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 예술의 자유, 혐오 표현
1.
표현의 자유는 내심의 자유가 아니라 내심을 말과 행동으로 꺼내어 세상에 소리치는 자유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진 원천적으로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 생각을 알아내기 위해 심문을 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상검증, 십자가 밟기입니다. 같은 이유로 세상에 발표되지 않은 가사나 습작, 개인적 수준의 창작이라면 윤리와 사상을 문제삼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는 경우는 개인과 세상과의 관계, 개인과 다른 개인들과의 관계입니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거나 세상의 비윤리에 편승하고 그를 강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상황은 개인의 양심과 자기 성찰에 맡길 일입니다. 오늘날 예술의 혐오표현을 금지하자고 할 때 \'창작\'이 아니라 \'발표\'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
2.
표현의 자유를 주창하고 정당화하는 이론을 세운 선구자는 영국의 공리주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입니다. 밀은 저 유명한 <자유론>에서 표현의 자유가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행복한 삶의 토대이기에 그 자체로 중요하다고 웅변하지만, 한편 세상사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중요하며 아무리 소수의견이라도 침묵을 강요해선 안 된다고 논증합니다. 첫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진리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설령 그 의견이 틀렸다 해도 일부 진리를 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다수 통설이 전적으로 옳다고 해도 반대의견을 통해 검증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편견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다수 통설이 독단적 구호로 전락해 이성과 경험에 의한 진심어린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밀은 사회의 지적 효용의 증진과 공공의 복리에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때문에, 윤리성에 관계없이 접근 가능한 예술의 범위를 활짝 열고,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직접 경험하며 타당함을 판단하는 것도 합리적입니다.
밀의 주장에는 두 가지 큰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 밀이 말한 표현의 자유는 \'개인에 대한 개인의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국가에 대한 표현의 자유\'입니다. 다시 말해 밀은 국가 권력이 검열할 대상을 가려내고 주장과 몸짓을 틀어막는 걸 반대한 것이지, 사람들이 여론을 통해 비판할 자유까지 막자고 한 것이 아닙니다. 밀은 더 참 된 진리를 찾기 위해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했으니, 오히려 그런 상호 비판에는 적극 찬성할 것입니다. 또 하나, 밀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 옹호에는 조건이 앞서는데\"(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 자유는 무조건적으로 옹호되어야 한다.\"입니다. 혐오 표현은, 나와 다른 정체성을 지닌 소수자에게 정신적 사회적 폭력으로 행사되고, 사람들 편견을 부추겨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혐오 표현은 \'표현의 자유\'란 가치와 관계없이 얼마든지 가혹한 비판을 받을 수 있고, \'표현의 자유의 예외\'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3.
남는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혐오표현을 규제할 것이냐 입니다. 예술을 넘어서 일반론에 입각해 말하자면, 제시된 선택지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럽식 노선이고 하나는 미국식 노선입니다.
유럽 국가들은 대체로 \'혐오표현\'을 \'혐오범죄\'로 규정하고 형사처벌합니다. 트위터에서 인종차별 험담을 한 영국 대학생이 체포당했다는 일화는 이런 맥락입니다. 이렇듯 엄격하게 대응하는 것은 유럽 전역에는 수많은 이민자들이 유입해있고 그들에 대한 적대 정서가 팽팽하기 때문입니다. 아차하는 순간 \'언어적 폭력\'이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더불어 불과 백년 전 벌어진 \'유태인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사상 유례없는 비극의 기억 때문입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나치를 긍정하거나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발언을 공적으로 개진하면 법의 철퇴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표현의 자유에 관한 미국의 모토는 올리버 웬들 홈스 대법관이 주창한 \'사상의 자유시장\'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자유 시장경쟁을 거쳐 생산성 낮은 기업이 퇴출되듯, 사상과 표현의 자유로운 경쟁에서 패한 나쁘고 거짓된 사상과 표현을 도태시키면 된다는 겁니다. 미국은 혐오 표현 및 차별행위를 형사 처벌하지 않고 국가 기구가 차별 시정을 요구하거나 민사소송으로 돌립니다. 타인종과 동성애자를 겨눈 차별 표현을 회사와 학교 등 사적 기구가 스스로 제정한 ‘표현 강령’(Speech Code)으로 처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4.
저는 예술의 권능 중 하나가 비윤리적인 것과 대면하는 경험이라 여깁니다. 법과 도덕의 억압을 피해 비윤리를 간접 체험하는 공식적 해방구가 \'예술\'이고 \'문화\'이고 \'오락\'입니다. 선한 것 만큼이나 악한 것도 인간의 본성입니다. 비윤리를 재현한 예술과 조우하며 우리는 숨통을 틔우고 해방감을 느낍니다. 분명 예술이 현실 자체는 아니니까요. 에미넴의 마셜 마더스 엘피를 듣고 살인을 결심하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 겁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힙합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거겠죠. 예술을 통한 비윤리의 체험은 또 다른 장점을 가지는 데 과연 비윤리적인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인식하고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인간의 복잡한 실존을 풍부하고 냉정하게 직시하여 영감과 통찰을 얻거나, 비윤리를 더 잘 제어할 수 있습니다. 윤리의식은 에술을 통해 확립된 다기 보다, 교육과 사회화를 통해 형성됩니다. 이미 윤리의식이 충분히 고취된 사람이라면 비윤리적 예술작품을 보고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현실에서 윤리가 무너지는 책임을 예술의 탓으로 떠넘기는 것도 부당하죠.
그런데 예술의 윤리적 일탈에 무제한의 자유를 허한다면 정당할까요? 그렇다고 선뜻 답하기 석연찮으실 겁니다. 예술은 상상력이기에 보다 폭 넓은 자유를 주어야 하지만, 때로 상상력의 힘은 무엇보다 막강하니까요. 예술은 딱딱한 지식과 뉴스가 아니기에 전파력과 정서적 파급력도 막강합니다. 만약 예술의 상상력을 현실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소함\'으로 치부한다면, 음악이 우리의 삶을 바꿀 수도 있다는 믿음도 철회해야 일관성이 있습니다.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죠. 문화의 이데올로기성에 관해선 단적으로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원주민들에게 서구 상업영화를 틀어줬더니, 바다를 항해하다 흑인 노예를 배 밖으로 집어 던지며 위기를 탈출하는 장면에서 전부 다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하더랍니다. 아슬아슬한 영화의 문법에 빠져 현실에서의 자기 처지를 자각하지 못한 것이지요.
5.
는 남녀노소를 막론한 시청자에게 열린 대중적 음악예능입니다. \"산부인과\" 드립이 그때 그 시간에 튀어 나올 걸 알고 방송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설령 그때 보지 않았더라도, 논란이 된 이상 뉴스와 인터넷을 통해 소식을 접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든 여성이라면 모욕감을 느낄 것 입니다. 사회 구성원의 문화윤리 의식을 높이는 한편 예술에도 윤리적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 윤리적 기준을 설정하고 합의를 모색하는 과정 자체가 의식 수준을 높이는 과정의 일환이겠지요. 무엇보다 예술의 혐오표현을 규제할 이유는 그 표현에 얻어맞는 당사자들에게 폭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인데, 이것은 비당사자들의 의식수준과 무관하지요.
예술을 예술로만 볼 만큼 예술관과 윤리의식이 성숙하지 않은 사람은 많습니다. 가령 충분히 사회화되지 않은 십대들이라면 어떨까요. 가령 이미 여성혐오 사상에 찌들어 있거나 여성혐오가 왜 나쁜지, 저 가사가 왜 여성 비하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그들의 나쁜 확신을 강화하거나 혐오에 대한 감수성을 마취시킬 수 있습니다. 세계 인구는 수십억입니다. 그 모든 사람의 의식 수준이 모범적이길 바라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것보다 훨씬 적은 숫자로 발표되는 예술 콘텐츠를 윤리적 기준으로 가늠하는 게 현실적입니다. 우리보다 윤리의식과 문화인식 수준이 높을 법한 유럽, 힙합 문화가 훨씬 광범위하게 자리잡은 미국에서도 예술의 혐오표현이 논란이 된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있지요.
예술을 예술로만 보는, 윤리 의식 높은 소수의 매니아만 소비하는 고립된 언더예술이란 이상적 상황을 가정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런 경우가 실제로 존재할지 의문입니다. 이번 송민호 사태에 대해 소위 \'힙합 매니아\'들의 성지라는 힙합 커뮤니티에서도 \"여성혐오라고 한들 뭐가 문제냐\" \"송민호 가사가 왜 여성혐오냐\"라는 여론이 대세였던 걸 환기하면 그렇습니다. 힙합 커뮤니티에서 류 힙합의 대중화에 찬성하는 여론이 많았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아이러니하지요. 힙합이 메인스트림에 진출한 이상, 사회의 보편 양식에 걸맞도록 자신을 성찰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6.
의견을 밝히자면, 저는 여성과 동성애자, 다른 인종, 전라도 사람 등 사회적 소수자를 노리는 혐오표현 만큼은 영역을 막론하고 퇴출해야 한다는 강력한 확신을 품고 있습니다. 다만 국가의 가위질이 아닌 여론의 견제와 플레이어들의 성찰에 의한 해결을 지지합니다. 그 또한 예술의 자율성을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유럽과 미국에 비해 한국은 혐오 표현에 대한 고민의 역사가 짧습니다. 최근 몇 년 간 일베류 넷우익이 발흥하고 여성혐오, 호남혐오가 인터넷에서 들끓으면서 논의의 물살히 급해지고 있지요. 과거에는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던 ‘힙합의 여성혐오’가 드디어 질타 당한 것도 그런 흐름이 일으킨 파장이라 여깁니다. 혐오 표현이 나쁘다는 대 원칙에 합의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왜 나쁜지 가슴 깊이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예술은, 예술이라서 용서받을 때도 있지만 예술이라서 용서하기 힘든 때도 있습니다. 힙합 커뮤니티 안에서부터 이런 논의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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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 분이 올린 베스트 글에 다셨던 리플을 감명깊게 보았는데 이렇게 글로 다시 정리해주셨군요. 정말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