 뭐, Jesus is King도 잘 듣는 마당에). 이 raw함이 아마 호불호를 크게 가르는 부분인 거 같습니다. 좀 더 랩이 강조된 CD1의 경우는 "survival"에 도달할 때쯤 제가 지루함을 느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 더군다나 이번 앨범은 피쳐링진도 별로 없으니까요.


 이를 제외하면 앨범은 대체로 탄탄해보입니다. CD1과 CD2의 특징이 구분되면서도 Owen이 내뿜는 아우라가 둘을 통일성 있게 묶어주고 있습니다. 본인의 철학을 다양한 단어로 담아내는 가사는 여전하고, 위에서 노래에 대해 뭐라고 했지만 멜로디 짜는 것만 봐서는 진부하지 않고 반주와 조화롭게 묻어납니다. 본인 앨범 외에 피쳐링, 콜라보 싱글 등에서 보여줬던 다양한 모습의 정수가 이 앨범에 농축되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Owen이 Owen했다"고 표현한 것이죠.


 "P.O.E.M."을 최고의 앨범으로 뽑는 리스너들에겐 프로덕션 면에서 그때만큼의 상큼함이 없기 때문에 순위가 뒤바뀌진 않을 겁니다. 사실, 앞으로도 그런 바이브는 나오지 않을 것 같아요. 제 생각에 Owen은 "changes" 이후로 한 번 바뀌었고, 가라앉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엔 묵직하고 성숙해진 것에 가까운 듯합니다. Owen의 변화는 빠른 편은 아니고, 늘 하던 음악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성숙을 멈추진 않아왔습니다. 그리고 "smile"은 그 첨단에 있는 앨범입니다.



(10) 호미들 - B.F.A.M. (Brother from Another Mom) (2019.11.15)


 호미들은 "수퍼비의 랩학원"에서 준우승으로 Yng & Rich Smalls에 합류한 3인조입니다. 멤버가 본래 chin120, c_k_thin, louisgodamnshit이었는데 크레딧을 보니 YDP chin, YDP ck, YDP louis로 되어있네요 (아마 YDP는... 영등포?...). 이제 활동을 시작하는 Yng & Rich Smalls의 일정에 맞춰, 수학자와 일주일 간격을 두고 앨범을 발표하였군요.


 경연 영상에서는 코믹한 면과 함께 상당히 파이팅 넘치는 팀으로 그려졌는데, 앨범은 왠지 그렇지가 못합니다. 네 곡 전부다 돈 자랑이긴 한데, 앞의 세 곡은 '가난했던 과거'에 초점이 더 많이 맞춰져있죠. 개인적으로 제일 당황스러웠던 부분입니다. 퀄리티를 얘기하기에 앞서, 경연에서 보여줬던 부분이 사람들의 흥미를 끌고, 또 그걸 내세우는 전략을 세울 거라 생각했거든요. "Dear Mom" 같은 트랙을 듣고 제가 웃어야하는지 울어야하는지 알 수가 없더군요. 가사가 재미 있게 못 만든건지, 안 만든건지 좀 헷갈렸거든요.


 곡의 퀄리티 자체는 그렇게 나쁘진 않아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훅 메이킹이 괜찮더군요. YDP chin의 상대적으로 낮은 톤이 중심을 잘 잡아줍니다. 다만 나머지 두 멤버는 얼핏 들으면 서로 구분이 잘 안 됩니다 (그냥 YDP ck가 약간 더 오버해서 목소리를 내면 YDP louis 같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 생각보단 가사가 평범하고 뻔했다는 점. 마지막으로 수학자 때도 그랬지만 전 앨범 사운드가 좀 답답하게 들리더군요. 나름 많은 서포트를 약속했던 거 같은데, 아직은 사운드클라우드에서 들리는 그런 앨범 수준 같습니다. 


 이렇게 '수퍼비의 랩학원' 이후의 결과물이 대중에 공개되는 1단계가 지났는데, 아직은 갸우뚱하게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수퍼비의 포부 넘치던 선언과는 다르게 좀 초라한 모습으로 나온 거 같아요. 기존의 곡들을 털고 가는 단계였는지, 우선은 자기끼리 해보는 것이었는지... 여러 가지 추측을 할 순 있겠지만 결국 할 수 있는 건 다음 단계를 기다려보는 것뿐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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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9-11-21 21:20:59

진짜 MFBTY 아쉽기 그지 없더라구요.
실력은 있는데 '감'이 없는 분들이라고 해야할까요?
아니면 시대를 앞서가는 그들을 제가 못 따라가는 걸까요...ㅠㅠ

1
2019-11-21 22:34:12

뭔가 옛날에 스눕독생각도 드네요
스눕독도 뭐 댄스음악이니 뭐니 다양하게 하던

1
2019-11-21 22:51:10

드렁큰타이거 8집에서 보여줬던 팝적인 곡들은 꽤 괜찮았던 걸 생각하면 그냥 셋의 조합이 잘 안맞는 것 같습니다.

Updated at 2019-11-21 22:51:50

마이노스 많이 아쉽습니다. Gong님은 한 번 돌려봐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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