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렸던 감상 싹 다 하기 프로젝트 pt.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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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1 00:00:32

리뷰라기보다는 일기장에 쓸만한 글을 옮겨왔다는 느낌으로 적어보는 앨범 소감문입니다.

요즘은 진짜... 들어도 들어도 밀려있습니다. 게다가 거의 다 수준급. 씬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대상: 

적어도 세 곡 이상의 앨범.

내가 아는 / 어디서 들어본 아티스트 + 뭔가 지나가다가 추천 받거나 들어주세요! 했던 거라든지... 그런 앨범들


주의:

음알못. 특히 사운드알못.

붐뱁충.



(1) jeebanoff - Good Thing (2019.10.30)


 솔직히 시리즈를 하면서 jeebanoff 노래를 듣기야 했지만, 아직 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해야겠습니다. 이건 제가 기본적으로 음악적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도 그렇고, 완전히 제 취향이진 않아서 듣고 나서 얼마 안 가 기억에 남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앨범 설명으로 첨부된 Geda 님의 해설에는 지난 EP에서 이번 앨범으로 오면서 변화한 그의 음악 스타일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그저 '아 그런가보다'하고 읽어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밀렸던 감상은 싹 다 해야하고, 힙합엘이 goodtomeetyou 인터뷰에서 Panda Gomm이 jeebanoff의 엄청난 팬이라고 밝혔던 것에 공감하고 싶은 욕심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이 시리즈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정말 느낀 바에 대해서만 간단히 써보겠습니다 (사실 다른 글도 다 이러고 있는데 이번엔 특히 찔려서 썰을 풀었습니다...).


 부정확한 기억 속에 남아있는 jeebanoff의 이미지로는, 해설에 나온 변화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는 jeebanoff는 몽환적이고 아스라한 남자 보컬의 전형 같은 모습이고, 비록 그것이 얹혀진 비트는 다를지언정 그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늘 비슷한 생각으로 앨범을 들어왔거든요. 이는 가성 같이 가느다랗게 내쉬는 그의 발성과, 폭이 넓지 않은 음역대의 멜로디 라인, 그리고 쉬엄쉬엄 돌아가는 구성과 반복의 비중이 높은 가사 등이 모두 영향을 줍니다. 제 귀에는 사실 구원찬과 구분이 잘 안 가지만 둘의 비트 취향이 워낙 다르다보니 감상의 결과는 꽤 다릅니다.

 

 jeebanoff는 대중적인 편이지만 방금 언급한 고유의 목소리 때문에 어떤 비트도 jeebanoff화해버리는 힘이 있습니다. 이로 인한 통일성 때문에, 첫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마치 시냇물처럼 하나로 이어져 크게 흘러가는 느낌이더군요. 인터뷰에선 이번 앨범의 비트를 트랩이라고 했지만, 저는 약간 하우스나 보사노바가 더 많이 들렸습니다. 이것도 'jeebanoff화'의 한 모습일까요? 그의 목소리가 숨기고 있는 우울함은 마찬가지로 댄서블하고 신나는 비트도 뭔가 착 가라앉는 무드로 만들어줍니다 (본인은 디자이너 아이디어라고 얘기했지만, 늘 코피 흘린 남자가 등장하는 자켓도 꽤 매치가 잘 됩니다). 이때문에 후반부, "검은 구름"에서 "적막"으로 막을 내리는 부분이 상당히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여전히 jeebanoff의 음악은 제 취향은 아닙니다. 저는 아직 다소 가요스러운, 선이 분명한 음악에 더 끌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정규 앨범이란 틀에 걸맞게 jeebanoff의 의도가 거의 그대로 잘 구현된 작품이라는 건 느꼈습니다. 특히 그동안 EP 규모로 짧게 보여주던 모습이 커진 스케일에서도 똑같이 드러나는 것은 좋은 성과겠죠. 한편 앨범 해설에는 이 앨범이 그의 음악 세계의 1막의 끝을 알리는 작품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제 열릴 2막에선, 저는 열심히 더 친해져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2) Samuel Seo - The Misfit (2019.10.31)


 직전에 썼던 jeebanoff처럼 서사무엘하고도 저는 안 친합니다. 아니 어쩌면 jeebanoff보다 거리감이 더 심하다고 해야겠죠. 아직 랩이랑 노래랑 구분된다고 생각하던 시절 그의 새로운 스타일에 적응이 안 되기도 했고, 이후에도 좀 난해한 아티스트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The Misfit"을 계기로 제대로 들어본 서사무엘의 음악은 여전히 특이합니다. 우선 '네오 소울'이라고 하는군요 이걸. 개인적으로는 화지의 저번 앨범에서 접했던 스타일이고, 얼추 알긴 하지만 제대로 판 적은 없어서 D'Angelo의 영향이 크게 느껴진다는 세간의 평을 저는 검증할 능력이 없습니다. 간단하게 들어본 과거 정규 앨범을 토대로 생각하면, "The Misfit"은 서사무엘이 시도하던 음악 스타일이 더욱 완숙해진 형태로 나타난 앨범이긴 하군요. "Framework" 때까진 그저 이런걸 해보는 정도, "Unity"에선 본격적으로 거침 없는 확장, 그리고 "The Misfit"에서는 자리매김과 질적인 진화라고 생각됩니다.


 '소울'이라는 이름에 따라붙는 보이스 테크닉이 그에게 없는 것은 어떤 사람에겐 단점으로 따라오는 거 같습니다. 확실히 장르에 비해 좀 딱딱한 느낌이 들긴 해요 - 그래서 전형적인 소울 음악은 흑인의 전유물일 수밖에 없는 거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딱딱함이 저는 좀 더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한국적인 무엇'이라는 진부한 표현을 갖다붙일 여력은 없지만 의외의 차별 포인트는 된다고 생각했어요 (D'Angelo도 잘 모르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 건 아니지만;). 특히 음악이 전체적으로 자유롭고 천방지축으로 전개되는 느낌이 있기 때문에, 보이스에 담긴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함이 더욱 어울리는 거 같습니다.


 'Misfit'이란 단어에 어울리는 노래들의 메세지와, 본인이 총 프로듀싱을 맡은 반주들까지, 그 딱딱하고 투박한 곡들이 하나의 끈적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15곡 (심지어 LP판은 18곡이더군요)이나 되지만 처음에 시작되었던 그루브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이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번 앨범에 대해서 좋은 평을 보내는 건 이 부분이 큰 거 같습니다.


 단점을 집어내려면 아마 거의 제 취향에서 기인할 것이기에 굳이 생각해보진 않았습니다. 도리어, 장점으로 칭하는 점들이 제겐 단점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여전히 저는 이 장르를 잘 모르고 취향과도 거리가 있지만, 이 계기로 서사무엘의 음악 세계를 좀 더 알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본인의 뚜렷한 영역이 있는 아티스트는 그 자체로 존경 받아 마땅합니다. "The Misfit"은 그 영역의 주인을 다시 한 번 확인해준듯한 앨범이었습니다.



(3) Frogman - consoling (2019.10.31)


 전작 "앵콜"을 듣고 저는 오사마리 크루의 음악적 방향이 엄청 바뀌는건가 싶었는데, 최근 사인히어를 보면 그것도 아닌 거 같군요. 그와 별개로 Frogman은 솔로 앨범에서 일관되게 우울하고 침전하는 무드를 유지 중입니다. 다만 그 무드를 통해 완성된 구체적인 모습은 달랐죠. "Home Sweet Home"은 개인적인 과거에 대한 아픈 회고, "앵콜"은 아마 사랑 얘기로 추정되는 추억과 미련이 소재였습니다.


 이번 "consoling"은 제목 그대로 '위로'입니다. 때문에, 아직 느린 템포와 읊조리는 톤은 비슷하지만 내용적으로 조금 더 가볍게 들을 수 있습니다. 음악에 있어선 좀 고전적인 느낌의 소울 샘플링이 등장해서 붐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드럼은 또 트랩 느낌으로 잘게 쪼개져있습니다. 무엇이 됐건 "앵콜"보다는 친숙합니다. 실험적인 부분이 많이 줄었기 때문에, 한 가지 톤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을 졸리다고 생각할지 안정적이라 생각할지가 듣는 사람마다 나뉠 거 같습니다.


 크루 활동과 별개로 솔로에서만 할 수 있는 얘기를 털어놓는 모습이 좋습니다 - 기본적으로 오사마리만 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라서 더 그렇습니다. 특유의 스타일 때문에 어떤 형태로 작품을 내놓느냐에 따라 저의 호감도도 많이 왔다갔다 하는 듯합니다. 적어도 이번 앨범은 거부감 없이 끝까지 편하게 들을 수 있었네요.



(4) Lutto - 유랑 (2019.11.1)


 다른 여러 래퍼들처럼 Lutto 역시 이 시리즈를 통해 처음 진득하게 들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번 앨범 전에도 힙합보부상 시리즈의 인터뷰를 통해 접한 후 흥미가 생겨 몇곡 들어보긴 했죠. Billinism 크루 소속이며, 이번 EP가 벌써 다섯번째인 잔뼈가 굵은 뮤지션입니다.


 Lutto의 음악에선 긍정적인 바이브가 물씬 느껴집니다. 약간 자연인(?) 같은..? 그런 이미지는 예전 EP 시리즈 "루또피아"에서 잘 드러났었죠. 또 레게 아티스트를 연상시키는 특이한 발성의 멜로디 랩은 그를 논할 때 처음으로 생각나는 개성 포인트입니다. 과거에 Market No.1이란 레이블/크루가 활동할때 Diesel이란 뮤지션이 있었는데 그분이 많이 생각나더군요. 그랬던 그가 앨범 설명에서 '루또피아가 사라져 그는 떠돌아다닌다'는 설정으로 운을 떼는걸 보고, 이전과는 반대되는 스타일의 음악을 만든 것인가 잠깐 추측했습니다. 확실히 앨범 초반은 전보다도 돈에 대한 아쉬움과 부족한 것에 대한 푸념, 한탄이 진하게 주를 이룹니다. 


 그러던 내용이 "이생망"에서 점차 반전됩니다. '이번 생은 망했다'라는 꽤 우울한 구절에서, '그러니까 다음 생을 기약하고 이번엔 멋대로 살아야지'라는 결론이 도출되면서 Lutto의 예전 긍정적인 바이브를 되찾아가는 겁니다. 사실 가사에 집중하지 않고 들었을 때는 트랙이 전체적으로 밝기에, 앞내용이 다소 비관적이라도 앨범은 여전히 유쾌합니다. Lutto 특유의 톤과 멜로디는 듣는 경험을 더 즐겁게 해주는 듯합니다. 이 대책 없는(?) 에너지는 앨범의 매력을 결정하는 핵심 중 하나입니다.


 단순히 음악적으로만 따지면 사실 그의 스타일이 꾸준히 비슷한 범위에서만 움직이고 있어, Lutto를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신선함은 덜할지 모르겠습니다. 더불어 찢어지는듯한 발성이 비호감으로 다가오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고, 레게 같다는 핑계를 대기엔 프로덕션이 그렇게 심도 있지 못한게 문제입니다. 때문에, 여러 번 돌리다보면 '의외로' 흔해빠진 스타일처럼 들리기 시작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해지는 바이브와 메세지가 요즘 씬에서 비범한 것으로 자리하고 있어 Lutto의 의미는 작지 않아보입니다. 부디 이 호감형 래퍼의 다음 앨범에는 이번 앨범 같은 슬픈 한탄이 적게 실려도 되기를 기원해봅니다.



(5) Nubset & Sylarbomb - NUBSETLIST (2019.11.1)


 저번 Grack Thany 컴필레이션 "WAFER"에서, Moldy와 함께 제일 비중 있게 랩으로 참여했던 래퍼 Nubset과, 메인 프로듀서 중 한 명인 Sylarbomb이 콜라보 앨범을 냈습니다. Nubset이란 이름을 본지 얼마 안 되었기에 약간 신인으로써 이름을 알리기 위한 움직임이었던 것도 같고요 (알고보니 신인 아니라고 하면... 죄송합니다).


 지난 컴필에서 Nubset의 돈과 여자 등 원초적인 주제와 산만하고 막 나가는 플로우는 트랩 래퍼를 연상케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Grack Thany에 어울리는 색깔이 맞는지 약간 갸우뚱하는 면이 있었는데, "NUBSETLIST"가 조금 그 의구심을 덜어줍니다. 이번 앨범의 비트는 "WAFER"에 비해 훨씬 읽기 쉬워졌습니다. Sylarbomb 특유의 사운드는 살아있지만, 비트를 이끌고 가는 메인 라인이 단순하고 단촐해져서, 덕분에 래퍼의 랩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 약간 래퍼의 목소리가 그럼에도 묻히게 믹싱이 되어있는데 이건 Grack Thany 음악의 특징인 거 같습니다. 개인적으론 의도된 거라 생각했기에 별로 감상에 무리가 없었습니다.


 Nubset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심히 dumb down된 가사와 플로우를 뱉어냅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정갈해진 무드 안에서 들으니 예전처럼 거부감이 많이 심하진 않고, 특히 목소리를 장난스럽게 비틀거나 쥐어짜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트랩 래퍼로 생각하게 했던 점들은 여전하지만, 적어도 시끄러운 래퍼라고 생각했던 부분을 고칠 수 있어 이번 감상은 좋은 경험이었던 거 같습니다. 제일 좋은 점은, 일전에 앨범의 무드를 왜곡시키는 난폭함이 잦아들고 Sylarbomb이 연출하는 분위기와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더더욱 Grack Thany 멤버로써 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합니다.


 단순히 앨범이 좋고 말고를 떠난 의미를 많이 얘기했는데, 호불호는 너무 개인적인 기준에 따라 갈릴 거 같습니다 - 특히 본인이 예상하던 앨범의 모습에 따라서요. 다시 의미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자니 민망하지만, Nubset은 거꾸로 Grack Thany의 방향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군요. 여러 번 말했지만, 앱스트랙트 힙합은 예술 영화, 초현실주의 작품 같은 무겁고 진중한, 선뜻 다가서기 어려운 분위기가 먼저 연상되는데, Grack Thany의 음악은 이제 보니 블랙 코메디, 풍자극인 거 같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다음 작품을 감상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겠지요. Nubset과 Grack Thany의 새로운 콜라보를 기대해봅니다.



(6) norovein - NOROWORLD (2019.11.1)


 norovein은 BaDa_kkokiri (바다코끼리)의 크루 \$¥ Crew의 멤버입니다. 2019년 4월 "NOROLAND"라는 EP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norovein의 이름을 아는 사람 중 대다수는 "수퍼비의 랩학원"에서 본선 후반까지 진출한 모습을 보고 알게 된 것일 겁니다 -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는 수퍼비의 랩학원에서 맨발로 무대를 누비는 야성(?)의 모습과 거침 없는 내용의 랩으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NOROWORLD"는 여러모로 Uneducated Kid를 연상케 합니다 - 심지어 제목도 비슷한 "Uneducated World"가 특히 많이 기억나더군요. 약간 앞뒤 안 가리고 거침 없이 뱉는 랩이 기억에 남아있었는데, 싱잉 랩을 주요 스타일로 잡은 것이 첫 번째 연결고리고, 밑도 끝도 없는 밑바닥 범죄자 스토리의 가사 내용이 두 번째입니다. 애초에 그는 원초적이고 야생적인 이미지가 매우 강했고, 앨범의 모든 구성 요소가 그런 이미지를 북돋아주고 있습니다. 약간의 오토튠 외에는 달리 꾸미지 않은 톤인 덕분에 딜리버리가 무척 좋아서 듣다보면 정신 세계를 헤집어놓는 무서운 이야기들과, 생목으로 소리 지르는듯한 발성, 그리고 때론 반주의 코드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날아가는 멜로디 라인 등이 그렇습니다. 


 이런 다듬어지지 않은 "쌩"느낌을 매력으로 느낀다면 그 리스너에게 norovein의 전략은 성공한 것일 겁니다. 이 부분에는 개인 취향이 작용할 것이며, 아쉽게도 제가 좋아하는 영역과는 정확히 정반대에 위치해있습니다. 뭐 "복숭아"처럼 위트를 느낀 순간도 있던 건 사실이지만, 귀엽고 발랄한 느낌의 비트와 필터 없는 가사들이 일으키는 인지부조화는 마치 싸이코패스가 등장하는 불편한 영화 같아서 견디기 어렵더군요 ("우리 자살할래요"는 뭔가 트라우마까지 갈뻔). 그나마 중간중간 등장하는 피쳐링진은 조금 더 '정상적이고 음악적인' 퍼포먼스로 트랙에 탄력을 더해주어 저에겐 숨돌릴 틈이 되었습니다 (여담으로 트랙 리스트에는 피쳐링 표시가 되어있지 않지만, 크레딧을 보면 ZZANG GU, Kaston, Kitsyojii, Bambee, Leebido, Hvyeon 등의 참여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를 부각시켜준 "수퍼비의 랩학원"은 랩실력보다 본인을 각인시킬 수 있는 기발한 컨셉과 기믹을 중요한 심사 기준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norovein은 성공한 셈입니다. 어차피 한국 힙합 안에서 이런 전략은 이제 새로울 것도 없어졌기에 저의 불편함은 일종의 푸념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그 푸념과 같은 맥락으로, 저는 norovein의 다음 앨범을 들을 자신이 별로 없군요. 물론, 자신만의 영역을 공고히 한 아티스트는 그 자체로 존경 받아야한다는 제 생각은 변함 없지만 말입니다.



(7) Futuristic Swaver - Swag Society (2019.11.4)


 다작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Futuristic Swaver 역시 허슬의 부작용(?)인 자기복제를 피하지는 못 했습니다. 그나마 조금 다른 어프로치의 프로듀싱을 했던 "BFOTY"를 제외하곤, 세세한 부분에선 다를지라도 결국 일명 "Futuristic" 시리즈는 큰 틀에선 비슷비슷해보이는 음악이었습니다 ("F is Friends"까지 포함).


 그런 면에서 "Swag Society"는 첫 트랙부터 신선한 충격입니다. 일명 '카와이 트랩'이라고 한다는, 특유의 오밀조밀하고 몽글몽글한 신스가 깔리고 정확히 네 마디 후 후렴과 함께 드럼이 깔리길 예상했는데, 전혀 다른 결의 비트가 첫 트랙부터 펼쳐지니까요. 원인은 이번에 그가 비트메이킹에서 많이 물러났기 때문입니다. 크레딧에서 Laptopboyboy의 이름은 단 세 곡에서만 발견되며, 그조차도 My Homie Tar나 Badassgatsby와 합작한 것입니다. 비트만 달라졌을 뿐인데, 결과적으로 그의 디스코그래피에서 상당히 튀는 느낌의 앨범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때문에 그의 앨범에서 볼 일이 없을 것 같았던 Ugly Duck이나 뱃사공 등의 피쳐링진도 등장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Laptopboyboy의 이름이 들어간 세 곡 중 하나인 "Airspray"는 동시에 그의 프로듀싱 곡 중 제일 이질적인 곡입니다 - 일단 곡이 후렴으로 시작 안 한다는 것부터가 엄청 희귀한 요소인데, 힙합보단 모던 락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듯한 3/4박자의 시원한 코드 진행이 맘에 듭니다. 이질적인데 타이틀곡으로 선정되었다는 것도 재밌고, 암튼 Futuristic Swaver 팬들에겐 상당히 큰 선물이 될 곡 같습니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찬찬히 살펴보면 의외로 그가 많은 걸 '버리진' 않았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Every Night"이나 "Awesome" 같은 곡은 기존 Futuristic Swaver의 공식을 그대로 답습한 곡이고 (사실 "Awesome"의 프로듀서 WavYPang의 경우 전 별로 Futuristic Swaver랑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 터라..), 이외의 곡에서도 플로우와 라임, 탑 라인을 짜는 패턴은 예의 그것입니다. 앨범 제목을 "Society"로 붙인 것은 일부러 다른 프로듀서와 작업을 많이 해보는 일회성 이벤트였을뿐, 다음 앨범에서는 다시 원래의 그 모습으로 돌아올 거란 불길한(?) 예감도 남는군요. 인터넷 여론 중 "BFOTY 이후 최고의 앨범이다"라는 반응은 약간의 변화가 그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반증하는 듯합니다. 올 셀프 프로듀싱은 매력적인 타이틀이지만, 그로 인해 보는 손해가 얼만큼이었는지도 돌아보게 되고요. 저는 Futuristic Swaver도 이제 씬의 거물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그 스케일에 맞는 행보를 앞으로도 보여주길 바랍니다. 적어도, "Airspray"에서 본 가능성을 재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8) Big Will - BIGWILLBLESS (2019.11.4)


 Big Will은 Krossheartz 소속의 래퍼입니다. 처음에는 ANJAKE란 이름으로, 그다음엔 Willyeom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올해 5월 Euroko Pizza 컴필레이션에서 처음 Big Will이란 이름을 공식적으로 썼죠. 이번 앨범은 작년에 나온 Willyeom의 "Swingby" 이후 오랜만에 솔로 앨범입니다.


 그는 이름을 바꿀 때마다 스타일 변화를 보여줬고, 이번에도 Willyeom과는 다른 스타일을 시도했습니다. 전반적인 베이스가 트랩인 건 동일하나 힘을 많이 뺐습니다. "Swingby"는 뚜렷한 컨셉에 따라 어떤 의미에선 실험적인 시도도 보였던 앨범이니 그렇다 치지만, 직전 진돗개 (현 Trippy Dog)와의 합작 앨범과 비교해도 여유로워진 플로우와 흘리는 발음이 먼저 귀에 들어옵니다. 이런 변화는 첫 트랙 "뻬라리"에서 제일 뚜렷하지만, 전곡에서 뚜렷하진 않습니다. 무엇보다 5분 40여초 동안 제목대로 108마디를 이어나가는 "108"은 인상적이라 생각이 들 순 있지만 굳이 이런 스타일 변화 이후에 해야했는가 의문이 듭니다. 간신히 끝낸 곡이라는 인상이 남는 건 Big Will이 랩을 못 해서는 아닐 겁니다.


 개인적으로 제일 아쉬운 건 프로덕션입니다. 스타일 변화에 따라 비트도 마찬가지로 미니멀해졌습니다. 이 안에 흘러나오는 피아노와 808 베이스, 잘게 쪼갠 하이햇의 조합은 너무나도 전형적이어서 개인적으로는 첫 마디부터 질리더군요. Big Will이 전부터 갖고 있던 'big'한 느낌을 받쳐주는 비트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번 스타일에 이런 미니멀한 비트가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면, 저는 이번 스타일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지고 싶군요. 하지만 이쪽 음악이 모두 맥빠진 결과물만 있는게 아닌만큼 방향 자체가 문제였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본인에게 맞는 옷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좀 더 진득하게 그 스타일을 보고 싶습니다. 붐뱁충인 저는 ANJAKE 때가 아직 기억에 남지만 그건 돌아가기엔 너무 오래된 과거겠죠. 문제는 붐뱁을 떠난게 아니라 트랩에 와서도 아직 방황하는 듯해서입니다. Willyeom 시절 힙합보부상 인터뷰에서 봤을 땐 상당히 고집이 센 캐릭터 같아보였는데요, 그만큼 우직한 모습을 느낄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9) truz - 365PRDS (2019.11.4)


 mndst8 (Mindstate라고 읽습니다)란 크루 소속의 래퍼 truz는 과거 활동 기록을 찾아보기 어려운 신인입니다. "365PRDS" (PRDS는 paradise를 뜻합니다)는 인터넷에 확인되는 그의 첫 앨범, 말 그대로 데뷔 앨범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긴 러닝 타임과 무거운 주제를 되도록 피하는 요즘에 이 신인은 패기 넘치게 정규 앨범을 첫 행보로 결정하였으며, 수록된 10곡 중 어느 하나 가볍지 않습니다.


 제 취향에 대해서 거듭 말한 바 있지만, 저는 아직도 붐뱁의 유행이 돌아올 것이라 믿는 아재 중 한 명이고, 저와 같은 취향이라면 아마 이 앨범에 크게 놀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하는 신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완성도입니다. 한 트랙을 제외하고는 전곡 다 본인이 비트를 만들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합니다. 90년대 골든 에라 힙합과 2000년대 중반 한국 힙합을 연상시키는, 재즈 샘플의 비중이 높은 비트는 예상 외로, 예전 것을 재현하는 요근래 시도 중 제일 완벽합니다. truz의 허스키하고 두꺼운 톤은 곡을 하나같이 꽉꽉 메우고 있으며, 풀어놓는 얘기도 치밀합니다. 라임이 다소 약한 것은 느껴지나 사실 거의 고려할 필요 없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신인 래퍼의 첫 작품이란 것을 감안하면 만점을 주고 싶을 정도로 앨범은 탄탄합니다. 다만 제 취향에서 어긋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한 번 돌리고 나서 약간의 피로를 호소할지 모르겠습니다. 비트 위를 내달린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화려한 플로우는, 리듬 패턴만 보면 전성기의 Pento의 그것과 비슷한데, 갖고 있는 톤이 너무 무거운 탓입니다. 중간에 인스트루멘털 인터루드인 "Aeroplane '19", 그리고 "보다 좋은 삶"이 약간 숨 돌리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후 다시 텐션을 올리고 있기에 "뜨겁게" 즈음에서는 저도 남은 시간을 한 번쯤 체크하긴 했습니다. 분위기의 흐름을 재정리하거나, 분위기 환기 장치가 한 번쯤 더 있어도 괜찮았겠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Train-o-Thought" 같은 싱그럽고 센스 있는 트랙이나, "개 같은 곳"의 피쳐링 벌스가 그 앞에서 몰입을 유지시켜주거니와, "뜨겁게"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 트랙이라 괜한 트집 같기도 하네요).


 제 음악적 지식이 부족해서인지 더 이상 단점을 찾아낼 수 없던 관계로, 글을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실력만 갖고는 뜨지 못하는 시대다보니 '반드시 뜬다'란 얘기보단 '반드시 떴으면 좋겠다'라고 얘기하고 싶네요. 이 글을 읽는 붐뱁 매니아 아재들은 꼭 이 앨범을 듣고 제 얘기가 맞는지 확인 한 번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ㅎ



(10) 하얀집 - 임대문의 (2019.11.5)


 하얀집은 프로듀서 Vylinn House와 래퍼 Hayan Cliff로 이루어진 듀오입니다. 이번 앨범의 선공개 싱글 "화면"을 제외하면, "임대문의"는 공식적인 첫 활동이며, 접한 것 역시 힙합엘이에 올라온 자기 홍보글을 통해서였습니다. 당시 같이 올라온 "24 & Sophomore"의 공간감 있는 프로듀싱을 듣고 앨범을 좀 더 진중하게 들어봐야겠다 싶어졌죠. 


 1MC 1PD 앨범의 경우 종종 그렇듯, 이 앨범도 프로듀서의 영향력이 꽤 커보입니다. 우주비행 크루를 연상시키는, 감각적으로 어레인지된 신스가 앨범 분위기를 유기성 있게 연결시키고 결정하고 있으며 (사실 첫 트랙 같은 차분한 느낌은 첫 트랙 한정이긴 하더군요. 그래도 충분히 들을만 합니다), "24 & Sophomore"와 "옆집"에서 확인 가능한 감미로운 보컬도 수준급입니다. 약간은 일렉트로니카 뮤지션 같단 생각도 드는데, 특히 "옆집" 같은 래퍼의 비중이 줄어드는 트랙이 그런 느낌과 함께 Vylinn House의 존재감을 더 키워줍니다. 그래도 균형을 잘못 맞췄냐면 그건 아닙니다. 비트가 사운드가 잘 잡혀있어서, 래퍼가 너무 비트를 안 가리고 적당히 악기로써 역할을 해줬다는 느낌이랄까요.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다소 Vylinn House와 Hayan Cliff의 케미가 생각처럼 터져주진 못합니다. 우선 둘의 목소리가 안 어울리는 면이 있고요. Hayan Cliff는 어찌 보면 튀지 않도록 스스로를 자제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 선택이 막 나쁜 결정은 아니었을 수 있겠지만, 좀 더 트랩스러운 비트에서 뛰어노는 모습도 보고 싶더군요. 이 앨범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도 무난하게 잘 들었지만요. 두 멤버 다 아직 보여줄게 많다 생각하기에, 앞으로 많은 걸 보여주길 기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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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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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1 00:02:17

사실 몇 시간 전 디제이샘 님이랑 얘기할 때 10개 모여야 새 글 올린다고 그랬는데, 그러고서 메모장을 열어보니 이미 9개 앨범 후기 작성 완료... 그리고 오늘 인스타에 올릴 두 개 쓰고 나서 새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디제이샘 님과 오늘 토크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9번 앨범 truz의 앨범에 관한 얘기도 있었죠. 이번 시리즈 중 저의 최대 발견은 truz라는 아티스트였습니다. 저 앨범은 새로운 소식으로 "Extended ver."으로 세 곡 추가하여 피지컬 발매가 예정되어있다 하니 기대해봅니다.

2019-11-11 06:26:37

3곡 추가 피지컬!
이로써 truz 앨범의 평점은
별 4개에서 5개로 상향됩니다! ㅎㅎㅎ

Updated at 2019-11-11 10:03:54

대단합니다!

truz 잘 들었습니다.

https://youtu.be/wogFmEuNmT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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