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렸던 감상 싹 다 하기 프로젝트 pt.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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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7 22:36:30

리뷰라기보다는 일기장에 쓸만한 글을 옮겨왔다는 느낌으로 적어보는 앨범 소감문입니다.

정신줄 놓다보니 좀 늦게 올렸네요..


대상: 

적어도 세 곡 이상의 앨범.

내가 아는 / 어디서 들어본 아티스트 + 뭔가 지나가다가 추천 받거나 들어주세요! 했던 거라든지... 그런 앨범들


주의:

음알못. 특히 사운드알못.

붐뱁충.



(1) Bloo - It's Not Love, I'm Just Drunk (2019.9.25)


 처음 씬에 나타났을 때는 트렌디한 장르를 소화하는 트랩 래퍼 같았던 Bloo는, "Downtown Baby" 때부터 모던 락을 섞은 듯한 의외의 노선을 택했고, 또 그걸 잘 소화해내고 있습니다. 지난 "Bloo in Wonderland", 그리고 이번 앨범은 그 스타일을 성숙시키고 완성해가는 과정이었다고 보입니다. 특히 지난 번보다 훨씬 깊어지고 애절해진 감정선과 깔끔해진 프로듀싱이 호감으로 다가옵니다. 의도적으로 튜닝을 하지 않은듯한 불안정한 음정은 이런 감정선을 더 보태주는 거 같아요. Lil Peep이 연상되었던 건 저뿐일는지 모르겠군요. 사실 Lil Peep의 등장 이후로 이모 힙합도 이제는 전혀 신기한(?) 분야가 아니게 되었지만, 한국 힙합 씬 내에서 오토튠을 쓰지 않고, 감정 폭발 없이 잔잔하게, 기타 선율과 잘 섞여 노래를 뽑아낸 게 Bloo의 앨범을 의외로 특별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비트가 전부 타입 비트라는 건 좀 놀랍네요.



(2) 최삼 - 미토콘드리아 (2019.9.26)


 "미토콘드리아"는 3분 미만의 세 곡이 들어있는 짧은 앨범입니다. 그동안 최삼의 행적, 그리고 "모계 유전되는 DNA가 들어있는 세포 소기관"이라는 미토콘드리아의 특징 등을 고려할 때 그쪽 사상과 떼놓고 감상할 수 없는 앨범이고 저는 그쪽과 엮이는 건 별로 원치 않지만, 어쨌든 최삼이 첫 믹테를 냈을 때의 충격이 있어 뭐가 나올 때마다 찾아 들어보게 되는 것 같군요. 다만 전작 "3M"의 퀄리티에도 다른 의미의 충격을 받았고 그 부정적 시각 또한 이어지고 있는 거 같습니다. "미토콘드리아"가 그 이상의 뭔가를 확연히 보여주진 않습니다 - 물론 "3M" 때의 뽕끼 넘치는 가요가 들어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최삼의 한계는 그 독특한 목소리와 톤을 더 이상 새로운 방법으로 활용하지 않고 있다는 거겠군요. 그게 잔잔한 초반 두 트랙의 경우는 그나마 지루함이 덜한데, 좀 더 공격적이고 노골적인 마지막 트랙 "Chicken Game"에서의 플로우는 고질적인 문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 후렴, 특히 '어느 것을 고를까요' 같은 부분. 그 정도의 그루브가 최선인 걸까요.


 최삼이 첫 믹스테입을 발표한지 기억으론 8~9년 정도가 흐른 거 같고 당시 받은 인상이 거짓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제자리를 맴도는 모습이 안타깝군요. 아티스트의 생각과 관계 없이 신작이 나오면 여튼 들어보긴 하겠지만, 음악적으로라도 기대치를 만족시켜주길 바라는 희망은 한풀 꺾여가고 있네요.


PS 여담으로 전곡을 프로듀싱한 C.Why는 Fredi Casso로 이름을 바꿨던 거 같은데 크레딧엔 C.Why라고 써있더군요. 그냥... TMI...



(3) Jerry,K - Red Queen Theory (2019.9.26)


 Jerry,K는 꾸준히 새로운 시도를 통해서 개성과 신선함을 동시에 잡으려했지만, 진정한 의미로 성공한 적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번 말했듯, 트렌드를 도입하는 시도가 저에게는 언제나 억지스럽고 껄끄러워보였습니다. 물론 지난 앨범 "OVRWRT"와 blent.의 프로젝트 앨범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평했지만 그건 약간 제가 기대치를 많이 내려놔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Red Queen Theory"의 첫 트랙, "Cliche"를 틀자 받은 감흥은 Jerry,K에게선 실로 오랜만에 느낀 것이었습니다. 땜핑 가득한 비트 위 직선적이고 정박적인, 그러면서도 타이트한 랩은 "마왕" 시절까진 무리지만 그래도 "우성인자" 시절까지는 연상되게 하더군요. 이처럼 전반적으로 이번 앨범은 약간의 '올드 스쿨' 느낌이 납니다. 남아공 출신 뮤지션이라는 Khwezi가 만든 비트의 경쾌하고 탁 트인 느낌은 이를 뒷받침해줍니다. 좀 더 정확하게 들리는 라임과 와닿는 발성이 반갑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앨범이 Jerry,K를 향한 싸늘한 시선을 뒤집어줄 것인가, 하면 장담할 순 없습니다. 냉정하게 말해 씬의 중심에서 밀려난 그가, 그렇게 된 이유는 음악적으로 예전의 파워를 재현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사상적으로 대부분의 리스너와 합의점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음악적으로 따져본대도, 앨범을 거듭 듣다보면 부족한 뒷심이 깔끔하지 못한 입맛을 남깁니다. 뒤로 갈수록 1차원적인 비유와 도로 단순해지는 라이밍, 너무나도 정직한 플로우가 눈에 띄기 때문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전성기에도, 그의 플로우가 엄청나게 현란하거나 획기적이진 않았습니다 - 목소리와 가사가 주는 힘이 커버했던 것인데, 그 두 가지가 힘을 잃으니 영 회복세가 보이지 않는군요.


 당연히, Jerry,K를 사상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은 LGBT 페스티벌에 쓰였다는 "Parade"까지는 그렇다쳐도 "I Want Ya"부터 점차 뚜렷해지는 사회적인 메세지가 거슬릴 것입니다. 음악적으로만 앨범을 얘기하고 싶지만, 동의 여부를 떠나서 어느 때부터인가 그런 메세지는 그의 강박이 된 것만 같습니다. blent. 프로젝트로 낸 전작 "odd eye" 때 그걸 처음으로 강하게 느꼈던 거 같습니다 ("odd eye"는 반려견과의 행복한 시간을 그린 노래인데, 그 행복함보다 반려견이 백내장을 앓는 유기견이라는 걸 유독 강조한 듯 했거든요). 그리고 이 메세지의 설득력을 약화시키는 건 윗 문단에서 얘기한 것과 같은 부분입니다 - 음악적인 요소까지 싸그리요.


 아마도, 앞으로도 Jerry,K는 씬의 중심으로 다시 오지 못할 것입니다. 이건 저주도 아니고, 제가 하고 싶은 말도 아닙니다만, 현실적으로 그럴 겁니다. "Cliche"의 가사처럼, 'another tier' 정도로 그를 여길 수 있다면 나쁘진 않겠군요. 다만 이번 앨범으로 떠오른 생각은, 그가 "Cliche"처럼 좀 더 힘을 풀고 가볍게 랩에 접근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저는 리스너는 창작자의 의도에 간섭할 권한이 없다는 주의고, 설령 Jerry,K가 그렇게 한대도 여론이 뒤바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약간의 반가움이라도 간간히 느낄 수 있다면 좋겠어서 말입니다.



(4) Idolo - 나락으로 떨어지는 (2019.9.14)


 Idolo는 evelihood라는 크루의 리더를 맡고 있는 뮤지션입니다 (이 evelihood는 제가 두어 번 얘기했던 "이도 더 나블라"가 현재 속해있는 크루이기도 합니다). 사운드클라우드를 살펴보면 첫 작업물이 올라온지는 1년 남짓되었는데, 랩, 보컬, 비트메이킹 등 다방면에 걸쳐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 첫 믹스테입 "Fantasy"는 인스트루멘털 앨범이었고, 두 번째 믹테 "Midnight the Movie" (사운드클라우드에는 "난도질당한 믹스테입의 무덤"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있습니다)의 경우 기본적인 비트 뿐만 아니라 기타와 피아노 연주까지 본인이 맡았다고 되어있습니다.


 이 앨범을 검색해보면 R&B EP라고 소개하는 걸 볼 수 있는데, 사실 랩의 비중도 꽤 높고 비트나 보컬의 전개 양상도 R&B보다는 이모 힙합의 범주에 넣어야할 것 같습니다. 그의 음악들은 우울함이 엄청 짙게 배어있습니다. 좌절과 자살 충동은 그의 음악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죠. 지난달 나온 이 3곡짜리 EP "나락으로 떨어지는"도, 앨범 제목과 수록곡 제목만 살펴봐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된 감상 포인트는 우울감을 어떻게 다루고 표현했는가 일텐데요. 저는 '투박하다'가 제일 그 결과물을 잘 요약하는 것 같습니다.


 노래 안에서의 우울감은 공감하기 제일 쉬우면서도 어려운 감정 같습니다. 그건 아마 어느 정도 수위를 넘어가면 일반적으론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기 꺼려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앨범은 그 수위를 훨씬 넘어, 지속적으로 절망 속으로 빠져드는 화자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소통의 벽을 넘어설만큼의 설득력이 없어보인다는 겁니다. 가사 내용의 진위를 의심한다는 것이 아니라, 음악적인 부분의 문제입니다. 본인이 프로듀싱한 두 곡이 포함된 수록곡의 비트는 얕고 단순해서 그 정도 깊은 감정을 담아낼 여지가 없어보입니다. 여기에 Idolo의 어조는 내용에 비하면 지나치게 담담한 것 같습니다 - 담담한 어조로 그리는 우울이라면, 내용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가면 안 되었습니다. 혹은 어조와의 모순을 통해 효과를 주려 하였을까요? 그 역시 프로덕션이 포용해내지 못하는 깊이 같습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결과물은, 나쁘지 않은 분위기에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나를 죽여줘'라고 부탁하는 화자를 보는 듯합니다. 감정 이입이 되기 보다는 그저 당황스러울 뿐입니다.


 음악적 시도를 한 부분이 몇 개 보입니다. "ending called death"의 마지막 부분이라든지, "error (part 2)"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와 입장을 맡은 래퍼들을 초대해 대화를 주고 받게 만든 것 등입니다 (개인적으로 "error (part 2)"는 그렇게 본인 수준의 깊은 우울감을 공유하는 사람이 주변에 많은건가 싶더군요. 그 의심 때문인지 '끝까지 가 like 우사인 볼트'가 나오는 순간 분위기가 제대로 깨지는 느낌). 이런 부분들도 본 앨범의 원 의도와 조화롭게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요컨대 이번 앨범에서 하려는 얘기는 알겠지만, 주변 요소들의 어긋난 박자 때문에 집중을 흐트리는게 제일 아쉬웠던 것 같네요. 우울한 사람에게 그 우울의 퀄리티를 따진다는 건 웃긴 얘기지만, 저는 지금 상담원이 아니라 리스너니까 이 정도 얘기로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5) dress & sogumm - Not My Fault (2019.9.27)


 곧 솔로 정규 앨범 발매를 앞두고, 프로듀서 dress와 합작으로 sogumm이 풀렝스 앨범을 발표하였습니다. 각종 피쳐링과 공연, 방송으로 친숙해진 그녀지만 온전하게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할 기회는 적었기에, 첫 정규로써 이번 앨범은 그녀 디스코그래피에도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죠. 그야말로 대체 불가능이란 수식어가 어울리는 그녀의 노래는 이번에도 매력을 온전하게 발하고 있습니다. 보컬 버전 멈블이라고 쉽게 표현할 수 있을듯한 스타일 하나로, 어떤 트랙에서는 옹알이하는 듯한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어떤 트랙에서는 절망에 허우적대는 사람의 모습을 연출하는 등 다양한 연기를 해냅니다. 독특함만큼 좁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지 않을까 했던 우려를 반박하는 순간입니다. 더욱이, 단순히 목소리 운용뿐만 아니라 가사도 곡 분위기에 맞게 어조와 구조가 변화무쌍합니다. 그 결과 "궁금해"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연인의 글이었다가, "Frog"에서는 그야말로 저세상 느낌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 아니 말 그대로 개구리 얘기일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요ㅋㅋ


 sogumm에 대한 얘기를 지금까지 했는데, 사실 이번 앨범이 충격적이었던건 저에게는 dress의 몫이 컸습니다. 그렇게 폭풍처럼 수만 가지 얼굴을 보여주는 sogumm을 감싸는게 다름 아닌 그의 비트니까요. 앨범이 진행되는 내내 음악은 대중 가요였다가, 실험 음악이었다가, 빨랐다가 느렸다가, 극과 극을 오갑니다. 앨범의 흐름도 인상적입니다. 편안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전반부의 절정을 찍는 "Moonlight" (G선상의 아리아 샘플링이라니요! 정말 뒤통수를 때리는 센스였습니다), 그 이후 분위기가 급반전되어 무겁게 찢어지는 후반부 (후반부의 절정은 "Frog" 같습니다), 이를 귀엽게 마무리하는 "Pretty Bitch" (하지만 제목이.. 마냥 귀여운 것일까요?) 등, 앨범의 전개는 흡사 한 편의 오페라 같습니다. 이 전체에 걸쳐 무겁게 깔리는 dress와 sogumm의 아우라는 그야말로 대단합니다.


 솔직히, 쉽게 소화 가능한 앨범은 아닙니다. 한 번 돌리는게 부담스러울 수 있죠. 별다른 대비가 안되어있으면 단번에 빠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이게 전부 제 케이스였습니다. 그만큼 이 앨범은 존재감이 거대합니다. dress가 저번 EP 냈을 때만 해도 이 정도인지 몰랐는데, 정말 기억에 남을 경험이었네요.



(6) Paloalto - Love, Money & Dream: The Album (2019.9.29)


 다들 아시겠지만 이번 앨범은 "Love, Money & Dream"이란 이름의 시리즈 싱글로 나왔던 네 개의 앨범, 8개의 트랙에, "Grind"라는 신곡을 붙여 앨범으로 묶어 낸 것입니다. 정규로 되어있지만, 실제로 정규를 생각하고 만든 것은 아니라고 하였고요. 대강 들을 때는 제목 그대로 Love, Money, Dream (그리고 남은 네번째 싱글은 'Life'라고 생각했음)의 주제에 따라 두 곡씩 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제대로 가사까지 읽어가면서 보니 딱 나뉘는 건 아니더군요.


 Paloalto의 랩에 대해서 논하는 건 이미 무의미하지만, 어쨌든 최근 보여주는 것들에선 예전까지의 모습보다 좀 더 묵직한 한 방을 날리는 데 주력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이미 "YEAREND: 송구영신"에서도 그걸 느꼈고, 이번엔 더욱 자리를 잡은 느낌이에요 - 앨범의 포문을 여는 곡 "DEAD", "Get It" 두 곡이 제일 그런 트랙이기 때문에 인상에 훨씬 잘 남습니다. 이는 (이런 말 싫어할 수 있겠지만) 최근 보여주었던 stressful한 모습과 다소 겹쳐보여서 더욱 허심탄회하게 들립니다. 그밖에는, 아낌 없이 적극적으로 외부와 콜라보를 했다는 것 정도가 눈에 들어오네요.


 한 가지 앨범을 통으로 돌릴 때 조금 걸리는 건 신곡 "Grind"인데, 첫 곡이라는 위치와, 나머지 곡에 비해서 좀 더 편안한 바이브라 묻히는 것 같은 느낌인게 그 이유입니다 - 생각해보면 타인들의 시선 속 래퍼라는 주제 하에 풀어낸 얘기는, 이후 이어진 본인의 삶에 대한 관점 전에 놓기 적당해보이긴 하지만, 곡 바이브가 인트로라기엔 너무 어긋났던 것 같아요. 곡 순서가 싱글 순서대로가 아니고 약간씩 바뀌어있는데, 이건 단순히 제가 싱글 순서에 익숙해져서 그렇지만 아직까지 적응 안 되는 부분이 있네요 (특히 4번째 싱글 수록곡 - "Life"에 관한 곡들이라 보았던 두 곡 - 이 곡의 마무리가 아니니 어색어색).


 워낙 안정적인 뮤지션이니, 그 외엔 딱히 새로이 얘기할 것이 없군요. 한 곡 한 곡 본인이 말하는 바에 따라 탄탄하게 완성되어있는 서사와 흔들림 없는 플로우 등은, 더해진 묵직함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누군가는 따분하고 느슨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그런 걸 지적하려는 시도마저 무의미해보일 정도로 Paloalto는 워낙 스타일을 완성시킨 래퍼라는 거죠. 왠지 모르게, 이전에 "7interview" 영상에서 잠깐 은퇴를 언급한게 문득 떠오르는군요. '변함 없는 브랜드'이자 '씬 안 어른의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게 떠오르고 나니 완성이라는 게 슬픈 단어인 거 같기도 합니다.



(7) RAUDI - 9201 Mixtape (2019.9.30)


 저번 달 "Seoul Night"이란 프로듀싱 앨범을 발매했던 RAUDI의 새 믹스테입입니다. "Seoul Night"에선 인트로에서만 짤막하게 선보였던 랩을, 이번에는 전 트랙 다 참여했으며, 반대로 비트메이킹에는 참여하지 않은, 온전한 래퍼로써의 앨범입니다. 프로듀서가 랩에 도전하는 케이스인가 싶을 수 있지만, 실은 그의 사운드클라우드를 뒤져보면 2017년 "Nightglow"라는 랩 앨범이 이미 나와있어, 알고 보면 래퍼로 먼저 활동을 시작한 케이스였던 겁니다. 그만큼, 이번 앨범의 랩이 가볍게 접근한 건 아님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Seoul Night"도 그랬던 것처럼 이번 믹스테입도 하드코어 트랩입니다. 전체적으로 아주 정석적이고 무난한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드한 초반에서 느려지고 장엄해지는 후반부로의 흐름과, 곡 하나하나의 스토리텔링, 라임과 플로우 등은 분명 짧지 않은 경험을 가진 아티스트의 것입니다. 랩과 싱잉의 비율도 적절하고, 하드코어 붐뱁인만큼 필요한 긴장감도 나쁘진 않네요. 피쳐링진들도 RAUDI와 상반되게 타이트하게 조여주는 맛이 있어서 흐름이 지루하지 않게 적재적소에 들어가있는 것 같습니다 (Blase는 본인 앨범 것보다 여기서 더 머리에 쏙쏙 박히네요). 


 아마 일부는 RAUDI의 허스키한 발성 때문에 앨범에 좋은 점수를 안 줄 수도 있으려나요. 피쳐링진에 비교되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톤이 또렷하게 뚫고 나가는 편은 아니기 때문에 이런 하드한 곡에 묻힌다든지, 맥아리가 없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걸 보완하는 장치도 나름대로 잘 마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단점을 찾기 어려운 무난한 앨범입니다. 현재 정식 스트리밍 지원하는 건 그의 프로듀싱 앨범 뿐인데, 좀 더 래퍼로써의 RAUDI도 전면에 내세워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8) Untell x shinyujinssi - Do You Still Wanna Lie? (2019.9.30)


 어린 나이의 두 래퍼이면서 흔히 보기 어려운 혼성 듀오라는 조합 때문에 호기심이 가던 앨범입니다. shinyujinssi는 이전에 나온 싱글을 들었을 때는 여자 NO:EL이란 생각이 얼핏 들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속사포로 몰아치는 스타일을 주 무기로 삼는 둘이 뭉친 만큼, 앨범에 실린 플로우는 예상치를 크게 벗어나진 않습니다. 


 속사포가 이어지는 앨범의 경우 귀가 피로한 경우가 많은데, 이부분에서는 프로덕션이 큰 역할을 해준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둘의 랩에 상당히 어울리는 비트가 초이스되었는데, 평범한 리듬감의 비트를 피하기도 했고, 미니멀한 비트로 랩이 꽉 들어찰 자리를 마련해준 것도 눈에 띕니다. 또 둘의 랩이 생각처럼 그렇게 억세게 나오지 않았다는 것도 피로감을 덜어주는 부분인 거 같습니다 - Untell이야 원래 살짝 속삭이는 듯 가벼웠고, shinyujinssi는 제 기억이 다른 건지, 이번에 힘을 푼 건지, 물론 Asol이 연상되는 액센트를 주는 스타일이 있긴 하지만 나쁘진 않더군요. 재밌는 건 앨범 내에서 Untell이 하이톤, shinyujinssi가 베이스를 맡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 이러나 저러나 꽤 케미가 좋은 조합입니다.


 shinyujinssi에 관해서는 이외에도 라임이나 특수 이펙트로 강세를 주는 방식이나, 중간중간 보인 싱잉 랩에서 더 많은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본인 것을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하면 다양한 스펙트럼이 나올 거 같더군요.


 마지막으로 고등래퍼 때 Untell 가사에 보였던, 아무런 의미 없는 한영혼용이 많이 줄어서 좋았습니다. 속사포이기도 한데다 가사는 어순이 뒤죽박죽이고 많이 축약되어있어서 사실 메세지가 또렷하게 전달되진 않지만, 이런 느낌의 앨범은 사운드에 초점을 맞춰서 감상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길이가 짧아서 중간에 들어간 스킷이 두 개인 점은 사소하지만 아쉽군요. 짧지만 굵고 인상적인 앨범이었고, 앞으로도 함께로든 따로든 많은 활동 기대해보겠습니다.



(9) Benzamin - Closet (2019.9.30)


 Ponyromo와 함께 NO:EL의 "Red.MGZN.Cum" 시리즈로 알려진, 아마도 Red Boys라고 부르면 될듯한 크루(?)의 일원인 Benzamin의 앨범입니다. Suwoncityboy와의 콜라보 앨범이 나오기 전까진 다른 디스코그래피가 없었던 Ponyromo와 달리, Benzamin은 사운드클라우드를 통해 작년 두 장의 EP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스트리밍 사이트로 정식 공개된 건 이번 앨범이 처음입니다.


 "Red.MGZN.Cum" 시리즈나 "Summer '19" 등 NO:EL과의 합작에서는 Benzamin은 NO:EL과 겹치는 모습을 보여줬기에 기억에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이번 앨범은 NO:EL과 다른 노선으로, 전체적으로 대중적인 색채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중적이라는게 늘 그렇듯, 그 결과로 곡을 듣기엔 편한데, 듣고 나면 본인의 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에 잘 안 남곤 합니다. 아이러니하게 NO:EL과 거리를 두어도 생각보다 본인이 안 드러난 거 같아요. 가요계를 노린 앨범이 아님에도, 앨범은 여러모로 어중간하게 대중들을 타겟으로 삼았던 다른 여러 앨범들과 비슷합니다.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NO:EL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은 느낌입니다. 개인적으로 "Sunset"에서 '엄마 내가 제일로 사랑해'라는 랩을 뱉을 땐 확 NO:EL이 느껴졌네요.


 역으로 정말 대중을 노린 앨범으로 나왔더라면 나름 괜찮게 평할 법하긴 합니다. 멜로디 메이킹도 괜찮고, 예전에 보여줬던 화려함에 치중한 플로우와 반대로 (이 역시 NO:EL의 영향이라 느껴지는...) 전달력 있고 깔끔한 랩이 실려있으며, 프로듀싱도 크게 흠잡을 데 없이 적정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뭔가를 얹지 않아서 아쉽네요. Benzamin이란 래퍼가 어떤 래퍼인지 알려면 아직 더 오래 두고 봐야할 거 같습니다.



(10) Zico - Thinking Pt. 1 (2019.9.30)


 한때는 허슬러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녔지만 한동안을 모습을 비추지 않았던 Zico가 드디어 본인의 레이블 KOZ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사실 이 앨범은 Pt. 2가 나오면 함께 써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텀이 좀 되는 거 같아서 Pt. 1만 쓰게 되었네요. 대중과 매니아에 한 발씩 걸치고 있는 특별한 위치 때문에 큰 주목을 받았던 그였기에, 오랜만의 귀환에서 무엇이 바뀌었고 무엇이 나아졌는지가 상당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Zico의 화려한 플로우는 여전합니다. 랩을 단순화시키고 가사를 비우는 현재의 트렌드를 고려해보면 사운드든 메세지든 빽빽히 채운 그의 전략은 재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저는 친구한테 '붐뱁의 최후의 보루 아니겠냐'고 농담처럼 얘기한 적도 있어요 (논쟁에 불을 지필 의도는 없는, 말 그대로 농담입니다ㅎ). 많은 이들이 가사적으로 성장하였단 얘기를 하는데, 사실 Zico는 원래 가사를 잘 썼습니다. Block B 시절부터 기발한 펀치라인이 넘쳤고, "오만과 편견"처럼, 비단 스웩 곡이 아니더라도 섬세한 감정선을 묘사할 줄 알았죠. 그래서 전 가사를 보고 놀라진 않았습니다. 다만, 힙합 특유의 과장된 자기 스웩이 아닌 자신의 행보에 대한 자신감과 통찰을 가사를 옮겼다는 면에서는 전에 없던 성숙미가 느껴지긴 하더군요.


 한편, Zico는 앨범 발매 직전 Fanxy Child의 새 싱글 "Y"에서 싱잉을 선보였습니다. 이는 그의 음악 세계의 변화에 대한 티저 같은 것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 앨범은 싱잉 랩의 비중이 큽니다 - 순수한 랩의 비율은 절반이 안 된다고 볼 수 있죠. "Thinking" 앨범을 두 가지 파트로 나눈 건 스타일에 따른 분할이라 했는데, 그래서 이번 파트에 이런 스타일이 집중적으로 들어간 걸지도 모르겠지만, 매우 감성적이고 멜로딕합니다. Zico의 멜로디 메이킹 능력은 아직 갸우뚱합니다. 아니, 메이킹 능력이 범인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Zico 특유의 과장된 억양과 다이나믹한 목소리 운용은 하드코어한 스타일에선 늘 빛을 발했지만, 이번 앨범의 스타일과 조화로운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 '파워'를 절제하지 못해 "사람" 같은 잔잔한 곡에도 약간 격한 느낌의 랩이 들어가게 되고요, 한 가지 대표적인 예로 보도 자료에 PBR&B로 소개되어있는 "One Man Show"는 스타일 때문에 PBR&B의 느낌이 잘 나지 않습니다. 역으로 그때문인지 이 곡들은 살짝 빅뱅의 느낌도 나는군요 - 알고 보니 그걸 의도했던 거려나요. 하지만 솔로에게 어울리는 구성인지는 여전히 의문 부호입니다.


 그 외에 사소하게는, 스타일 별로 분류했다는 말이 무색하게 나머지 곡과 전혀 섞이지 않는 (물론 개인적으론 매우 좋았던) "극"이나, Block B 데뷔 시절이 연상되어 당황스러웠던 "걘 아니야" (그냥 이런게 수록되어있을줄 몰랐습니다a)도 갸우뚱하는 포인트였습니다. Zico에게 너무 큰 기대치를 갖고 있어서 이렇게 꼬치꼬치 캐는 걸지 모르겠지만, 이전부터 넘치는 에너지를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은 계속 느껴왔습니다 - 그야말로 양날의 검이었죠. 그나저나 첫 번째 파트는 감성적이고 팝스럽게 뽑혔으니, 두 번째 파트는 공격적으로 나오려나요. 그러면 훨씬 괴리감이 덜하게 즐길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어쨌든 Zico가 음악 잘하는 건 사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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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9-10-18 08:21:11

제리케이가 아직 살아잇엇군요

WR
2019-10-18 08:23:28

개인적으로 이 시국에 슬릭이 새 앨범 내서 글 써야될까봐 무섭습니다

2019-10-18 23:54:39

블루 앨범 기대 안하고 들었는데 좋네요
이런 류 음악을 참 잘하는 것 같아요

2019-10-19 20:08:24

제리케이 우성인자까진 좋게 들었는데...당시의 제가 지금보다 진보 성향이 더 강하기도 했고, 퀄리티도 괜찮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사상적인 부분도 잘 안맞게되고 음악도 점점 구려지니 선뜻 손이 안가는 뮤지션이 돼버렸어요.

 
24-03-22
 
2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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